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통일의 밑거름 된 동서독 인적 교류

인적교류는 서독의 내독교류 목표인 ‘분단에 따른 인간적 고통의 완화’ 및 ‘민족의 동질성 유지’와 직접 관련된 분야이므로 서독 측으로서는 내독교류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동독은 서독과의 인적교류가 노동력 유출과 외부정보 유입의 통로가 되어 왔기 때문에 상호교류를 가급적 제한하려는 입장이었다. 따라서 인적교류는 동서독 관계의 변화에 민감한 영향을 받아 왔다.


그러나 분단 이후부터 지속적으로 이어져 온 동서독 주민 간의 인적교류는 분단 시 민족의 혈맥을 잇고 이산가족의 고통을 완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 왔으며, 특히 1989년 동독 평화혁명 시에는 동독주민의 폭발적인 서독이주가 동독 공산정권을 붕괴시키고 독일통일을 이루는 데 핵심적 동력이 되었다.


동서독 주민의 이주


동서독 주민 간의 인적교류는 이주와 방문·여행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1949년 분단 이후 1950년부터 1989년까지 서독으로 이주한 동독인은 연평균 11,780명, 총 4,868,699명이었던 반면, 동독으로 이주한 서독주민은 471,381명에 불과하여 동독 측은 총 4,397,318명의 인력손실을 입은 셈이다. 서독 측은 동독인의 서독이주로 ‘라인강의 기적’을 이루는 데 필요한 노동수요를 보충할 수 있었고 이주민들의 진취성과 역동성을 활용함으로써 큰 이득을 보았던 반면, 동독 측은 숙련기술자 등 인간자본의 상실로 막대한 손해를 감수해야 했다.


분단 이후 동서독 주민의 거주이전 현황





























연도


동독서독


서독동독


이전 편차


비고


1950~1961


3,854,552


400,315


3,454,237


장벽설치 이전


1962~1969


221,538


37,209


184,329


 


1950~1989


4,868,699


471,381


4,397,318


총 거주이전 현황


동독인들의 서독이주 동기는 정치적 이유 56%, 경제적 이유 23%, 가정 및 개인적 이유 15% 등이며 남녀 간의 비율은 서로 비슷했다. 이주형식은 가족결합, 불법 탈출, 정치범 석방거래에 따른 이주 등으로 다양하다. 동독으로 이주한 서독주민은 대부분 연금 생활자로 동독에 자녀나 형제 등 친척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으며, 동독에서 서독연금을 수령하여 안락한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다.


동독인의 서독이주 방법은 동독의 허가를 받은 합법적 이주와 비합법적 탈출 등 두 가지가 있었으나 분단 시부터 1961년 베를린장벽 설치 시까지는 자유로운 탈출이 가능했기 때문에 동독정부의 승인을 받은 합법적 이주가 전혀 없었다. 그러나 베를린장벽 설치 다음 해인 1962년부터 동독정부가 국경경비를 엄중히 하는 한편, 특별한 경우 합법적 이주를 허가했기 때문에 합법적 이주자가 전체 이주자의 60% 내지 70%에 달했으나 이주민의 수는 베를린장벽 설치 이전에 비해 10분의 1 수준에도 못 미치는 5,000명 내지 1만 명 수준으로 감소했다.


동독인의 서독이주 현황을 시기별로 살펴보면 동서독 관계가 동독인의 서독이주에 큰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동독인의 서독이주는 1949년 분단 이후 매년 20만 명 수준을 유지하다가 1961년 베를린장벽 구축 이후 2만 명 수준으로 대폭 감소되었다. 1983년 이주자는 11,000명 수준에 불과했으나 1983년 및 1984년 서독이 동독에 대해 총 19억 5천만 마르크의 차관을 제공한 이후 4만 명 수준으로 급증했으며, 1987년 2만 명에 미달하던 이주자가 1987년 호네커 방문 이후에는 4만 명 수준으로 2배 이상 증가했다. 이는 동독과의 협력을 통해 동서독 주민 간의 교류의 통로를 넓히겠다는 콜 총리의 노력이 결실을 맺은 것으로 평가된다.


시기별 동독인의 서독이주 현황














































































연도


비합법 이주민


합법 이주민


이주민 총계


탈출·피난민


%


허가받은 이주


%


1949


129,245


100




129,245


1960


199,188


100




199,188


1962


16,741


78.4


4,624


21.6


21,365


1970


5,047


28.8


12,472


71.2


17,519


1983


3,614


31.9


7,729


68.1


11,343


1985


6,160


24.7


18,752


75.3


24,912


1988


11,893


29.9


27,739


70.1


39,832


1989


241,907


70.4


101,947


29.6


343,854


90.1~6






238,384


서독정부는 동독 이주민의 정착지원을 위해 연방정부 정착지원금, 주정부 보조금, 용돈, 생필품·가구 구입용 저리 융자 등을 제공했으나 주택제공, 직업교육 및 직업알선 등에 치중했고 일자리를 갖지 못한 사람에 대해서는 실업수당이 제공되었을 뿐 금전적 지원은 매우 적었던 편이다. 동독 이주자에 대한 지원내역은 별도 항목에서 보다 상세히 다루기로 한다.


