뜨는 박원순 대북관은? “北인권 극우보수 주제”

야권의 10·26 서울시장 후보로 박원순 변호사가 급부상했다.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의 조건없는 양보가 그를 유력한 서울시장 후보로 만들었다. 그는 7일 실시한 가상대결 여론조사에서 상대 여야 후보에 상관 없이 1위에 올랐다. 


박 변호사는 2007년 대통령 후보군에 포함되기도 했지만, 현실정치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던 관계로 과거 행보가 대중적으로 알려지지는 않았다. 국가보안법 철폐를 주장해 온 인권변호사이자 시민단체 참여연대에서 활동했다는 정도가 대중에게 알려진 그의 면모이다.


박 변호사는 1990년대 이후 최열 전 환경운동연합 사무총장과 함께 좌파 시민운동 진영의 상징적 존재였다. 그에게는 ‘인권 변호사’ ‘시민운동 개척자’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었다. 서울대 법대생이었던 그는 유신체제에 항거해 할복한 김상진 열사 추모식에 참여했다가 투옥돼 제적됐고, 이후 사시 22회에 합격해 1년여의 검사생활을 한 바 있다.


1996년 만들어진 참여연대의 초대 사무처장이었던 그는 2000년 총선에서 낙천·낙선운동을 벌인 총선시민연대 상임공동집행위원장으로 활동했다. 그는 당시 장원 녹색연합 대표, 최 전 사무총장 등과 함께 시민운동의 트로이카로 평가될 만큼 시민사회에서 인지도가 높았다.


이후 아름다운재단과 아름다운가게를 만들어 나눔, 자원활동 등 공익사업을 펼치면서는 이미지가 한층 부드러워지기도 했다. 2002년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도 아름다운재단에 급여 전액을 기탁했었다. 안 원장과도 아름다운재단 운영을 통해 인연을 맺은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그는 희망제작소 상임이사 등의 직책을 갖고 있다. 총선시민연대의 후신격인 사회단체연대회의는 2001년 2월 전국 211개단체가 모여 출범해 좌파 시민사회 진영의 목소리를 대변해 왔다. 그는 여기서 2003년까지 공동운영위원장직을 수행했다.


이 단체는 창립 이후 호주제 폐지, 국가보안법 폐지,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이라크 추가파병 중단, 노무현 대통령 탄핵 무효 범국민행동, 용산철거참사 시국선언, 제주도 해군기지 건설 반대 등에 참여해 왔다.


2008년 6월 이명박 정부 100일을 기해 발표한 성명에서는 “지난 20년간 피와 땀으로 일군 민주주의의 후퇴를 목도하였다. 특히 정부가 국민들의 강력한 반대의사를 완전히 묵살하면서 미국 쇠고기 수입 고시를 강행한 지금, 국민들은 이명박 대통령을 더 이상 국민을 위하는 대통령으로 여기지 않고 있다”며 대통령의 대국민 사과, 내각 총사퇴, 졸속협상 졸속정책 백지화 등을 주장했다. 


대북관의 경우, ‘햇볕주의’ 시각이 강했고, 북한인권문제에 대해서는 정보 제한을 이유로 분명한 입장표명을 빗겨가는 태도를 취했다. 그의 활동을 놓고 보면 좌파의 무관심, 무대응 전략과 별반 차이가 없다. 


1999년 8월 참여연대 월간 ‘참여사회’에서 3월 미국을 방문해 NED(전미민주주의기금) 칼 거쉬만 회장과의 만남을 소개했는데, 이를 통해 북한인권 문제에 대한 입장을 확인할 수 있다.


거쉬먼 회장은 자신들이 보다 덜 민주화된 나라들에 주된 관심과 역량을 집중할 수밖에 없음을 설명했다. 아시아의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도 중국, 버마, 인도네시아 등에 더 투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북한에 대한 관심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북한의 경우 워낙 폐쇄적인 사회여서 북한의 민주화나 인권문제에 당장 접근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며 그 대신 점진적인 남북교류와 경제교역의 추진에 따라 신뢰와 화해를 쌓아가는 것만이 북한을 민주화시키는 길일 것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지난번 Ms.코언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도 집요하게 북한인권문제에 관심을 갖고 운동을 한다면 재정지원을 할 용의가 있음을 이야기하여 좀 이상하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한국에서 그 동안 북한인권문제를 다루는 단체와 언론은 대체로 극우보수파들이었음을 설명했었다. 동시에 나는 거쉬먼 회장에게 아시아국가들 가운데 그나마 선진적으로 민주주의를 발전시켜 나가고 있는 한국과 같은 존재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한국의 민주적 이행과정의 포괄적 진전이 한국을 따르는 많은 아시아·동구권 국가들에게 모델이 될 수 있다는 이론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에 대한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겉으로는 동의하는 듯하면서도 심각하게 새겨 듣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2000년 남북정상회담 6·15선언에 대해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는 “TV에 인공기가 비춰지는 것이 현실이다. 보안법은 저절로 사문화될 것”이라고 했고, “북한의 경우 워낙 통제된 사회라 최고지도자의 변한 모습이 국민(북한주민)들에 미치는 영향이 우리보다 훨씬 클 것이다. 우리보다 더 급격히 변할 것이다”고 밝힌 바 있다.


2008년 2월 자유아시아방송(RFA)과 인터뷰에서는 “북한에 대해서는 정보가 제한돼 있어서 워낙 폐쇄적인 국가니까 (알 수는 없기는) 합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제된 국가에서는 고문이 있을 가능성이 많죠. 어떤 고문이나 권위주의적인 폭압적 통치는 분명히 저는 있을 것이라고 보고요, 그것은 국제사회가 일정하게 개입을 해야죠”라고 말했다.


‘국제사회 (일정한) 개입’을 언급한 부분에서는 북한인권에 대해 기존의 관념에서 부분적으로 변화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2008년에는 북한인권이 이미 세계적 이슈로 부각된 상태였기 때문에 이러한 인식 수준을 진보적으로 평가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북핵 문제와 관련해서는 그는 미북간의 협상을 강조했다. 2009년 9월에는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등과 함께 ‘한국 시민운동 방미대표단’ 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해 미 행정부와 의회 인사들을 만나 ‘능동적 협상만이 비핵·평화를 보장한다’는 취지의 의견서를 전달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