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틀린 건국인식…”단독정부, 최선의 길이었다”






▲이인호,김영호,강규형 저 ·기파랑
올해 들어 유난히 6.25 전쟁 관련 행사나 학술대회들이 많다. 6.25 전쟁 발발 60주년을 맞은 해이기 때문이다.


국민 10명 중 3명이 6.25 발발연도도 모를 만큼 6.25 전쟁은 잊혀져 왔다. 상당 기간 동안 북침설 등 객관성이 결여된 주장이 한국사회 저변에 깔려있기도 했다.


6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한반도 현대사의 앞날을 바꾼 역사적인 사건에 대한 객관적 논의가 가능해졌다. 많은 행사와 관련 세미나들은 6.25 전쟁에 대한 현 세대의 이해와 평가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2년 전 8월 15일, 광복 63주년이자 건국 60주년이 되던 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동안 대한민국 건국이 상대적으로 폄하되어 온 것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각계각층에서 열린 건국 60주년 기념 행사나 학술대회 등은 건국과 한국 현대사를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데 큰 의미가 됐다. 이 책 『대한민국 건국의 재인식』은 2007년, 2008년에 열린 ‘대한민국 건국 60주년 기념 학술대회’에서 보고된 학자들의 여러 논문을 망라해 정리한 것이다.


한국에선 대한민국 초기사를 부정 일변도로 보려는 시각이 팽배했다. 이는 일부 국사학자들의 이념적 편향이나 민족주의적 정서로 인한 것, 한국의 암울했던 정치현실에 대한 반대급부로 생겨난 사회주의·공산주의 숭배 정서에 기인한 것도 있었다.


해방전후사의 경우 사료의 접근이 어려워 그 시기에 대한 학구적 조명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 탓도 있다. 따라서 이 책은 대한민국 건국의 역사적 의미를 학문적으로 새롭게 조명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책에 실린 26편의 논문은 건국 초기사의 슬프지만 인정해야 할 사실, 왜곡돼 바로 잡아야할 사실들을 담았다. 한반도의 광복이 우리의 힘에 의해 이뤄지지 않았듯, 건국 또한 우리의 독립적 권한에 의해 이뤄지지 않았다는 평가는 냉정하다.


최근 공개된 소련 외교 문서를 통한 남한의 단독정부(이하 단정) 수립 책임론의 문제, 건국이 60년 대한민국 발전사에 갖는 함의 등을 밝힌 부분은 객관적이고 실증적이다.


한국사회에 공공연하게 사실화된 단정 책임론(이승만의 남한 단독 정부 수립에 따른 분단책임론)은 학자들의 여러 논문을 통해 잘못된 주장임이 드러났다. 이지수 명지대 교수는 1980년대 말 이후 공개된 소련의 비공개 문서를 분석해 “소련은 공개적으로는 한반도에 자주독립 정부가 들어서는 것을 지지했지만, 안으로는 점령지(북한)에서만이라도 소련의 이익을 지킬 인물로 구성한 정부 수립을 목표로 삼고 있었다”고 밝혔다.


김용직 성신여대 교수는 이승만의 단독정부론에 대해 그에게 모든 분단의 책임을 전가하려는 시선을 경계할 것을 주문했다. 그는 “이승만의 단정수립 제안은 당시 상황에서 평화적 합의에 의한 통일이라는 목표가 소련과 공산주의자들에 의하여 거부당하여 사실상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나왔다”는 점에 주목했다.


차상철 충남대 교수 또한 “이승만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론’은 소련에 의해 북한의 공산화가 가속하는 상황에서 남한만이라도 자주독립과 자유민주주의를 확보하는 것이 최선의 길이라는 인식과 판단의 소산이었다”고 설명했다.


대한민국 60년사에 대해 건국의 시점에서 발전의 원인을 규명해보려는 시도는 꽤 유의미한 것이었다. 논문들에 따르면 지난 60년간 대한민국이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건국을 통해 주관적 주체로서 새롭게 태어난 근대적 개념의 국민들과 함께, 대한민국 건국 초창기에 집권한 국가 주역들의 공로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영호 성신여대 교수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했던 대한민국이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원동력이 한국인 개개인의 존재론적 변화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전 왕조 국가들과 본질적으로 다른 근대화된 정치체제나 제도적 기반이 성립되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 한국인이 스스로 사회적 능력을 배양하여 자기 운명을 주도적으로 결정하고, 주권적 주체로서 정치적 결정을 내리는 근대적 개념의 국민으로 새롭게 태어났다”고 설명했다.
 
유영익 연세대 국제대학원 석좌교수는 “오늘날 대한민국이 향유하는 경제적 번영과 정치적 자유는 대한민국 건국 초창기에 집권한 ‘국정주역들’이……전체 국민의 사회적 능력(social capability)을 극대화함에 필요한 일련의 제도개혁을 단행함으로써 국가발전의 원동력이 되는 새로운 국민을 창출하였기 때문”이라고 했다.


유 교수는 국정주역들이 추진한 제도개혁을 “한국 역사상 미증유의 ‘혁명적’ 개혁들”이라며, 그 제도개혁의 대표적인 것이 바로 농지개혁, 교육개혁, 강군육성, 여성해방, 기독교보급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들 제도개혁은 이승만 대통령 실각 이후 반 이승만 정서와 1980년대에 미국에서 유입된 수정주의 사관으로 인해 오랫동안 간과되어 왔거나 왜곡 해석된 대목들”이지만 “이러한 개혁들이야말로 한민족이 유사 이래 처음으로 누리는 경제적 풍요와 정치적 자유를 가능하게 만든 최대의 요인”이라고 밝혔다.


2008년 당시 논란을 불러 일으켰던 임정계승론(대한민국 건국 기점은 임시정부 수립이며, 2008년은 건국 60주년이 아닌 건국 89주년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선 따끔한 비판이 이어졌다. 양동안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대한민국 건국은 통치이념면에서 임시정부를 거의 완전하게 계승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하지만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을 대한민국의 건국 기점으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은 임시정부의 성격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양 교수는 ‘국가의 건립을 준비하는 것’과 ‘실제로 건국 하는 것’은 크게 다르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는 “(임시정부는) 단체이름을 국가가 아닌 ‘임시’정부라 했고, 자신들이 만든 헌법을 ‘임시’헌법이라 했으며, 나아가서는 1941년 11월에 앞으로 건국이 시현될 때 실행할 계획 또는 희망을 정리해서 ‘대한민국건국강령’으로 선포했던 것”이라며 “임시정부의 구성원들은 스스로 새로운 국가를 창건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대한민국은 해방 후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극단적으로 황폐해진 나라였다. 하지만 처음부터 나라를 다시 건설해야 하는 무서운 시련과 부담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자타가 공인하는 기적적인 발전을 이루게 됐다. 이러한 60년 발전사의 시작이 건국에 있으므로, 현 세대의 몫은 건국을 새롭게 조명하고 반추하는 것이라는 게 이 책 필자들의 공통된 주장이다.


김충남 세종연구소 초청연구위원은 “역사를 창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창조된 역사를 올바로 해석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했다. 이인호 KAIST 석좌교수가 ‘서문’에서 밝혔듯 지금까지 대한민국에서는 건국 공로자들이나 국가발전에 앞장섰던 사람들에 대한 충분한 사실적 연구와 평가 없이 폄하하는 것이 진보, 민족애인 양 착각하는 풍토가 있어왔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대한민국 건국 초기사에 대한 객관적 사실을 냉정하게 마주하는 것은 현 세대의 남겨진 과제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