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임 이후 7개월 만에 서울을 찾은 노무현 전 대통령은 1일 서울 밀레니엄 힐튼호텔에서 열린 ‘104선언 1주년 기념행사’ 자리에서 북한 문제와 관련한 자신의 입장을 50분에 걸쳐 밝혔다.
대통령 재임 시절부터 직설적인 화법을 구사했던 노 전 대통령은 남북관계의 발전을 위해 대북정책의 근본적 전환이 필요하다고 강조하며 임기 중 자신의 국정운영 원칙을 소개했다.
“나는 전략적 유연성에 있어서 분명한 한계를 두었으며, PSI(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 또한 북한과 물리적 충돌 가능성이 있는 조치에 대해서는 끝내 수용하지 않았다. MD(미사일 방어계획) 이야기는 꺼내지도 못하게 했다. ‘작계 5029’도 반대하고 한미군사훈련도 최대한 축소하려고 노력했다. 남북간 충돌 가능성이 있는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노력했다.”
노 전 대통령은 또한 자존심을 굽혀서라도 남북간 신뢰구축을 위해 북한을 자극하지 않았다고 자평했다.
“6자회담에서 북한의 입장을 최대한 지원했다. 각종 국제회의에서 북한을 비난하는 발언이 나오면 최대한 사리를 밝혀서 북한을 변론했고, 개별 정상회담에서도 한 시간 이상을 북한을 변론하는데 시간을 보낸 일도 있다. 북한을 자극하는 발언을 최대한 자제했고, 때로는 자존심이 상해도 참았다. 이 모두가 신뢰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다.”
그는 이에 대해 “물론 북한의 보답은 빠르지 않았지만 결국은 정상회담도 할 수 있었다”며 “한번의 정상회담에서 합의한 내용의 크기를 평가하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유례를 찾기 어려운 기록일 것이다. BDA(방코델타아시아 은행)만 아니었더라면 정상회담은 훨씬 일찍 열렸을 것이고 남북관계는 훨씬 앞으로 나아갔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노 대통령은 이 외에도 북한에 대한 무력행사 가능성을 철저히 차단해야 하며, 한·미·일 동맹 강화를 외치는 것도 북한을 자극하기 때문에 피해야 한다는 논리를 펼쳤다. 역지사지(易地思之)로 북한이 신뢰를 갖도록 먼저 노력해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그는 “흡수통일을 전략으로 삼아서 상대 권력의 붕괴를 추진한다면 그것은 북한을 자극해 평화통일을 깨는 일이 될 수 있다”며 “탈북자 문제와 북한의 인권 문제를 다룰 때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북한이 붕괴되는) 그런 일이 생긴다면 그 결과가 어떤 방향으로 가게 될지 예측하기 어려운 위기 상황이 될 수도 있고, 통제하기 어려운 재앙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며 “그럼에도 북한의 붕괴를 획책하는 발언과 행동을 하는 사람들은 생각이 짧은 사람들”이라고 덧붙였다.
또한 “나는 당선자 시절 북핵 문제가 불거졌을 때 미국의 무력행사 가능성에 대해 분명하게 반대한다는 발언을 했다”며 “물론 무력행사 가능성에 대한 언급은 북한의 굴복을 받기 위한 전술적인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어떤 전술가들은 나의 발언을 서투른 아마추어라고 비난했을 것이지만 남북관계에서 원칙을 바로 세우고, 신뢰를 유지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이 외에도 “자주국가라면 당연히 작전 통제권을 스스로 행사해야 한다”며 “그것만으로도 작전통제권을 환수해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고 말했다.
“유사시에 미국이 작통권을 행사하는 상황은 북한을 더욱 두렵게 하여 남북간 대화와 협상, 신뢰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며 “그래서 나는 작통권의 환수를 남북간의 신뢰구축에 중요한 요소로 생각하고 추진했다”고 말했다.
국가보안법에 대해서는 “이념적 대결주의를 강력하게 뒷받침하는 근거가 되며, 남북대화의 걸림돌”이라며 폐지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는 또한 한미동맹과 관련 “지금은 남북 대화의 국면으로 대북 억지를 위해 한미동맹을 강조하지 않는 것이 좋다”며 “여기에다 일본까지 끌어넣어 ‘이념과 가치를 함께하는’ 한미일 협력관계를 과시하는 것은 남북관계는 물론 중국, 러시아와의 관계까지 불편하게 만들 뿐”이라고 밝혔다.
그럼에도 “굳이 한미동맹과 한미일 이념 공조를 강조하고 북한을 굳이 ‘주적’으로 명시하고, 그것도 모자라 ‘선제공격’의 가능성까지 공공연히 거론하는 사람들이 있다”며 “PSI와 MD에 까지 가담을 하게 되면 이것은 한반도와 동북아를 대결구도로 만들고 우리도 그 한쪽에 가담한다는 뜻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 여당과 정부를 중심으로 북한의 위급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작계 5029’를 구체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것에 대해 “이 역시 북한과 중국을 자극할 만한 것”이라며 “북한, 중국과의 신뢰를 훼손할 수도 있는 부담을 무릅쓰고 강행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냐”고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