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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노동당이 지난달 30일 평양 4.25문화회관에서 개최한 전국지식인대회가 이틀간의 일정을 마치고 1일 폐막됐다.
1992년 12월 열렸던 ‘조선지식인대회’ 이후 북한 지식인들이 한자리에 모이기는 15년 만이다.
노동신문은 28일 ‘지식인들은 강성대국 건설의 위력한 역량이다’는 논설에서 “조선의 지식인들은 위대한 당을 따라 선군혁명의 천만리 길을 걸어온 열렬한 혁명가들이며, 당과 조국의 부름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애국투사들”이라고 강조하였다.
논설은 “우리 지식인들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경애하는 장군님과 운명을 끝까지 같이하는 참다운 선군혁명 동지들”이라면서 북한 지식인들을 ‘정의의 선도자들이며 사회의 선각자’ ‘선군시대의 전위투사들’이라고 추켜 올렸다.
하지만 지식인 대회의 장막 뒤에는 북한 지식인들의 말도 못하는 궁핍한 생활이 숨어있다.
90년대 식량난때 지식인들 많이 굶어죽어
90년대 수백만명의 아사자가 발생한 ‘고난의 행군’ 시기 유독 굶어죽은 지식인들이 많았다. 고지식한 성품 때문에 장사도 못하고 국가배급과 월급이 끊기자 식량난 타격을 누구보다 먼저 받았다.
90년대 말 청진시 라남구역에 살던 야금(冶金)공학 박사 부부가 자택에서 굶어죽었다. 북한 야금업계가 공인하던 노(老)박사는 배급이 끊어지자 자신의 과학자아파트에서 부인과 함께 서서히 굶어죽어 갔지만 누구도 거들떠 보지 않았다. 50년동안 배급제에 길들여진 이들은 곧 배급이 나온다는 당의 말만 믿고 하루 이틀 기다리다 굶어죽어 갔다.
함흥과 평성을 비롯한 과학자들이 많이 모여사는 도시에서 기아로 죽거나 식량난 타격을 받은 지식인 가정들이 많았다. 지금도 중학교 교사들은 물론 대학 교수들도 시장에서 장사를 하지 않으면 생계를 유지할 수 없다.
청진광산금속대학의 어느 교수박사는 생계를 위해 시장에서 국수장사를 했다. 오전에는 대학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오후에는 시장에 나가 장사를 하는 것이 북한 지식인들의 실상이다.
북한 지식인들의 생활이 어려운 이유는 기본적으로 배급에 의존하는 생활인데, 국가공급이 제대로 되지 않기 때문이다. 또 ‘지식인의 혁명화’ 방침 때문에 조직생활에 철저히 매여 있어 일반 주민들처럼 장사도 마음대로 못한다. 2002년 7.1 경제개선조치 이후 대학교수들의 월급은 북한돈 2000~4500원이다. 현재 북한의 쌀 1kg이 1300원이다. 대학교수의 월급이 결국 쌀 2~3kg 가격인 셈이다.
그나마 지방의 대학교수들은 장사를 할 수 있지만 평양의 지식인들은 장사를 하다 적발되면 반성문을 쓰고 사상검토를 받아야 한다. 따라서 대학교수의 부인들이 장사를 하지 않으면 도저히 생계를 유지할 수 없다.
김일성대 교수가 ‘냉동차 운전사’보다 못하나?
90년대 이전에는 대학교수들은 지식인으로서의 명예가 있었다. 그러나 식량난이 발생하자 명예는 휴지조각이 되었다. 실제로 지금 북한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는 직업이 대학교수, 의사 등이다. 배우자를 선택할 때도 대학교수라면 여성들이 맞선도 안 본다.
90년대 들어 실제 이런 일이 있었다. 김일성종합대 교수가 맞선을 보러 갔다가 상대 여성에게서 퇴짜를 맞자, “나보다 조건이 더 좋은 사람이 있다고 했는데, 그 사람 직업이 뭐냐”고 물었다. 상대 여성은 ‘냉동차 운전사’라고 대답했다. 이 일화가 평양에 퍼져 북한주민들은 “최고대학 교수의 권위가 냉동차 운전사보다 못하다”며 탄식했다.
한편 식량난 이후 북한 대학생들도 대학교수를 우습게 여기는 현상이 나타났다. 생활이 어려운 대학교수들은 어쩔 수 없이 시험기간이면 학생들로부터 담배나 돈을 받고 성적을 올려주는 일이 많았는데, 학생들 사이에서 ‘어느 교수는 무슨 담배’ 식으로 교수들에게 ‘가격’이 매겨졌다.
북한의 경제난이 초래한 지식인들의 슬픈 자화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