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통일 반대 국가들을 돌려세운 콜 총리의 전략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전까지 동서독은 물론 어느 나라 지도자도 독일이 통일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고, 미국을 제외하고는 독일통일을 바라는 나라는 더욱 없었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동독 공산정권이 붕괴 직전의 상황에 놓이게 되었을 때에도 주변국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특히 독일통일에 비토권을 가진 소련, 프랑스, 영국의 동의를 얻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강력해진 독일은 항상 유럽의 불안정 요인이 되었으며, 독일통일은 그동안 이들이 누려온 독일에 대한 특권을 종식시킨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이 처음부터 독일통일을 적극 지원한 데다 동독 공산정권의 급속한 붕괴와 동독주민들의 통일열망으로 독일통일을 막기 어렵게 되자 2차 대전 전승국들은 독일통일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프랑스는 ‘유럽통합’이라는 전리품을 챙겼고 소련은 막대한 경제지원을 얻을 수 있었다. 영국은 늦게나마 소련을 압박하는 미국, 서독의 노력에 동참함으로써 겨우 체면을 살릴 수 있었으나 그 결정이 너무 늦어 위신만 추락되었다. 이 모든 과정에서 콜 총리의 적극적 의지와 능란한 외교적 노력이 큰 역할을 했음은 물론이다.

프랑스의 태도

2차 대전 종전 이후 독일-프랑스 관계는 독일 아데나워 초대 총리와 프랑스 드골 초대 대통령 간의 우의와 노력으로 시작되어 과거 어느 때보다도 긴밀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지난 100년 동안 1870년 프로이센과의 전쟁 및 1·2차 대전 등 세 번이나 독일의 침공을 받았기 때문에 독일통일을 가장 바라지 않는 나라였다. 지난 45년간의 긴밀한 유대에도 불구하고 독일을 두려워하는 프랑스의 잠재의식은 베를린장벽 개방 후 독일통일에 대한 반대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베를린 장벽 붕괴 후 서독 콜 총리가 “독일인들은 자결권을 가졌다”고 언급하자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은 독일통일 논의가 소련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입지를 약화시키고 복잡한 영토문제를 야기할 것이라면서 11월 18일 유럽공동체(EC:European Community) 정상회의를 소집하여 콜 총리를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1989년 11월 28일 서독정부가 「독일과 유럽분단 극복을 위한 10개항 계획」을 발표한 데 대해서는 “경솔한 기습공격”이라고 비난하면서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는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미테랑 대통령은 일주일 후인 12월 6일 키예프에서 고르바초프와 회담, 유럽의 안정과 평화는 동서독이 모두 존재함으로써 가능하다는 점에 의견을 같이 하면서 급속한 동독사태 변화에 대해 함께 우려를 표시했다. 이어 12월 21일에는 동베를린에서 모드로우 동독 총리와 회담, 동독의 경제발전을 위해 프랑스가 적극적으로 투자할 것을 약속하면서 조심스럽게 행동할 것과 서방과의 유대를 더욱 강화할 것을 주문했다. 서방 국가들이 도와줄 테니 사태를 잘 수습하여 서독에 병합되지 않도록 하라는 충고였다.

그 후에도 미테랑 대통령은 공식적으로는 독일인들이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결정할 권리를 가졌다고 언급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독일통일은 유럽통합의 틀 안에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하면서 독일통일을 가급적 늦추려고 노력했다. 그간 미테랑 대통령이 공식·비공식 자리에서 서독 콜 총리와 80여 회 만나 우의와 신뢰를 다져 왔던 것과는 너무나 다른 태도였다. 그러나 동독 공산정권이 급격히 붕괴되고, 미국이 독일통일을 적극 지원하는 데다, 소련마저 태도변화의 징후를 보이자 미테랑은 사태를 되돌리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영국, 프랑스, 소련 3개국 가운데 제일 먼저 독일통일을 수용하게 된다. 특히 미테랑은 독일과 함께 유럽통합을 추진한다면 ①영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빠른 시일 내에 유럽통합을 달성할 수 있고, ②통합유럽의 틀 속에서 통일독일의 힘을 제어하는 ‘결속을 통한 통제’가 가능하고, ③독일과의 협력으로 통합유럽에서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독일통일에 대한 프랑스 국민들의 긍정적 반응도 미테랑의 결정에 도움이 되었다. 1989년 11월 프랑스 루이 해리스 연구소의 조사결과에 의하면 응답자의 62%가 독일민족의 자결권은 존중되어야 한다고 응답했고, 같은 시기 독일 설문조사 기관인 알렌스바흐의 조사결과에서도 68%의 응답자가 독일통일에 찬성했다. 물론 미테랑의 결정 배경에는 콜 총리가 ‘마르크화의 희생’을 무릅쓰고 유럽통화 제도의 도입과 신속한 유럽통합을 약속한 것이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영국의 태도