상호 방문 및 여행


상호 방문 및 여행은 ① 민족 동질성을 유지하고, ② 분단에 따른 인간적 고통을 완화하며, ③ 외부 정보의 유입통로가 된다는 점에서 내독관계에서 항상 중요한 이슈가 되어 왔다.


동독인의 서독방문은 1961년 8월 베를린장벽 구축 전에는 연간 80만 명 수준이었으나 장벽구축 다음 해인 1962년에는 2만 7천 명으로 급감했다가 1965년 이후 1971년 까지는 108만 명 수준을 유지했다. 1972년 동서독 관계가 정상화된 후에는 소폭으로 증가하기 시작하여 1975년 137만 명, 1988년 675만 명 등으로 꾸준히 증가되어 왔다.


동독인의 서독 방문
                                                                                                            (단위 : 천 명)



















































연도



여행자


방문 사유


연도



여행자


방문 사유


연금생활


긴급 가사


연금 생활


긴급 가사


1955


2,270


2,270



1972


1,079


1,068


11


1960


807


807



1983


1,527


1,463


64


1962


27


27



1987


5,090


3,800


1,290


1967


1,072


1,072



1988


6,750




 


서독인의 동독방문도 1967년 142만 명, 1970년 265만 명, 1972년 626만 명, 1973년 750만 명, 1981년 502만 명, 1983년 506만 명, 1987년 662만 명, 1988년 667만 명 등으로 계속 확대되어 왔다. 그러나 1986년까지는 서독인의 동독방문이 연 600만 명 내지 700만 명이었던데 비해 동독인의 서독방문은 150만 명 수준이어서 현저한 차이가 있었으나 1987년 호네커 동독서기장의 서독방문 이후에는 여행규제를 대폭 완화하여 서독과 비슷한 수준인 연 500만 명 내지 600만 명의 동독인이 서독을 방문하게 되었다. 이렇게 동독인의 서독여행이 많아진 것은 1987년 호네커를 서독에 초청, 외국 국가원수에 준하는 예우를 하고 주민 왕래의 확대를 요청한 것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해석된다.


                                                  서독인의 동독방문
                                                                                                              (단위: 천 명)































































연도



여행자


방문 사유


연도



여행자


방문 사유



베를린


1


방문


하루


이상



베를린


1


방문


하루


이상


1967


1,424





1981


5,020


1,800


1,120


2,100


1970


2,654



1,400


1,254


1983


5,059


1,720


1,120


2,219


1972


6,260


3,320


1,400


1,540


1987


6,620


1,800


1,110


3,700


1973


7,499


3,820


1,400


2,279


1988


6,671


1,972


1,120


3,579


서독인의 동독 방문 시 동독 당국은 각종 의무를 부과했다. 방문자는 반드시 여권과 방문허가서를 함께 지참토록 했는데 동독이 발행한 방문허가서와 서독여권을 반드시 지참토록 한 것은 동·서독이 서로 ‘외국’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려는 노력이었다. 또 동독은 1964년 11월 동독 방문 시 의무적으로 동독화폐를 환전토록 했으며 1968년 6월에는 베를린 왕복교통(편도 170㎞) 이용자에 대해 비자대금과 도로 사용료를 부과했다. 이에 따라 서독정부는 동독여행자의 편의도모를 위해 1971년 12월 통과협정과 1972년 4월 통행협정을 체결하여 비자비용과 도로사용료를 정부가 일괄해서 지불함으로써 동독 방문 시 국경에서 지체되는 시간을 줄일 수 있도록 했다.


동독은 분단 이후 주민들의 탈출로 노동력 부족에 시달리게 되자 1952년 탈출자에 대한 사살명령을 내렸으며 1961년 8월에는 베를린장벽을 구축하고 사살명령 대상을 더욱 확대했다. 1971년에는 국경지역에 자동발사 장치를 설치했고 1975년에는 지뢰매설을 증가하여 국경에서의 탈출을 어렵게 만들었으며 1982년에는 정식으로 국경법을 제정하여 탈출자에 대한 총기사용을 합법화 했다. 이렇게 하여 1949년부터 1989년까지 동독 국경에서 119명, 베를린 장벽에서 78명 등 총 197명이 탈출을 기도하다가 사살되었으며, 1961년부터 1990년 6월까지 국경지역에서 탈출을 시도하다가 실패한 사례가 4,444건에 달한다. 그러나 1983년 및 1984년 서독이 19억 5천 마르크의 은행차관을 주선해준 데 대한 대가로 1984년 7월 여행교통 규제를 완화하는 한편, 1984년 11월에는 국경 자동발사 장치를 철거했고, 1985년 11월에는 국경지역의 지뢰를 상당량 철거했다.


그러나 동독 측의 이러한 양보는 경제지원에 대한 대가라기보다는 동독을 사실상의 국가로 인정한 데 대한 대가의 성격이 강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평가이다. 왜냐하면 동독이 경제협력에 대한 대가로 국가안보와 관련된 사항에 대해 양보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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