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만강 넘던 정신으로 포기하지 말라”

▲ 직업훈련을 받고 있는 탈북자들

탈북여성 이명숙(43세) 씨는 2개의 세탁소를 거느린 당당한 사장님이다.

그는 현재 양천구 신정동에서 ‘대우세탁소’를 영업중이다. 북한에서 의상 디자이너였던 경험을 살려 세탁소에서 일한지 한 달만에 ‘겁 없이’ 가게를 냈다. 그러나 성공은 커녕 그 때부터 시련이 시작됐다.

국내에서 경험이 전무했던 그녀는 건물 주인 말만 믿고 월 110만원에 40평 가게를 5년 장기 계약을 했다. 나중에야 주변 시세에 비해 두 세 배가 넘는 돈을 주고 계약을 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 씨는 건물 주인에게 재계약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이 씨는 오히려 건물 주인에게 소송을 당했다. 그 때부터 이 씨는 법원을 제집 드나들 듯이 했다. 3년간의 법정 소송 결과 이 씨가 승소했다. 그 사이에도 악바리 근성을 발휘해 세탁소를 성공시키고 점포를 하나 더 늘리는 성과까지 얻었다.

이 씨는 “(소송기간)법 공부 많이 해서 겁나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 말했다.

세탁업의 성공비결에 대해 이 씨는 “‘함경도 또순이’ 기질을 발휘해야 한다. 1년 동안 돈을 까먹으면서도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고객들에게 신용을 잘 지키고 가격도 싸게 봉사해주고, 어떤 날은 직접 배달도 해주었다. 그 결과 손님들의 집에 속옷이 몇 벌이라는 것까지 알만 큼 단골을 확보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하나원 교육생 100기 시대①]

“하나원 탈북자 적응교육 ‘확’ 바꿔야”

[하나원 교육생 100기 시대②]

“탈북자 수준별 ‘맞춤형 교육’ 실시해야”

[하나원 교육생 100기시대③]

“월 34만원 생계비로 직업교육 버티기 힘들어”

“포기하지 않으면 돈과 사람 따른다”

세탁기술 연마도 결코 소홀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처음에 기술을 가르켜 주는 사람이 없어 고액 월급을 주면서 기사 한 명을 썼지만, 지금은 어깨 너머로 기술을 배워 자신이 직접 세탁과 다림질을 한다고 한다.

그는 “무엇이든 포기하지 말고 열심히 하면 돈도 따르고, 사람도 따른다”고 말했다. 너무나 평범한 말이지만, 땀과 정성이 담겨 있어 남다르게 다가온다.

국내입국 탈북자(새터민)가 1만명이 넘어서면서 이들의 사회적응이 국가적 과제가 됐다. 탈북자 국내 입국은 지난 몇년간 지속적인 증가추세에 있다. 그러나 탈북자의 국내 적응은 우리가 풀지 못하고 있는 숙제가 되고 있다.

노동부에 따르면 지난해 6월까지 취업에 성공한 탈북자는 전체 4% 수준으로, 7천700명의 탈북자들 중 310명만이 안정된 직업을 가지고 있다.

탈북자들 사이에서는 “남한에 적응하자면 짧게 5년, 길게는 10년은 살아야 한다”는 말이 있다. 5년 내에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 대한 수업을 마치고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기란 남한 사람들이 생각하는 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 중에도 성공한 탈북자가 적지 않다. 탈북자들이 말하는 성공은 거액의 연봉이나 재산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대한민국 정부에 세금내면서 떳떳한 직장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성공이다.

성공한 탈북자들은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현실적으로 설정하고 그에 걸맞는 능력을 갖추기 위해 뼈를 깎는 노력을 기울여야만 성공할 수 있다고 입을 모은다.

“두만강을 건너던 정신으로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노력하면 언젠가는 성공할 수 있다”면서 “탈북자라고 특혜나 보호를 받으려는 생각을 버리고 대한민국 국민으로 당당하게 경쟁해야 한다”고 말한다.

