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통일 과정에서의 미국의 역할은?

미국은 독일통일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장기적으로는 1981년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 등장 이후 ‘힘의 우위에 바탕을 둔 화해정책’이 고르바초프의 등장과 소련의 개혁정책을 이끌어낸 배경이 되었다. 보다 직접적으로는 1989년 5월 이후부터 독일통일을 적극 지지함으로써 서독 콜 정부가 국내외의 반대를 무릅쓰고 적극적인 통일노력을 전개할 수 있는 추동력을 제공했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 붕괴로 독일통일이 가시화되자 소련, 프랑스, 영국을 설득하여 독일통일을 수락하도록 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미국이 독일통일을 적극 지원한 것은 2차 대전 이후 서독정부가 철저히 친서방·친미 노선을 견지하면서 미국과 국제사회의 신뢰를 얻었던 데다, 독일통일 과정에서도 미국의 요구조건을 적극 수용하면서 모든 문제를 미국과 긴밀한 협의 하에 추진한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이러한 돈독한 신뢰관계 때문에 미국은 통일독일을 21세기를 함께 이끌어 갈 ‘리더십의 파트너'(partner in leadership)로 생각하고 독일통일을 적극 지원하게 되었다.

미국의 지지가 콜 정부의 통일노력에 미친 영향

서독 기본법은 ‘통일’을 헌법상의 명제로 규정하고 있었지만 2차 대전 이후 서독에서 책임 있는 정치인들이 ‘통일’을 입 밖에 내는 것은 금기시 되어 왔다. 냉전으로 통일이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에서 통일문제를 꺼내는 것이 오히려 통일을 더 어렵게 할 것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있던 데다 통일논의가 독일 민족주의, 즉 나치의 망령을 부추기는 행위로 간주되는 풍토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헬무트 콜 서독총리는 1989년 폴란드, 헝가리 등 동유럽 국가들에서 민주화 운동이 본격화되자 동유럽의 변화가 독일통일의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고 공언했으며, 특히 베를린장벽 붕괴 후에는 ⌜독일과 유럽분단 극복을 위한 10개항 계획⌟을 발표하는 등 통일열기를 부추겨나가기 시작했다. 콜 총리가 이제까지의 금기를 깨고 적극적인 통일노력을 기울일 수 있었던 것은 독일통일에 대한 미국 부시대통령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부시 대통령은 이미 1989년 5월 워싱턴 타임즈와의 회견에서 독일통일을 환영한다고 언급했고, 9월 18일 몬타나주 회견에서도 독일통일이 유럽정세에 불안정 요인이 되거나 서방 이익에 반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언급했다. 또 10월 24일에는 “나는 독일 통일 문제에 대해 몇몇 유럽국가들이 가지고 있는 견해에 동의할 수 없다”고 언급함으로써 콜 총리가 초기부터 국내외의 반대를 덜 받으면서 확신을 가지고 통일노력을 추진해 갈 수 있도록 보호해 주었다. 특히 베이커 미 국무장관은 서독정부가 ⌜독일과 유럽분단 극복을 위한 10개항 계획⌟을 발표한 다음 날인 11월 29일, 외국정부로서는 처음으로 이 계획을 적극 지지했다.

베이커의 지지표명은 ‘기습적인 발표’로 국내외의 격렬한 반대에 직면한 콜 총리의 입장을 강화시켜 그 후 서독정부가 통일노력을 가속화할 수 있는 추동력을 제공했다.

한편, 베이커 국무장관은 1989년 12월 13일 동독 모드로우 총리와의 회담에서 적극적인 경제지원을 약속했으나, 그 후 서독과의 공동보조를 위해 일체 지원을 하지 않음으로써 동독이 자유선거를 수락하도록 유도하는 노력에 동참했다.

