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통일은 어떻게 해서 가능해졌는가?

독일통일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요인은 소련의 개혁정책과 동유럽 포기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서독정부의 적극적인 의지와 노력, 그리고 미국의 지원도 중요한 요인으로 지적된다. 또 서독의 발전된 민주제도, 풍요로운 경제, 안정된 사회가 동독인들의 동경 대상이 되었다는 점과, 서독 정부의 일관성 있는 정책 등도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이를 직접적 요인과 간접적 요인으로 구분하여 살펴본다.


단기적, 직접적 요인


첫째,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공산주의 종주국이었던 소련의 변화를 들 수 있다. 1984년 개혁주의자인 고르바초프가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취임한 이후 소련은 적극적인 개혁(Perestroika)과 개방(Glasnost) 정책을 추진했다. 특히 고르바초프가 ‘브레즈네프 독트린'(Brezhnev Doctrine)을 폐기, 동유럽 지배 포기의사를 명확히 함으로써 동유럽 전체가 개혁열풍에 휩싸이게 되었고, 이런 개혁열풍이 동독 평화혁명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더욱이 1989년 10월 7일 동독정권 수립 4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고르바초프가 “인생은 늦게 오는 자를 벌한다”는 소련 속담을 인용, 동독의 개혁을 공개적으로 촉구하자 동독주민의 개혁요구와 시위는 급속히 확산되었다. 또한 고르바초프는 10월 6일 동독 정치국원들과의 회합에서 소련군은 동독시위에 일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하고, 주동독 소련대사를 통해 시위의 무력진압에 반대한다는 의사를 전달함으로써 동독 공산정권은 무력진압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정통성 없는 동독체제를 유지시켜 준 것은 소련 탱크의 힘이었는데, ‘영원히 변경될 수 없는 동맹’ 소련으로부터 갑자기 버림받게 되자 동독 공산정권은 더 이상 지탱해 나갈 수 없었던 것이다. 


둘째, 동유럽 국가들의 민주화 열풍이다. 소련의 개혁·개방 정책과 브레즈네프 독트린 폐기로 1988년 이후 동유럽 국가들은 민주화 개혁 열풍에 휩싸이게 되었다. 동유럽은 역사적으로 서구의 민주주의적 바탕을 가진 나라들이어서 소련의 통제가 풀리자 소련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개혁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헝가리에서는 1988년 5월 개혁파인 그로스 서기장이 집권했고, 폴란드에서는 1989년 4월 자유노조 합법화에 이어 6월 총선에서 동유럽 최초로 비공산당 주도의 연립내각이 수립되었다. 체코에서는 1989년 11월 공산당의 권력독점이 폐지되고 12월 29일에는 반체제 인권운동가인 바츨라프 하벨이 대통령에 취임했다. 루마니아에서도 그 해 12월 공산정권이 무너지고 차우세스크 부부가 처형되는 등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동유럽 인접국들에서의 민주화 열풍은 동독주민의 개혁욕구를 자극, 늦게나마 평화혁명에 나서도록 하는 요인이 되었다. 이러한 동유럽 지역의 민주화 개혁 열풍은 1970년대 초 “스페인의 봄”에서 시작된 세계적 민주화, 자유화 열풍이 중남미, 아시아를 거쳐 동유럽에 도달하여 시민혁명이 성공했던 것이라고도 해석된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성공한 후 200년 만에 동유럽 주민들이 시민혁명에 성공한 것이다.


셋째, 공산정권에 대한 동독주민들의 염증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는 점이다. 동유럽 국가들의 개혁열풍을 계기로 동독주민들 사이에서도 무언가 자기들에게도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인식이 퍼져가고 있었다. 그러나 1989년 6월 동독 공산정권이 천안문 사태의 무력진압을 공개적으로 지지하자 동독주민들의 절망감은 더 커지게 되었다. 이제 동독에서도 일반주민은 물론 공산당 간부와 가족들까지도 획기적인 개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어 미봉적 조치나 무력진압으로 시위사태를 수습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더욱이 군 일선 지휘관들 가운데는 시위대를 향해 발포명령이 내려지면 병사들이 명령내린 지휘관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았다. 따라서 공산 지도부는 섣불리 발포명령을 내릴 수 없었다.


넷째, 동독경제가 파탄상태였다는 점이다. 동독은 사회주의 경제체제의 비효율성, 주민들의 서독이주에 따른 노동력의 손실, 성장률을 상회하는 복지지출의 증가, 1980년대 초 전자산업 투자실패 등으로 1980년대 중반 이후 서독의 지원 없이는 주민생활 수준을 20~30% 정도 낮추어야 할 형편이었다. 더욱이 1989년 9월 이후 시위와 탈출자 급증으로 경제사정이 더욱 악화되어 서독과의 통합이 불가피했다.


