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오르는 北 중간계층…“돈이 실력”

▲통일거리 시장 가전제품 매대

사회주의는 당초 노동자와 농민이 국가와 사회의 주인임을 표방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노동자, 농민은 소외되고 관료주의로 흘러갔다.

북한은 60년대 후반부터 전통적인 사회주의 국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변질되었다.

지금 북한사회의 주인은 김정일과 극소수의 핵심계층이다. 그 주변에는 권력기관 종사자들이 있다. 지금 북한의 노동자, 농민은 착취 대상이다.

이런 북한에 시장경제 사회에서 볼 수 있는 ‘중간계층’이 생겨났다. 중간계층은 일반주민들이 갖기 힘든 재산을 갖고, 시장에서 중개 및 도소매 장사를 하는 상인들을 일컫는 표현이다.

지금 이들 중간계층은 북한 주민들의 생존과 시장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이는 과거 북한사회에서는 상상할 수 없던 일이다.

중간계층이 생겨난 배경은 북한의 경제몰락과 직접 관련되어 있다. 북한경제는 적어도 80년대까지는 사회주의 계획경제였다. 국가가 계획에 따라 주요 물자의 수요와 공급조절을 했다.

그러나 80년대 후반부터 사회주의 계획경제 시스템 곳곳에 구멍이 생기기 시작했다. 주민들은 생필품 부족현상을 겪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부족한 생필품은 암거래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80년대 중반부터 대도시부터 생필품을 은밀히 거래하는 암시장이 형성되었다. 대부분의 주민들은 암시장을 통해 부족한 생필품을 구입했다. 이같은 암시장 거래는 북한당국의 철저한 감시, 통제 속에서 몰래 이루어졌으며 적발되면 처벌과 함께 물품이 압수되었다.

하지만 90년대 중반에 들이닥친 대량아사(식량난)는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던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일거에 무너뜨렸다. 국가배급체계가 붕괴된 것이다.

특히 식량공급의 붕괴는 북한주민들에게 사형선고와 같았다. 이 때문에 수백만 명의 북한주민들이 굶어 죽었다. 주민들은 생존을 위해 장사에 나섰고 전국 각지에 시장이 형성되었다.

대량아사가 만들어 낸 전문 장사꾼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마비는 장마당(종합시장)의 활성화를 불러왔다. 이는 북한에 장사를 전문으로 하는 ‘시장상인’이라는 새로운 계층을 탄생시켰다. 별다른 대책이 없는 북한당국도 생존을 위한 주민들의 시장활동을 묵인할 수밖에 없었다.

북한당국은 90년대 중반부터 개인적인 북-중 무역을 허용하고 국경지역에서의 시장 번성을 묵인했다. 시장을 통한 주민들의 식량과 생필품 구입을 허용한 것이다. 이때부터 북한주민들에게 장사의 기회가 왔다. 대량아사가 북한에 새로운 계층을 만들어내는 데 한몫 한 것이다.

이들은 처음에는 집에 있는 가전제품(텔레비전, 녹음기 등)과 자전거 등을 팔아 장사밑천으로 삼았다. 그리고 중국에서 들어오는 식량(쌀, 밀가루, 강냉이)과 옷, 설탕 등을 되팔며 돈이 된다면 닥치는대로 장사를 했다.

이들은 점차 경험이 쌓이고 장사 원리를 알게 되면서 부문별 전문상인으로 발전했다. 쌀을 판매하는 사람은 쌀장사만 하게 되고, 천을 넘겨받아 되파는 사람은 천 장사만 하는 식으로 세분화된 것이다.

이들은 한 분야에 전념해야 돈을 벌 수 있다는 귀중한 경험을 쌓았고, 여기에 적응하지 못한 상인들은 밑천을 다 날리고 빈털터리가 되었다.

이에 따라 시장은 자연스럽게 식량과 생필품만 전문 공급하는 무역상인들과, 이들이 가져온 식량과 생필품을 시장에 되파는 되거래(중개)상인으로 나누어졌다. 시장에 안정적인 공급자가 출현한 것이다. 이 시기에 개인 수공업자들도 많이 생겨났다.

손 재간이 좋은 일부 주민들은 집에서 맛있고 모양좋은 빵을 대량으로 만들어 시장에 유통시켰다. 또 설탕으로 사탕을 만드는 기술도 발전하여 집에서 사탕을 만드는 사람들은 나중에 소규모 공장 못지 않는 생산량을 자랑하며 시장에 사탕 공급자 역할을 했다. 특히 옷을 만들거나, 사탕을 만드는 가내수공업자들이 많은 돈을 벌었다.