또한 부시 대통령은 1990년 2월 콜 총리가 고르바초프와의 회담을 앞두고 있을 때 콜 총리에게 서신을 보내 “2차 대전 전승 4대국이 독일문제에 대해 권리를 행사하는 것은 독일을 평화적이고 민주적인 나라로 만든다는 목적 하에서만 정당화될 수 있으며 이 목적은 이미 달성됐다”고 언급하면서 “우리는 결코 소련이 4강 기제를 이용하여 독일에게 그들이 원하는 방식과 속도를 강요하도록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이로써 콜은 가장 강한 어조로 쓰여진 미국의 보증서를 지닌 채 모스크바로 향할 수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의 동의 확보와 미국의 역할

미국 정부는 매우 정교한 계획으로 프랑스, 영국이 독일통일을 승인하도록 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1989년 10월 24일 부시 대통령은 뉴욕타임즈 회견에서 “독일통일에 대해 일부 유럽국가들이 하고 있는 것과 같은 걱정을 하지 않는다”고 언급했다. 이는, 독일인들의 ‘열망’에 대한 지지를 거듭 다짐한 것이며,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통일에 장애물을 쌓는 것을 반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한 것이다.

11월 17일 대처 영국 총리가 부시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독일통일 논의가 너무 성급하게 이루어지고 있다고 불만을 표시하자 미국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명백히 밝혔다. 11월 28일 서독정부가 ⌜독일과 유럽분단 극복을 위한 10개항 계획⌟을 발표하자 이를 즉시 환영한 것은 영국과 프랑스에게는 “당신들도 딴 소리를 하지 마시오”하는 경고가 되었다.

특히 1990년 4월 20일 부시대통령은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과의 회동에서 독일통일 승인 약속을 받아냄으로써 4월 29일 더블린 EC 특별정상회담에서 독일통일 지지결의안을 통과시키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소련의 반대 극복을 위한 미국의 역할

소련의 반대 극복을 위한 미국의 노력은 서독과의 긴밀한 협조하에 특히 정교하게 추진되었다. 동독 평화혁명 초기 미국은 소련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공개적인 독일통일 지지를 가급적 삼가면서도 동독의 민주화와 독일민족의 자결권을 강조함으로써 독일통일 논의를 기정사실화했다.

소련이 독일통일 과정에 개입하고 이를 지연시키기 위해 4강회의, 4대국 대사회의, CSCE 정상회의, 평화회의 개최 등을 제의한데 대해 영국, 프랑스 및 서독과 협조하여 이를 적절히 거부하는 한편, 2+4 회담을 개최토록 하여 2차 대전 전승 4대국의 동의절차를 대폭 간소화시켰다.

미국은 고르바초프가 소련 강경세력과의 투쟁에서 유리한 입장을 차지하고 독일통일 승인에 따른 소련내부의 반발을 무마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도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1989년 12월 19일 쉐바르드나제 소련 외무장관을 NATO 사령부로 초청하여 화해분위기를 조성했으며, 1990년 6월 더블린에서 개최된 EC 정상회담에서 EC 집행위원회로 하여금 대소련 원조계획안을 수립하도록 결의했다.

7월 2일부터 13일까지 개최된 제28차 소련공산당 전당대회를 앞두고 고르바초프를 지원하기 위해 더욱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7월 5일 런던에서 개막될 NATO 정상회담에서 ‘변화된 NATO에 관한 선언’을 결의토록 하고 7월 9일 휴스턴에서 개막된 G-7 정상회의에서는 대소련 경제지원 대책을 결의토록 했다. 아울러 미국은 NATO 및 G-7회의에서 결의할 내용을 소련 공산당 대회 이전에 소련에 통보하고 언론에 발표함으로써 고르바초프가 압도적 다수로 서기장에 재선되도록 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소련과 합의에 도달해야할 마지막 문제는 통일독일의 NATO 잔류문제였다. 이 문제와 관련, 부시대통령은 우선 미국과 서독의 의사가 확고하다는 사실을 소련 측에 알리기 위해 1990년 2월 28일 고르바초프와의 통화시 “통일독일이 NATO 정회원으로 남아야 한다는 것에 콜과 합의했다”고 알려주었다. 그러나 고르바초프는 3월 7일 독일 제1텔레비전 방송 인터뷰에서 이를 단호히 거부한다고 밝혔다.