다섯째, 공산 지도부의 체제수호 의지가 매우 미약했다는 점이다. 1989년 9월 주민들의 대규모 탈출과 전국규모의 시위가 시작되었을 때 공산지도부는 여행자유의 확대 등 몇 가지 개혁조치를 취하면 사태를 진정시킬 수 있을 것으로 안이하게 판단했다. 그러나 10월 초 갑자기 시위가 확산되어 유혈진압 없이는 사태진정이 어려운 상황이 되었으나 목숨을 걸고 체제를 수호하겠다는 의지를 가진 공산정권 간부는 아무도 없었다. 동독체제를 계속 지탱해 나갈 자신도 없었고 공산정권이 붕괴되어도 자신의 목숨은 건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섯째, 서독정부가 베를린 장벽붕괴 직후부터 확고한 목표와 의지를 가지고 동독주민의 탈출과 시위 사태를 통일로 연결시켜 갔다는 점이다. 베를린 장벽개방 3주 후 「독일과 유럽분단 극복을 위한 10개항 계획」을 발표하여 이때까지 금기시 되어 왔던 통일논의를 공식화했다. 그 후에도 동독 탈출자의 제한 없는 수용, 1:1 화폐교환 비율의 약속 등 서독 정부의 신속하고 적절한 조치는 동독주민의 불만에 방향성을 제시하고 통일 에너지로 전환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일곱째, 미국의 적극적 지원이 2차 대전 전승 4대국의 승인을 얻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미국은 동독 시위사태 초기부터 통일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서독의 정책을 지지했고, 미국의 지원은 프랑스, 영국, 소련을 설득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이는 2차 대전 이후 서독정부가 일관성 있게 친미·친서방 노선을 견지해 온 데다, 베를린 장벽 개방 이후 미국의 요구를 조건 없이 수용하고 미국과 긴밀한 협의 하에 통일작업을 추진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장기적, 간접적 요인


첫째, 서독체제가 동독인들의 동경 대상이 되었다는 점이다. 서독은 완벽한 민주제도, 풍요로운 경제, 균형 있는 분배를 통해 동독인들이 가장 동경하는 유토피아가 되었다. 이러한 서독의 존재는 평소 동독 공산정권의 정통성을 약화시키고 동독주민들이 공산정권에 더 염증을 느끼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동독 주민들은 평소 자신들의 처지를 헝가리나 폴란드와 비교하지 않고 서독과 비교했으며 서독사회는 동독인들의 준거기준이 되었다. 따라서 자유선거를 통해 체제선택의 기회를 갖게 된 동독주민들이 동독을 버리고 ‘서독연방에의 가입’을 선택한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둘째, 원칙을 고수한 서독의 정책도 통일을 이룬 배경의 하나가 되었다. 2차 대전 종전 이후 꾸준히 이어온 친서방 정책, 나치 죄과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보상, 기본법 제23조 가입식 통일조항과 제116조 국적조항의 고수, 인도주의 원칙과 분단고통 완화에 중점을 둔 내독정책, “대가 없는 경제지원 불가” 방침 등은 통일을 이루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셋째, 인도주의적 견지에서 분단에 따른 고통완화와 동독주민의 ‘삶의 질’ 개선을 중시했던 내독정책은 동독주민들이 동독을 버리고 통일을 선택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국가’ 보다 ‘인간’을 중시한 서독의 정책은 민족의 이질화를 방지하고 동서독 주민들이 통일에의 희망을 버리지 않도록 하는 매개체가 되었다.


넷째, 철저한 과거청산으로 2차 대전 전승 4대국은 물론 주변국으로부터 신뢰를 얻었다는 점이다. 나치 죄과에 대한 솔직한 인정과 반성, 지속적 사죄와 철저한 보상, 국민교육을 통한 재발방지 대책의 강구 등은 주변국들이 독일통일을 수락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다섯째, 동독주민이 서독 TV를 시청할 수 있었던 것도 통일에 큰 도움이 되었다. 독일통일 과정에서 서독 TV는 ①외부정보 전달자로서의 역할, ②동독주민의 시위를 부추기는 촉매의 역할, ③서독의 제도와 생활에 대해 알려주는 교육자의 역할을 함으로써 동독 공산정권의 붕괴와 동독인의 통일 후 적응에 큰 도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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