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독의 대표적인 신문인 ‘노이에스 도이칠란트(Neues Deutschland)’는 당의 기관지로 40년 세월 동안 인민들에게 비아냥의 대상이었다. 사람들은 “지구의 1/6은 무엇입니까?” “소비에트 연방”이나 “정보의 1/3은 무엇이죠?” “가짜 정보” 혹은 “진리의 1/100은 무엇이죠?” “노이에스 도이칠란트”라는 식의 질의응답을 통해 이 신문의 보도가 대부분 진실하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편집 책임자들은 독자에 대한 책임감보다는 당의 보도 지침서인 저널리스트 매뉴얼이 우선이었다. 언론은 민족전선의 동반자로서 레닌의 투쟁지침인 ‘당의 최첨단 무기’로의 역할만이 강요됐다.
1989년 가을 전환기, 어떤 언론도 ‘무엇 때문에 동독인의 탈출이 이어지고 시위대들은 무엇을 요구하는지’에 대해 보도하지 않았다. 언론에 대한 동독 시민들의 불신이 더욱 깊어져 갔고, 노이에스 도이칠란트의 약자인 ND는 ‘Na, Du (응, 또 너냐)’ ‘Na, Denn (응, 그래서)’와 같은 의미로 풍자됐다. 동독인이 체코 프라하와 폴란드 바르샤바 주재 서독대사관으로 탈출하는 것을 서독의 흑색선전에 속은 반역자들이 벌인 사건으로 매도했다. 노이에스 도이칠란트는 “동독은 배반자에게 어떤 동정의 눈물도 보이지 않겠다”는 사설을 게재하는 등 사태의 진실을 외면했다.
이런 왜곡보도에 대해 동독 내무성도 1989년 10월 5일자 보고서를 통해 “이 사설은 오히려 동독인들의 탈출 의지와 저항감을 강화시켰고, 신문은 당과 지도부만을 위한 하수인에 불과하다는 소문을 팽배하게 했다”고 밝혔다. 한 번은 당으로부터 어떠한 보도지침도 내려오지 않았다. “편집진은 당황했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못한 적이 있다”고 노이에스 도이칠란트의 전 편집인 볼프강 스피커만은 회상하고 있다. 당과 언론의 명령체계가 와해되기 시작하자 ‘당의 무기’였던 언론은 공격방향을 차츰 당 지도부로 틀었다. 시위현장에 대한 보도가 나가자 거리에서의 저항도 점점 거세져 갔다.
특히 지방언론들은 사태의 흐름을 앞서 파악했다. 국가평의회 게어라흐 부의장이 ‘권력에 대한 저항’이라고 사태의 진실을 고백하자 즉시 그 의미를 깨닫고 톤을 바꿨다. 칼 마르크스 도시인 헴니츠에서 발행되는 ‘자유 프레스(Freie Presse)’는 “반역 주모자가 울부짖고 있다”라는 문구를 곧바로 “수천 명의 시민들이 운집해있다”로 바꿨다.
동독 건군 40주년 기념일에는 시위대의 3분의 2가 아무 혐의도 없이 체포돼 무자비한 조사를 받았다는 보도가 지방으로부터 전해졌다. 드레스덴에서 발행되던 ‘유니온’ 지는 “여론은 보도된 주장과는 전혀 다르다”는 지난 40년 간의 공공연한 사실을 전하는 용기를 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와중에도 공산당에 대한 향수를 갖고 시민들의 저항에 강경하게 맞설 것을 주문하는 언론도 있었다. ‘노이에 베를린너 일러스트리어테(Neue Berliner Illustrierte)’라는 잡지는 “무정부 상태와 혼란에 굴복하지 말라”는 개혁공산주의자 그레고르 기지의 호소를 싣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언론들은 역사의 순리에 따랐다. TV들은 시민들의 분노를 렌즈에 담았고 신임 당 서기장 크렌츠의 주벽과 당 핵심간부들의 ‘숲속 마을’에서의 호화생활들을 보도했다. 이렇듯 과거의 금기 사항들이 매일 매일 깨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