그 후 5월 말 고르바초프의 워싱턴 방문시 양국은 일단 원칙적으로는 합의에 도달했다. 고르바초프는 처음에는 통일독일이 두 동맹에 모두 가입하거나 아무 동맹에도 가입하지 말아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그러나 부시대통령이 CSCE 규약을 들어 어느 나라나 동맹을 선택할 권리를 갖고 있다는 점, 통일독일의 힘을 제어하기 위해서는 통일독일을 NATO의 틀 안에 묶어두는 것이 유리하다고 설득하자 이를 수긍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후에는 독일이 통일된 후에도 일정 과도기 동안 4강이 권한을 보유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소련 공산당 정치국원 대부분이 강경책을 주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련 설득을 위한 마지막 카드는 영국이 구상한 ‘폭탄선언’을 하는 방법이었다. 베이커 장관은 6월 22일 베를린에서 개최된 2+4 각료회담에서 “미국, 영국, 프랑스는 조건 없이 4강의 권한을 포기할 테니 소련이 고립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선언했으나 쉐바르드나제는 소련 국내사정을 들어 태도를 바꾸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부시와의 정상회담에서 이에 합의한 바 있는 고르바초프는 7월 당 대회에서 입지가 강화되자 7월 16일 콜 총리와의 코카서스 회담에서 이를 최종적으로 수락했다. 그 대신 소련 측의 요구에 따라 서독측은 소련군이 철수할 때까지는 NATO의 영역을 동독지역으로 확대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이 모든 합의는 미국의 적극적 역할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들이다.

미국이 독일통일을 적극 지원한 것은 앞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①미국은 독일에 콤플렉스를 가지지 않은 유일한 나라이고, ②독일통일은 소련과 동유럽 변화와 유럽에서의 미국의 영향력 강화에 도움이 되고, ③통일독일의 NATO 잔류와 중립화 방지를 위해서는 독일통일의 적극적 지원이 필요하고, ④독일을 21세기 함께 이끌어 갈 동반자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외에도 ①’자결의 원칙’이 미국 정치사상의 전통 가운데 가장 중요한 원칙이고, ②유럽공동체(EC)와 NATO의 틀 안에서 독일통일이 이루어지도록 함으로써 자유와 민주주의의 역동성을 증진시키려는 전략적 목적을 갖고 있었고, ③미국이 독·소간의 교섭에 전혀 의구심을 갖지 않았고, ④주변국을 설득할 서독의 능력을 인정했고, ⑤독일의 진의와 진실성을 전적으로 선뢰했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의 적극적 지원은 초대 아데나워 정부 이후 지속되어온 서독정부의 친서방·친미 노선과 헬무트 콜 정부의 적극적 노력이 이룬 성과였다고 볼 수 있다.

또 독일통일에는 행운도 따랐다. 만일 1990년 8월 2일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시작된 걸프전쟁이 두 달 전에 일어났다면 미국이 그처럼 열정적으로 미·소 정상회담, NATO 특별정상회의, G-7경제정상회의를 활용하여 독일통일을 지원하는데 몰두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더욱이 미국으로서는 걸프문제에서 소련의 협조를 얻어야할 처지였기 때문에 소련이 독일통일을 수락하도록 강하게 압박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고 독일통일 1년 후인 1991년 12월 고르바초프가 실각하고 소연방은 15개 공화국으로 분리되었다. 만약 이 때까지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면 독일이 이들 15개 나라의 동의를 얻는 데는 훨씬 더 많은 시간과 비용이 수반되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도 독일통일은 “하늘이 내린 선물”이라고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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