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통일의 밑거름 된 동서독 교류·협력

동서독은 분단에도 불구하고 상호 적대감이 높지 않았기 때문에 다양한 분야에서 교류가 이루어져 왔고 특히 1973년 동서독 관계 정상화 이후에는 양적, 질적 측면에서 교류가 대폭 발전했다.


이렇게 양독 간에 교류·협력이 긴밀하게 이루어진 것은 우선 1970년대 초 브란트의 동방정책 이후 서독정부가 국제적 긴장완화 분위기에 편승하여 분단에 따른 인간적 고통의 완화, 민족의 동질성 유지 및 분단의 평화적 관리를 위해 동독과의 관계개선과 교류·협력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온 것이 계기가 되었다.


동독 측은 당초에는 서독과의 교류·협력이 체제부담 요인이 된다는 점을 감안, 미온적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서독과의 관계개선을 희망한 소련이 동독에게 서독과의 관계개선을 강력하게 종용하는 데다 동독에 주둔 중인 56만여 명의 소련군이 체제의 버팀목이 되고 있고 서독과의 공식적인 관계발전이 국제법상 독립적인 주권국가로서의 승인확보와 경제적 실리 확보에 도움이 된다는 점을 고려, 서독 측의 제의에 적극적으로 응했기 때문에 양독관계가 대폭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교류에 임하는 양측의 입장차이가 많아 장애요인이 되었다. 서독 측은 분단의 고통 완화와 민족의 동질성 유지에 목적을 두었던 반면, 동독은 독립적인 주권국가로서의 국제법상의 승인 확보와 실리추구에 목적을 두었기 때문이다. 교류방법에 있어서도 서독 측은 정부의 직접 개입을 줄이고 민간단체나 개인 차원의 교류가 활성화되기를 원했으나 동독은 각종 교류를 정부통제 하에 두고 정부 중심으로 교류가 이루어지기를 원했기 때문에 서로의 입장이 달랐다.


이렇게 양측 간의 입장이 달라 일부 교류가 제약을 받기는 했으나 동서독 간의 교류와 협력은 상호관계의 개선, 분단에 따른 고통완화, 민족의 동질성 유지에 크게 기여함으로써 독일통일의 밑거름이 된 것으로 평가된다.


정치관계의 발전


1949년 동서독이 각각 독립적 주권국가로 출발한 이후 보수정당인 기민당(CDU) 집권 시 서독정부는 동독이 자유선거를 통해 수립된 정부가 아니라는 점을 들어 서독의 ‘유일대표권’을 주장하면서 동독에 대해 할슈타인 원칙을 적용함으로써 상호 간에 긴장과 치열한 경쟁이 지속되었다.


그러나 1969년 9월 집권한 사민당(SPD)의 빌리 브란트 총리가 동방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 1970년 2차에 걸쳐 정상회담을 개최하고 1972년 12월 동서독 기본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동서독 관계가 정상화 되었으며 정치관계도 함께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1970년부터 1989년 동독혁명 직전까지 동서독 간에는 네 차례의 정상회담이 개최되었으며 1980년 중반 이후에는 정당교류와 군사·안보 분야로도 교류가 확대되었다. 1970년 4월 우편협력에 합의한 이후 양측은 분단기간 중 총 16개의 협정 및 합의를 체결하여 상호관계를 제도화해 나갔다.


경제 교류


1945년 7월 포츠담 회담에서 독일을 하나의 경제단위로 취급하도록 합의했기 때문에 분단 후에도 동서독 간의 경제관계는 계속 유지될 수 있었으며, 경제교류는 동서독 관계를 이어주는 중요한 연결고리의 역할을 해왔다. 양측 간의 경제교류 규모는 연평균 2219억 마르크(약 75억 달러)에 달했으며, 동독은 공식거래 수지와 서독 측의 비공식 지원을 합쳐 연평균 52억 마르크(23억 달러)의 경제적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서독 입장에서는 동독과의 경제교류가 갖는 경제적 의미는 보잘것 없었으나 정치적 측면에서는 동서독 관계의 연결고리로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동독의 입장에서는 서독과의 교류가 동독 국민총생산(GNP)의 3%, 대서방 교역의 40~50%를 차지하여 경제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졌으나 정치적 측면에서는 체제유지에 부담요인이 되는 것으로 인식했다. 상세사항은 별도 항목에서 다시 다루기로 한다.


우편·통신 교류


우편·통신 분야에서는 2차 대전 이후 연합국 점령지 간에 협정이 없었지만 1948년 베를린 봉쇄 시 잠깐 영향을 받았던 것 외에는 계속 교류가 이어져 왔다. 그러나 동독의 제한조치로 우편·통신 교류가 크게 활성화되지 못했으며, 통신회선도 1949년부터 1969년까지는 34개의 전화회선만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나 1976년 3월 우편·통신협정이 체결된 후에는 연간 서신 2억 통, 소포 3600만 건이 교환되었고 1529개의 전화회선이 유지되어 거의 제한 없는 교류가 유지될 수 있었다.