“공짜 바라면서 노력 하지 않았다면 오늘은 없었을 것”

국내 유수의 대학원을 졸업하고 한 국책연구기관에 채용된 40대 여성 김미영(가명) 씨는 “정착과정에서 가장 먼저 ‘내가 누구인가’를 아는 것이 중요했다”고 말한다.

하나원을 수료한 뒤 오전에는 학원 다니고 오후 2시부터 10시까지는 대형 마트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녀는 “공짜를 바래고 노력을 하지 않았으면 오늘의 내가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40대 여성의 몸으로 가정생활과 학업을 병행해야 하는 어려움 속에서도 그녀는 대학원 전과정 A학점을 받았다. 김 씨는 “한가지 목표를 세우고 꾸준히 하면 좋은 날이 오더라”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김 씨는 정부 정책에도 한 마디를 잊지 않았다. “요즘 탈북자들의 자활을 유도하기 위해 의료보호와 생계비를 단기 축소시키고 있는데 돈이 없는 사람들은 병이 생겨도 병원에 갈 수 없다. 중국과 북한을 넘나들면서 심신적 골병이 든 사람들의 지원을 중단하면 장기적인 취업생활을 유지할 수 없다”며 적응 단계에서 의료지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 NK예총 김영남 단장

NK예총(탈북예술인총연합회) 회장 김영남 씨. 그는 남한에서 ‘오리지널’ 북한 예술로 승부를 걸어보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써커스 공연과 다를 바 없는 북한 예술 공연의 품격을 높이겠다는 것.

그는 북한에서 ‘월남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예술가로서 누릴 수 있었던 최고의 기회를 접어야 했다. 그는 2002년 가족과 함께 탈북했다. 그는 남한에 입국해 3년여의 준비기간을 거쳐 100여명의 탈북예술인이 결집한 NK예총을 조직했다.

김 회장은 “북한에서 수준 높은 예술공연을 펼쳤던 탈북 예술인들에게 무대에 설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 NK예총을 결성했다”고 밝혔다.

북한 전문 예술단 조직처럼 기악, 성악, 화술, 무용 분과로 된 NK예총은 문화광광부의 허가를 받아 사단법인 등록을 준비중이다. 정통 북한 예술공연 뿐만 아니라 ‘남북 문화예술 벽 허물기’ 행사도 계획 중이다.

“감정 쉽게 노출하지 말고 신중하게 행동해야”

국내 유수의 외국계기업에서 5년 차 회사생활을 하고 있는 김종태 (가명) 씨. 그도 적응 초기에는 탈북자라는 이유로 빈번히 서류전형에서 퇴짜를 맞았다. 탈북자에 대한 인식이 동남아 외국인 노동자 보다 못하던 시기였다.

그는 지금 회사에 면점을 보면서 “수습 기간 동안 한 번 써보십시오. 그래도 제가 맘에 들지 않으면 제 스스로 직장을 나가겠습니다” 라고 말했다. 어렵게 회사에 발을 들여놓는데 성공한 그는 ‘버티지 않으면 죽는다’는 생각으로 이를 악물었다고 한다.

전쟁 같은 수습기간을 보내고 그는 어엿한 정규직원이 됐다. 그의 연봉은 현재 3,000만원 수준. 현재 중국, 일본 등에 파견 근무를 나가면서 세계적인 안목도 키우고 있다.

회사생활 4년 만에 국가에서 준 영구임대아파트를 내놓고 자기 명의의 집을 마련하는데 성공했다.

그는 “이젠 내가 탈북자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 이제부터 평범한 대한민국 국민이 되었다고 스스로 자부하며 살아간다”고 말했다.

그는 후배들에게 이렇게 충고한다.

“이곳 사람들에게 부드럽게 다가가기 위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먼저 말투를 친근하게 가다듬고, 항상 밝은 인상으로 사람들을 친절하게 대해야 합니다. 그리고 쉽게 감정을 노출하지 않고 신중하게 처신해야 해요. 우리 탈북자들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지만 남한에서 생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덕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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