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진호 납치사건 전말

18년만에 노모를 상봉한 납북 어부 정일남(49)씨를 비롯 선원 12명을 태운 ’동진 27호’는 1987년 1월15일 백령도 근해에서 조업 중 납북됐다.

북한 노동당 기관지인 노동신문은 사건발생 하루만인 1월16일 선박 이름을 밝히지 않은 채 ’조선인민군 해군 경비정이 우리측 영해를 불법 침입한 남조선 선박 1척을 단속’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다.

당시 노동신문이 인용했던 15일자 조선중앙통신은 “조선인민군 해군 경비정이 1월15일 오전 11시43분경 우리나라 서해 장산곶 서북쪽을 불법침입한 남조선 선박 1척을 단속했다”고 나포경위를 설명했다.

북한 적십자회는 동진호가 납북된 지 6일만인 1월21일 선원들을 송환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으나 김만철씨 일가족이 탈북하는 바람에 동진호 선원들의 송환은 무산됐다.

동진호 선원 송환 문제는 1992년 9월 남북고위급 회담을 비롯 남북협상 테이블 단골 메뉴로 떠올랐으나 남측의 송환요구에 대해 북측이 ’의거입북자’라고 맞서 뚜렷한 진전을 보지 못했다.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대변인은 1998년 성명을 통해 “우리 공화국 북반부에는 남조선 괴뢰군 포로와 납치된 민간인들이라는 것이 단 한 명도 없다”며 “동진호는 정탐행위를 위해 침투했던 간첩선”이라고 발표했다.

대변인은 아울러 “선원들은 남조선 귀환을 거부하고 있다”며 어부들과 인터뷰 내용을 내보냈다.

동진호 문제는 ‘이동복씨 정부훈령 묵살사건(청와대 훈령 묵살사건)’으로까지 번졌다.

임동원 당시 통일원 차관, 이동복 당시 안기부 제1특보 등이 참석한 가운데 지난 92년 9월 평양에서 개최된 제8차 남북 고위급회담 때 이산가족 면회소 설치는 거의 합의단계에 이르렀다.

그러나 합의 일보 직전에 무산되고 말았다. 이산가족 면회소 설치 합의의 최대 걸림돌이었던 동진호 선원 송환요구를 철회하도록 하는 노태우 대통령 훈령을 청와대측이 9월16일 평양으로 긴급히 보냈으나 이 훈령을 받은 고위급회담 대표 겸 대변인 이동복 특보가 남측 수석대표인 정원식 총리에게 보고하지 않은 채 동진호 선원 송환을 계속 주장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이산가족 면회소 설치문제가 합의에 이르지 못하게 만든 사건이다.

이 사건이 없었더라면 이미 수 년 전부터 판문점 이산가족 면회소에서 상봉, 교류가 실제 이뤄졌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당시 고위 당국자로부터 나오기도 했다.

동진호 선원 가족들의 애끓는 호소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어로장 최종석(60)씨의 딸 우영(35.납북자가족협의회장)씨는 일간지에 김정일 국방위원장 앞으로 보내는 공개 서한을 통해 아버지 최씨의 송환을 촉구했고 노란손수건 400장을 임진각 입구 소나무에 달았다.

앞서 동진호 선원 임국재(54)씨는 2003년과 2004년 탈북을 시도했으나 실패한 뒤 남측의 탈북지원단체인 납북자가족모임에 도움을 요청해 오기도 했다./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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