현재 북한 종합시장에서 유통되는 사탕의 50%, 각종 기성복, 작업복의 30%는 가내수공업을 통해 이들이 생산하는 물품이다. 상인들과 수공업자들은 불과 몇 년만에 급격히 부를 축적하게 되었고 새로운 계층, 즉 중간계층으로 태어나게 되었다. 사회주의 계획경제와 식량배급 붕괴가 중간계층 출현의 산파역할을 한 것이다.

중국 화교들과 북-중 무역업자를 통해 들어오는 식량과 생필품은 도표와 같은 유통단계를 거쳐 시장에서 팔린다.

결국 지금의 북한시장은 화교들과 무역업자들, 중간상인들만 돈을 벌게 되어 있고 최종 소비자인 대다수 하층주민들은 값싼 노동력으로 하루하루 생존을 이어가는 구조다.

오로지 장사, 돈 있으면 그만

지금 북한에서는 월 1백~5백 달러(북한 돈 30~150만원) 정도를 소비하면 부자 소리를 듣는다. 이 액수는 일반 주민들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큰 돈이다.

현재 북한에 가장 영세한 하층 주민들이 시장에서 국수장사를 하면 하루 1천5백~2천원 정도 번다. 한달 평균 5만~6만원 버는 것이다. 실제 4인 가족을 기준한 도시주민들의 월 평균 생활비는 5만~10만원 정도가 든다.

정상적으로 출근하는 노동자의 평균월급이 2, 3천원인 북한에서 월 10만원 이상의 소비는 엄청난 것이다. 다시 말해 지금은 국수장사나 해서는 살기 어렵다는 이야기다.

월 10만원 이상 소비하는 사람들은 나름대로 쌀밥을 먹고 영양가 있는 채소를 먹을 수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오늘날 북한의 중간계층이다.

이들 중간계층의 특징은 직업이 다양하고 출신성분, 과거 경력에 구애받지 않는 ‘순수 능력파’다. 이들은 시장의 흐름을 정확히 볼 줄 알고 무엇을 하면 돈을 벌 수 있는지를 질 안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오로지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찾는 것이며, 또 돈이 있어야 쌀밥을 먹고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다는 사실을 터득했다.

이같은 중간계층은 권력층과 밀접히 연계되어 있다. 북한에서 돈 버는 능력만 탁월하다고 우쭐되면 큰 코 다친다. 북한사회의 특성상 더 많은 돈을 벌고 뒤탈 없이 살려면 권력층의 비호가 절실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돈으로 말단 보안원(경찰)과 보위원, 지방행정기관 관리들을 매수하여 더 많은 돈을 벌고 있다. 좋은 자리에서 장사할 수 있다면 뇌물로 들어간 돈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가령, 어느 지역에 새롭게 종합시장이 생기면 유착관계를 이용하여 제일 목좋은 자리를 선점하여 매대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현재 청진 수남 종합시장에서 가장 좋은 매대는 90~150만원(3백~5백 달러)에 거래된다.

체제변혁 경우 기업가, 거상으로 변신 가능

2002년 7.1 경제관리 개선조치는 이들에게 날개를 달아주었다. 종합시장이 합법화되어 당국의 통제가 느슨해졌고 장사가 더 활성화 된 것이다.

이들 중간계층의 의식은 설사 내일 전쟁이 나서 북한이 뒤집어져도 돈이면 다 해결할 수 있다는 황금만능주의가 꽉 차있다. 이들은 돈을 벌기 위해 권력층과 결탁하지만 김정일 정권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별 상관이 없다고 본다.

이들은 김정일 정권이 몰락할까봐 부심하는 핵심계층과 권력 상층부와 확연한 차이가 있다. 이들은 특별히 출신성분이 좋은 것도 아니고, 오직 타고난 상술과 손재간으로 재물을 모았기 때문에 체제가 변해도 아무 문제가 없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다.

이들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일정량의 식량과 생필품을 따로 보관해두는 여유도 갖고 있다. 물론 화폐도 북한 돈이 아니라 달러나 외화를 다량 보유하고 있다. 이는 북한정권이 몰락할 때를 대비한 비상식량이며, 또 언제든지 장사에 뛰어들기 위한 종자돈이다.

이들 중간계층은 화교와 더불어 북한의 시장을 좌지우지하는 양대 세력이다. 동시에 이들이 있기 때문에 영세 음식장사와 보따리 장사, 배낭 장사로 연명하는 하층주민들이 하루하루를 연명해갈 수 있다. 일종의 공생 관계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또 김정일 정권에서 장사로 부를 축적한 이들 중간계층은 북한체제가 무너질 경우 재빠르게 사업가나 거상으로 변모할 능력을 가진 계층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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