방송·언론 교류


방송·언론 교류는 1972년 기본조약 체결 이후에 시작되었다. 동독정부는 1973년부터 서독 특파원의 상주와 단기 취재여행을 허가, 1976년에는 680명의 서독 언론인이 동독 취재여행 허가를 받았고 1988년의 경우 서독인 19명과 동독인 6명이 상대지역에 교환 상주했다.


1986년 5월 동서독 간에 문화협정이 체결된 후 다음 해인 1987년 5월 ‘방송협력에 관한 합의서’가 체결되어 방송 프로그램 및 자료의 교환, 프로그램 공동제작 등의 협력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서로 관심분야가 다른 데다 민감한 문제가 많아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학술·과학·기술 분야 교류


1949년 분단 이후에도 ‘괴테사전’ 편찬 등 학술·문화 분야에서 교류가 지속되었으나 동독 정부의 통제로 간헐적 접촉에 그쳤으며, 1973년 시작된 회담이 결실을 맺어 1986년 5월과 1987년 9월 각각 문화협정과 과학기술협정이 체결됨으로써 상호교류가 대폭 활성화되었다.


학술분야 교류는 학술회의 참석, 연구여행, 학자·교수·학생·자료의 교환, 공동연구 등의 형태로 이루어졌으며 각종 비용은 서독 내독성, 공공재단인 독일학술교류재단(DAAD) 및 독일연구공동재단(DFC), 민간재단인 폴크스바겐 재단, 쾨어버 재단(Köerber Stiftung) 등이 부담했다. 1988년의 경우 약 400명의 동독방문 서독학자들과 250명의 서독방문 동독학자들이 혜택을 받았다.


과학기술 분야의 교류는 과학기술협정에 명시되어 있는 27개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이들 가운데는 석탄분석, 원자로 안전, 핵물리학, 산업심리학, 생명공학, 폐수처리, 전염병, 유적보존 등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교류방법은 학술분야 교류와 비슷했다. 문화 및 과학기술 분야의 교류가 1986년 이후 본격화된 것은 동독이 서독문화의 유입을 경계했기 때문이며 특히 1986년 7월 22일 서독과 소련 간의 과학기술협정 체결이 교류 활성화의 계기가 되었다. 한편 서독 측은 동독과의 과학기술 교류 시 서방의 대공산권수출통제위원회(Coordinating Committee for Multilateral Export Controls : COCOM) 규정을 위반하지 않고, 교류내용이 ‘상호 이익’이 되어야 한다는 기본원칙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는데 큰 관심을 기울였다.


환경 및 보건 분야 교류


환경분야는 가장 협력을 필요로 했던 분야 가운데 하나이다. 서독은 지형상 동독의 환경오염 영향을 직접 받을 수밖에 없는 실정이었고 동독은 관심, 기술, 재원의 부족으로 독자적으로 환경오염을 줄이기 어려운 형편이었기 때문이다. 동·서독 간의 기본조약 체결 이전의 환경분야 협상은 다국적 기구를 통해 이루어졌으나 1980년대 초반부터 베를린의 하수 문제, 스프레 강과 하베 강의 오염 방지 문제, 동독-서베를린 간의 쓰레기 처리계약 등 개별 환경문제에 대한 협상이 타결되었으며, 1987년 9월 환경협정 체결을 계기로 본격적인 협력이 이루어졌다. 특히 서독 측은 하천보호와 대기오염 방지를 위해 동독 측에 기술과 예산을 지원했으며 동독과 서베를린은 1974년 20년 기한의 쓰레기처리 협정을 체결하여 매년 3300만 마르크(약 200억 원)를 동독에 지불했다.


보건 분야에서는 기본조약 체결 이전에도 양측 간에 국제보건기구(WHO)를 통한 정보교환과 상호 간의 의약품 거래가 있었으나 1974년 4월 보건협정 체결, 1979년 12월 수의학 분야 협정체결 등을 계기로 교류가 대폭 확대되었다. 양측은 전염병, 중독성 약품 오·남용 및 장애인 재활과 관련된 정보를 교환하는 한편, 동서독 주민의 상대지역 방문시 의료지원도 가능해졌으나 의약품 오·남용 방지를 위해 서독 약품의 동독반입은 엄격히 규제되었다.


문화 교류


기본조약 체결 후 1973년 11월부터 문화협정 체결 협상이 시작되었으나 13년이 지난 1986년 5월에야 문화협정이 체결되어 문화분야 교류는 타 분야에 비해 가장 늦게 시작되었다. 이는 경제교류나 인도적 교류와는 달리 문화교류에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요소가 개재되었기 때문이다. 서독 측은 민족의 동질성 유지를 위해 민족문화 차원에서 교류가 이루어지기를 원했으나 동독 측은 서독의 문화침투를 경계하면서 ‘공동의 민족문화’를 거부하고 ‘사회주의 민족문화’의 독자성을 부각시키려 했기 때문에 양측 간에 합의가 이루어지기 어려웠다.


그러나 문화협정 체결 후 문화교류가 대폭 확대되어 연극·연주회·전시회의 교환개최, 학생·학자·예술인의 교환방문, 문학과 서적의 교류, 문화유산에 대한 정보교환, 자료의 대출 등이 비교적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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