영국은 평소에는 서독의 입장을 존중하면서 대동독 관계에서도 할슈타인 원칙을 지원하는 등 공동보조를 취해 왔으나 실제로는 프랑스보다 훨씬 더 독일통일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독일이 통일될 경우 유럽에서의 영향력 감소가 우려되고, 독일통일이 유럽통합을 촉진시켜 유럽통합을 반대하는 영국의 입지를 더욱 어렵게 만들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나치 공습을 경험한 대처 총리는 제3제국 시대의 독일의 이미지를 많이 갖고 있는 데다, 구시대적인 세력균형 개념에 집착하여 독일통일이 유럽의 안정을 깰 것이라는 점을 과도하게 우려하고 있었다.

따라서 독일통일에 대한 대처 총리의 목표는 가급적 독일통일을 늦추는 것이었다. 실제로 대처 총리는 독일통일이 10년 내지 15년, 아니면 40년 후에 이루어질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독일통일 과정이 급속히 진행될 가능성이 보이면 NATO, EC, 헬싱키 선언에 서명한 35개국이 함께 독일통일 문제를 논의하도록 하여 독일통일을 지연시킬 생각이었다.

이러한 영국의 입장은 베를린장벽 붕괴 전후 시기부터 독일통일에 대한 적극적 반대 표시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1989년 9월 대처 총리는 고르바초프와 만나 영국은 동독의 민주화를 희망하며, 독일통일에는 독일 이웃국가들의 희망과 이해가 충분히 고려돼야 한다고 설득했다. 11월 16일 더글러스 허드 영국 외무장관은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서 “미래를 낙관적으로 바라볼 이유는 분명히 있지만 통일논의는 아직 현실적이지 않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 며칠 전 대처 영국수상은 고르바초프에게 보낸 서신에서 동독의 장기적인 개혁이 동독 안정을 위한 가장 견고한 기반이 된다고 강조하면서, 어느 서방국가도 동독 내정에 개입하거나 동독과 소련의 안보를 위협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서독이 동독사태에 개입도록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을 전달하여 소련과의 공조를 모색하려는 의도였다.

또 대처 총리는 11월 17일 부시 대통령과의 회담 시 독일통일 논의가 성급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데 대해 불만을 표시했으며 「독일과 유럽분단 극복을 위한 10개항 계획」 발표 후에는 독일통일 문제는 “이슈가 아니다”는 의견을 외교 경로를 통해 공식적으로 콜 총리에게 전달했다. 대처의 태도는 독일통일을 바라지 않는 영국 국민들의 의사도 반영된 것으로 1989년 10월 여론조사에서는 70%가 독일통일에 찬성했으나 1990년 1월 여론조사에서는 응답자의 45%만이 독일통일에 찬성했다. 독일통일에 반대하는 영국인 가운데 53%가 놀랍게도 통일독일의 나치 회귀를 걱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동독 자유선거에서 신속한 통일을 약속한 「독일연맹」이 승리하여 독일통일이 기정사실화 되고, 소련의 반대 태도가 점차 완화되는 데다, 프랑스가 독일통일을 용인하기로 결정하고, 미국이 영국의 태도변화를 거듭 요청함에 따라 영국도 반대를 계속하기가 어려워졌다. 더욱이 독일통일에 대한 대처의 거부·지연 전술이 국제적으로 전혀 호응을 얻지 못한 데다 영국 보수당 내 유럽파가 대처의 유럽통합 반대노선에 반발, 대처 총리의 정치적 입지가 현저히 약화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독일통일에 반대하기가 어려웠다. 따라서 1990년 4월 이후 대처 총리는 독일통일을 수락하고 미국과 함께 소련을 압박하는 노력에도 동참하게 된다.

