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의 방패막이 된 손학규의 ‘김정일 구하기’

복지논쟁에서 자기 가치를 헌신짝처럼 내던진 손학규 대표가 이제 ‘김정일 일병’ 살리기에 나섰다. 손 대표는 10년 전 자신이 펴낸 책 ‘진보적 자유주의의 길’에서 “생활능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국가의 복지 정책에 의해 나태해지는 모습에서 나는 영국병의 실체를 똑똑히 볼 수 있었다(43쪽)”고 주장했다. 그러나 1월30일 그는 “국가는 최소한의 생활만을 보장하는 생계보장형 복지를 뛰어넘어서 교육, 보육, 의료, 주거 등 보편적 사회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다”고 말을 뒤집었던 것이다.



이러니 유시민 씨로부터 민주당의 복지는 선거용 구호라는 비판을 받게 되는 것이다. 80년대를 영국에서 보내며 길어 올린 생각을 순식간에 바꾼 것은 레토릭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 외에 어떻게 달리 해석할 길이 없다. 그렇지 않은가? 하지만 이제 대통령이 되는 것 말고 별달리 할 것이 없는 손 대표가 복지 관련하여 자신의 말을 뒤집는 것까지야 해괴하기는 하지만 이해할 수는 있었다. 보편적 복지론 자체는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와 근본적으로 충돌하는 사안이 아닐뿐더러 경제 성장에 따라 우리가 공히 추구해야 할 것이기에 총체적으로 자신을 부정했다고 보긴 어렵다.



그러나 어디 할 일이 없어 카다피보다 100배나 더 한 김정일 구하기란 말인가? 카다피는 말했다. ‘외부에서 개입하면 리비아인 수 천 명을 죽이겠다’고. 잔인한 독재자, 철저한 이기주의자의 선연한 모습이다. 김정일은 어떤가? 수 백 만 명이 비참하게 굶어죽을 때 죽은 수령의 시신에 6억 달러 이상을 쏟아 부으며, 인민은 좀 굶어야 말을 잘 듣는다 하지 않았는가! 수령의 신임을 빼면 고깃덩어리에 불과한 것으로 사람들을 농락하지 않았던가! 카다피도 모골이 송연할 참으로 통큰 이야기들이다.



중동의 민주화를 바라고 독재자의 학살에 분노하는 우리의 마음은 한국 민주화운동의 용광로에서 제련된 것이기에 더욱 구체적이고 절실하다. 우리의 마음에 어떤 이념적 그늘을 지운다면 카다피에 대한 증오와 김정일에 대한 분노는 순결함을 드러낸다. 이 정직하고 정의로운 분노를 두고 ‘낡은 이념의 질곡’이라 손 대표는 말한다. 자유와 인권을 향한 인간의 절규를 “북한 정권의 붕괴나 흡수통일을 위한 선동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 아닌가.



그렇다. 광주에 절망했던 우리의 순결한 분노를 그 당시 위정자들은 그렇게 조롱했다. 우리의 자유와 인권에 대한 열망을 단순하게 체제 전복세력이라 매도했다. (우리의 열망이 매도되며 결국 체제 전복을 지향했던 것은 틀림없으나 체제 전복을 위해 자유와 인권을 거론한 것은 아니었다. 80년대는 그런 면에서 빛과 그림자이다) 그는 타락했다. 80년대 전두환 신군부를 방어하던 논리로 자유와 민주주의를 향한 인간의 진심을 매도하고 있는 그는 더 이상 우리의 벗이 아니다.



핵실험, 천안함과 연평도의 죽임으로 햇볕은 끝났다. 햇볕을 파산시킨 자는 DJ도 노무현도, MB도 아니다. 우리 국민도, 북한 인민도 아니다. 우리의 소망을 핵으로, 포로, 그리고 미사일로 짓이긴 자는 무바라크와 카다피의 친구이며 한반도 7천만의 적인 김정일과 그의 세습자 김정은이다. 우리의 목적은 북의 붕괴가 아니다. 유럽 좌파와 우파의 목적도 그러하고 유엔 총회장에서 대북인권결의안을 가결시킨 전 세계 인간주의자들의 목적도 그러하다. 다만 김정일과 김정은이 우리의 목적을 지속적으로 가로막겠다면, 북한 인민을 자신의 사유물로 다루겠다면, 우리 한국민을 인질로 여기겠다면 그 정권의 붕괴는 불가피하다.



손 대표가 걱정해야 할 것은 김정일-김정은의 안위가 아니라 북한 인민의 생명과 자유이며 그들에 대해 인간들이 갖는 고결하고 정의로운 연대의식이어야 한다.



카다피에 대한 유엔의 결정에 딴지를 거는 것은 분명 카다피 체제의 안정을 바라는 것이다. 북한에 자유와 인권을 요구하는 것에 아까운 전파를 낭비하며 비난하는 것은 본인이 뭐라 하든 김정일-김정은을 변호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손학규가 가고 있다. 독재에 저항하던 청년 손학규는 지구상 최악의 독재자의 방패막이가 되어 우리를 떨치고 가고 있다. 가지 마라. 돌아 보라. 그곳은 죽음보다 더한 치욕의 길이다.


※외부 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소셜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