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독 탈출자 사태를 통일에너지로 전환한 콜 총리

동서독 정부가 수립된 1949년부터 통일 직전인 1990년 6월까지 동독에서 서독으로 넘어온 이주민은 총 520여만 명으로 세계 인구 순위 113위인 핀란드(525만 명)와 비슷하다. 이러한 동독주민의 대규모 서독 이주는 서독이 ‘라인강의 기적’을 이루는 데 큰 도움이 되었지만 때로는 서독 사회에 부담이 되기도 했다.


특히 1989년 5월 동독주민의 대량탈출이 시작된 후 1989년에만 34만 3800명이 탈출한 데 이어 1990년 1월부터 6월까지 23만 8000명이 추가로 탈출함으로써 불과 1년 동안에 62만 1000명이 서독으로 넘어와 서독사회는 이들의 정착지원에 큰 부담을 지게 되었다.


서독 야당인 사민당(SPD)은 동독과의 화해·협력 관계의 손상과 이들의 정착지원에 따른 부담을 이유로 동독 탈출자의 입국을 제한할 것을 요구했으나, 기민당(CDU)과 콜 총리는 이를 단호히 거부하고 동독 탈출자 전원을 수용함으로써 독일통일의 길을 열어 놓았다.


동독 이주자 수용근거와 수용정책의 변천과정


서독정부는 기본법 제정 시 제11조에 거주이전의 자유를 명시했고 제116조에는 1939년 12월 31일 현재 독일영토에 거주하던 독일인은 서독 국적자로 인정함으로써 이들의 수용을 위한 국내 절차법의 제정이 필요하게 되었다. 따라서 서독정부는 1950년 8월 22일 ‘독일인의 서독지역에의 긴급수용에 관한 법'(약칭: 긴급수용법)을 제정했다.


이 법의 입법취지는 ①양 독 간의 정치적인 문제를 고려, 동독지역으로부터의 지나친 이주민 유입을 적절히 통제하고, ②이주민의 각 주별 배분과 신속한 정착지원을 위한 절차를 규정하고, ③서독의 고용사정과 주택사정을 고려, 이주민의 유입을 적절히 줄여나가려는데 목적을 두었다.


따라서 동독 이주민이 서독에 체류허가를 받기 위해서는 ①직계가족 상봉을 위한 이주, ②서독 내 직장 및 주택 취득의 보장, ③정치적 이유로 인한 긴급피난이라는 등의 입증자료를 제시토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체류허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을 강제 추방하지 않았기 때문에 체류허가증 발급은 의미가 없게 되고 ‘선별절차’는 단순히 ‘기록절차’의 의미만을 갖게 되었다. 더욱이 동독정부가 1961년 8월 13일 베를린 장벽을 설치하고 국경선을 봉쇄한 후 동독주민의 서독이주를 제한한다는 것은 도덕적으로도 용납되기 어려웠다. 따라서 그 이후에는 모든 동독으로부터의 이주민이 기본법이 정한 국민으로서의 권리를 제한 없이 향유할 수 있게 되었다.


동독 이주민에게 제공된 지원


동독 이주민이 서독으로 넘어오면 일단 베를린과 기센(Gießen)에 소재한 수용소에 수용되어 수용증명서를 받고, 2~3일 이내에 각 주정부 대표와의 협의를 거친 후 각 주로 배분된 후, 각 주의 임시수용소에서 대기하다가 가옥이 마련되면 정착하게 된다. 이주민 가운데 특별한 연고가 있는 경우 연고지 소속 주로 배분되지만 특별한 연고지가 없는 경우 본인의 희망과 각 주의 사정을 감안하여 정착대상 주가 결정된다. 그러나 총체적으로는 각주의 인구비례에 따라 이주민을 배분하게 된다.


동독 이주민에게 제공되는 지원은 긴급수용소 체재 시 제공되는 지원과 정착할 주에 도착한 이후 제공되는 지원으로 대별할 수 있다. 긴급수용소 체재 시에는 연방정부에서 제공하는 보조금 1인당 200 마르크(1990년 환율로 약 12만 원), 주정부의 보조금(가장 30 마르크, 가족 15 마르크), 용돈(가장 15 마르크, 가족 10 마르크), 숙식비, 건강진단, 종교단체가 제공하는 의류, 각 주 임시수용소까지의 교통권 및 이삿짐 운송 등의 지원이 제공된다.


정착할 주에 도착한 후에는 주택을 알선해 주거나 주택입주 우선권이 주어지며, 최고 1만 마르크까지의 가구 및 생활용품 구입을 위한 저리 융자금이 지급된다. 그 외에도 학자금 지원, 의료·연금·실업·산재 보험과 실업수당 및 생계비 보조금 등 각종 지원이 제공된다. 그러나 이렇게 제공되는 지원금은 최소 생계유지에 필요한 정도에 국한되므로 이주민들은 직장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 노력해야 한다.


1989년 동독 혁명시 동독 탈출자 문제 처리


1989년 5월 헝가리 정부의 국경개방 이후 동독주민들의 대량탈출이 시작되어 하루 2천여 명이 탈출하자 동독 정부가 여행협정 규정을 들어 헝가리에 탈출자 송환을 요구하고 헝가리가 동독주민들을 구금하기 시작했다. 이에 서독정부는 헝가리와의 비밀교섭을 통해 헝가리가 동독과의 여행협정을 파기하여 동독주민들의 탈출을 묵인토록 했다. 이에 따라 동독정부가 주민들의 헝가리 여행을 금지, 동독주민들이 폴란드 및 체코 주재 서독대사관으로 몰려들자 서독정부는 소련 및 동독과의 협상을 통해 동독주민 7천여 명의 서독행을 허가토록 했다.


이어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 붕괴 후 동독인들의 이주 물결이 폭증하자 동독과의 화해·협력 체제의 손상을 우려한 사민당과 동독 이주자 정착지원으로 어려움을 겪게 된 각 주 정부가 동독 이주민의 수용제한을 주장했다. 그러나 콜 정부가 이를 단호히 거부, 동독 탈출자 사태를 통일에너지로 전환하여 통일을 이루게 된다.


서독 정부의 동독 이주민 정책이 미친 영향


분단 이후 서독정부가 동독 공산정권과의 화해·협력 체제의 손상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동독 이주민을 제한 없이 수용하고 정착을 지원한 것이 동독주민의 인권개선과 통일여건 조성에 크게 기여했다.


첫째, 이주민의 적극적 수용과 지원은 공산치하에서 고통 받는 동독주민을 한 사람이라도 더 구출하고 동독주민들이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게 했다는 점에서 인권개선에 크게 기여했다.


둘째, 동독 이주민의 제한 없는 수용은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정당성과 우월성을 보여주어 동독 공산정권의 정통성을 잠식하는 요인이 되었다.


셋째, 동독 이주민들이 서독사회에 고급인력을 공급함으로써 서독이 ‘라인강의 기적’을 이루는데 크게 기여했다.


넷째, 동독 고급 인력의 대량유출은 동독경제를 약화시키고 서독에 대한 동경심을 일으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다섯째, 베를린 장벽 붕괴 전후 기간에 폭증한 동독 이주자들을 전원 수용함으로써 동독주민들의 ‘발로 이룬 혁명’이 성공하고, 동독주민들의 불만을 통일 에너지로 전환할 수 있는 동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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