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시절 서독체제에 대한 가장 구체적인 위협은 서독 내 좌익테러단체인 적군파(Rote Armee Fraktion, 약어 ‘RAF’)의 존재였다. 적군파는 1970년 5월 14일, 베를린 테겔 감옥에 수감돼 있던 안드레아스 바아더(Andreas Baader)를 무력으로 구출해내면서 국가 권위에 대항하는 본격적인 테러 조직으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바아더는 1968년 프랑크푸르트 시내 백화점 두 곳을 테러 방화한 혐의로 체포, 수감중이었다.
탈옥 작전은 저널리스트 울리케 마인호프와 변호사 호르스트 말러에 의해 주도됐고, 작전중 1명이 사망하는 등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켰다. 함부르크에서 발행되는 잡지 ‘콘크레이트(Konkret)’지 기자였던 마인호프는 당시 백화점 테러 방화 사건을 긍정적으로 보도했으며, 말러는 수감중이던 바아더의 변호인을 자처했다.
초기 적군파의 핵심 멤버였던 이들은 탈옥 후 함께 요르단으로 도주, 팔레스타인 테러조직을 통해 무력투쟁에 대한 군사훈련을 받았다. 이들의 투쟁방식은 라틴 아메리카의 도시 게릴라 전법을 모델로 삼았으며, 서독의 사회질서를 교란시키고 제국주의와 독점자본에 대한 무력투쟁을 전개하려 했다. 이를 통해 적군파는 대중을 혁명세력으로 규합하려 했으며, 혁명 완수를 위해 제 3세계 해방운동 세력들과 연계해 활동하기도 했다.
그러나 70년대 말 바아더와 마인호프 등 핵심 요원들은 루프트한자(Lufthansa) 여객기 납치에 실패한 후 체포돼 무기징역을 선고받자, 슈트트가르트 슈탐하임 감옥에서 자결한다. 이에 따라 남은 요원들이 그 뒤를 이어 동독으로 잠입해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동독 비밀경찰 슈타지의 지원을 받아 1992년 4월 조직이 해체될 때까지 끔찍한 테러를 자행했다. 1970년대에는 지그프리트 부박 당시 서독 검찰총장과 페터 로렌츠 당시 베를린 시 기민련 의장, 한스 마틴 슐라이어 독일사용자협회 회장을 납치·살해했고, 1980년대에는 칼 하인즈 벡쿠르츠 지멘스 사 이사와 조르주 베세 르노 자동차 회사 사장, 알프레드 헤어하우젠 도이치뱅크 중역(당시 다이믈러 벤츠사 감사위원장)을 암살했다.
또한 나토 사령부와 미군기지도 이들의 테러 목표가 됐고, 은행도 수차례 습격을 받았다. 1990년대에 들어서는 통일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동독 경제 재건에 헌신했던 데트레프 가르스텐 로베더 독일 신탁관리청장을 암살했다.
적군파는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 능력을 갖추고 지식인들의 동정을 구했으며, 한 때 적지 않은 서독 지식인들의 동정을 받기도 했다. 이 사실은 1980년대 중반 이들의 활동을 주제로 한 ‘슈탐하임(Stammheim)’이 베를린 영화제에 출품돼 대상에 해당하는 ‘골든베어’ 상을 수상했다는 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이 영화는 베를린 중심가에 위치한 한 영화관에서 경찰의 삼엄한 경비 하에 상영됐다.
하지만 이 모든 반체제적 활동은 1980년대 후반, 소련이 개혁개방을 선언하고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 앞 다투어 체제전환을 추진하던 시대적 요구와 함께 서서히 약화돼 갔다. 무엇보다도 자유와 풍요로움을 찾아 대규모 탈출을 시도한 동독인들의 의지는 적군파의 존립을 뒤흔드는 사건이었으며, 테러를 통한 체제전복이 얼마나 무의미한지 스스로 깨닫게 했다.
바아더의 변호인이었고 적군파의 핵심요원이었던 말러가 1997년 ‘디 짜이트’ 지에 요르단에서의 무장훈련 경험이 자신을 적군파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계기가 됐음을 밝힌 것도 이에 대한 결과다. 그는 현재 ‘국가를 위하여 Fuer unser Land’라는 시민운동 단체를 발족해 소외받는 이들을 위해 헌신하며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