이렇게 볼 때 영국도 자발적으로 독일통일을 수용한 것이 아니라 상황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수락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와 관련, 대처 총리는 독일통일 후 자서전에서 “나는 독일통일 저지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해 보았다”고 술회한 바 있다. 이런 점에서 2+4 회담이 종료되기 바로 전날인 1990년 9월 11일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2+4 실무자 회의인 정무국장 회의에서 영국대표 웨스톤이 “외국 군대가 NATO의 이름으로 동독지역에서 작전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 최종 합의도달을 어렵게 만든 것도 영국의 이러한 ‘상실감’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소련의 태도

소련은 2차 대전 전승 4대국 중에서 독일통일에 가장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2차 대전시 2,000여만 명의 인명피해를 입은 데다 동독이 소련의 위성국으로서 동·서 대결의 최일선 방어망 역할을 하고 있어 독일이 중립화되지 않는 이상 독일통일을 용인하지 않는다는 확고한 입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1989년 10월 소련은 동독의 개혁을 촉구하면서도 동독 공산정권의 붕괴나 독일통일은 결코 용납할 수 없다는 태도를 갖고 있었다. 콜 총리의 「독일과 유럽분단 극복을 위한 10개항 계획」에 대해 고르바초프는 “설익은 과일을 먹고 죽은 사람이 많다”면서 세계에는 두 개의 독일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콜 총리를 강력히 비난했다. 그 후 동독에서의 소요사태가 급속히 확산되고 독일통일 기운이 무르익어 가자 소련은 당사국 간의 협의과정을 복잡하게 만들어 통일을 지연시키는 한편, 서독이 수락할 수 없는 조건을 내걸어 독일통일을 방해하려고 했다.

이를 위해 소련은 2차 대전 종전을 위한 평화회의의 개최, 동서독 문제의 협의를 위한 전승 4대국 회의와 유럽안보협력회의(CSCE) 정상회의의 개최, 「국가연합 통일방안」 제시 등의 방법으로 독일통일을 지연시키려 했다. 1990년 3월 동독 자유선거 이후 독일통일이 가시화되자 통일독일의 중립화 및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탈퇴 등 서방동맹국들과 서독이 수락하기 어려운 조건들을 제시하여 독일통일을 지연시키려했다.

그러나 동유럽 공산정권들의 급속한 붕괴로 동유럽에 대한 통제권을 완전히 상실한 데다, 동독 민주정부가 서독과의 통합을 결정하고, 미국의 적극적 노력으로 프랑스와 영국이 독일통일 지지 입장으로 돌아서 함께 압박을 가하게 되자 소련도 독일통일을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동유럽에 대한 영향력 행사를 포기한 소련으로서는 동독보다는 경제적으로 월등한 서독과 협력하는 것이 더 이익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많다. 또 콜 총리와 겐셔 외무장관의 적극적 외교노력과 경제지원 약속도 소련의 태도변화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들은 어디까지나 부수적 요인에 불과할 뿐이다. 결국 소련의 태도변화는 독일통일을 더 이상 지연시키기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미국의 태도

미국은 1989년 가을 동독 평화혁명이 시작되기 이전부터 독일통일에 긍정적인 태도를 표시해 왔다. 아데나워 초대 총리 이후 서독이 일관되게 친미·친서방 정책을 추진하여 미국의 신뢰를 받아 온 데다, 콜 정부가 “NATO의 이중결정”에 따라 국내외의 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1983년 11월 중거리 미사일의 서독배치를 결정함으로써 미·소간의 중거리미사일 폐기협정을 성공시키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소련, 프랑스, 영국과는 달리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 붕괴 직후부터 동독사태가 독일통일로 이어질 것이라고 예견하고 독일통일을 적극적으로 지원해 왔으며, 미국의 확고한 지원은 다른 나라들의 태도변화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미국이 독일통일을 적극 지원하고 나선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첫째, 미국은 세계 강대국 가운데 독일에 대해 콤플렉스를 가지지 않은 유일한 나라이다. 따라서 독일통일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 둘째, 독일통일은 소련과 동유럽의 변화를 촉진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유럽에서의 미국의 영향력을 강화하는데도 도움이 된다. 셋째, 부강하고 미국에 고분고분한 통일독일은 21세기를 함께 이끌어 나가는 데 믿을 수 있는 동반자(partner)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넷째, 독일통일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으로 예상되므로 독일이 통일된 후 NATO에서 탈퇴하거나 중립노선을 선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통일독일의 NATO 잔류를 조건으로 독일통일을 적극 지원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독일에 대한 미국 국민의 우호적인 인식도 독일통일을 적극 지원하는 배경의 하나가 되었다. 1990년 조사에서 미국 국민의 88%가 부시 행정부의 독일통일 지원에 찬성을 표시했고 1987년 조사에서 미국인들은 캐나다, 영국에 이어 세 번째로 서독을 친근한 나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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