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통일과 관련된 논쟁들

① 독일통일은 기민당의 ‘자석이론’의 승리인가, 사민당의 ‘접근을 통한 변화’ 정책의 성과인가?


서독 양대 정당인 기민당(CDU)과 사민당(SPD)의 독일(통일)정책은 뚜렷한 차이점을 갖고 있었다. 기민당의 ‘자석이론'(Magnet Theory)에 바탕을 둔 ‘우위정책’은 서독이 정치, 경제, 군사, 도덕적으로 ‘힘의 우위’를 견지하면 자석에 쇠붙이가 끌려오듯 동독이 끌려와 통일을 이룰 수 있다는 정책이다. 그 반면, 사민당의 ‘접근을 통한 변화’ 정책은 화해와 교류·협력을 통해 동독의 안정을 도우면 동독 공산정권이 변하여 통일을 이룰 수 있다는 정책이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양 정당이 모두 독일통일은 유럽통합 과정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통일’은 두 정당 모두에게 현실적 정책목표가 아니었다. 따라서 두 정당 간에 차이가 있다면 기민당은 장기목표로서 통일을 좀 더 강하게 강조한데 비해 사민당은 그런 언급을 꺼렸다는 것 정도였다는 평가도 있다.


그러나 어느 정책이 독일통일에 더 기여했는지에 대해 평가해 보는 것은 한반도 통일을 위한 유익한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필요하다.


우리 국내에서는 브란트의 동방정책이 독일통일의 원동력이 되었다는 평가가 압도적으로 많다. 브란트의 동방정책은 아데나워 시대의 친서방 일변도의 정책에서 벗어나 소련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동서독 간의 교류·협력을 대폭 확대시켜 민족의 동질성 유지와 ‘분단에 따른 인간적 고통완화’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브란트의 화해·협력 정책이 독일통일에 실질적으로 기여했는지, 아니면 동독 공산정권의 생존을 돕고 동독혁명을 지연시켰는지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린다.


사민당 측 인사들은 브란트의 동방정책으로 고르바초프의 등장이 가능해졌고, 브란트에서 시작된 동서독 간의 긴밀한 교류·협력이 동독 평화혁명을 가능케 한 요인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특히 브란트의 동방정책 입안자인 에곤 바는 1993년 11월 하원청문회에서 ①사민당이 유럽평화질서 구축을 위한 방안들을 제시하고 고르바초프의 군축 이니셔티브에 호응함으로써 동독 평화운동 세력이 생성될 수 있었으며, ②사민당의 동방정책은 동독지도부를 대화상대로 인정하면서 일시적으로는 동독체제 안정화에 기여한 것처럼 보이지만 동독체제의 유연화와 개방을 촉진시켜 궁극적으로는 내부로부터 체제불안을 유도해 낸 “안정화를 통한 불안정의 야기”의 변증법적 전략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사민당이 ①서독의 NATO 가입이 독일통일과 배타적 관계에 있다고 믿었던 점, ②유럽안보질서의 확립만이 독일통일의 전제조건이라고 생각했던 점, ③공산독재 체제의 개혁은 점진적으로, 위로부터 이루어질 때 성공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동독의 ‘위로부터의 개혁’ 능력을 과대평가했던 것은 명백한 과오였다고 인정했다.


그 반면, 기민당 측 인사들은 독일통일은 소련의 냉전 패배와 동유럽의 민주화 추세로 가능해진 것이며, ‘힘의 우위’에 바탕을 둔 기민당의 정책노선이 이룬 성과라고 주장한다. 특히 콜 총리는 의회 청문회에서 소련의 유럽 핵무기 배치에 대응한 NATO의 핵전력 증강과 ‘힘의 우위’ 정책의 고수가 고르바초프의 등장과 소련의 군비경쟁 포기를 이끌어 낸 요인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양측의 주장은 모두 일면 타당성을 가지고 있으나 다음과 같은 점에 비추어 독일통일은 사민당의 ‘접근을 통한 변화’ 정책보다는 기민당의 ‘자석이론’이 거둔 성과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생각된다.


첫째, 독일통일은 ‘접근을 통한 변화 정책’으로 동독 공산정권이 ‘변해서’ 가능해진 것이 아니라 동독주민의 시위와 소련의 동유럽 포기로 동독 공산정권이 ‘망해서’ 가능해졌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동독 공산정권을 인정하고 안정시켜 동독의 변화를 유도하려고 한 사민당의 정책은 정통성 없는 동독 공산정권을 안정시켜 평화혁명을 지연시켰다는 비판을 받는다.


둘째, 사민당의 동방정책은 “분단의 평화적 관리 정책”이었을 뿐 통일을 목표로 한 정책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사민당의 동방정책으로 동독정권의 주민통제가 완화되고 동서독 간의 교류·왕래와 정보유입이 확대되어 동독 평화혁명이 가능해 졌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동독보다 폴란드, 헝가리, 체코, 루마니아에서 개혁운동과 공산정권 붕괴가 먼저 일어났다는 점은 서독의 화해협력 정책과 교류협력의 증가가 동독 공산정권 붕괴에 미친 영향이 매우 제한적일 것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결국 동유럽 국가들은 역사적으로 서구의 민주주의적 바탕을 갖고 있어 브레즈네프 독트린이 폐기되자 개혁운동이 단기간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셋째, 동독 공산정권 붕괴 후 동독 주민들이 서독 편입을 선택한 것도 화해·협력 정책 때문이 아니라 자유롭고 풍요한 서독체제가 동독주민들의 동경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브란트의 동방정책이 없었어도 동방주민들의 서독편입 결정은 어렵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다음과 같은 점에 비추어서도 독일통일은 사민당의 ‘접근을 통한 변화’ 정책의 패배를 의미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첫째, 사민당의 ‘접근을 통한 변화’ 정책은 동독 공산정권과의 협상과 협력을 통해 동독을 변화시킨다는 정책으로서, 공산주의의 개량 가능성과 ‘위로부터의 혁명’ 가능성을 믿었다는 점에서 역사인식에서 오류를 범했다는 것이다.


둘째, 동독 평화혁명시 사민당의 주장대로 서독정부가 소련 및 동독과의 화해협력 기반 손상을 우려, 중립화를 추구하거나 동독이주민의 수용을 제한하고 동독정부에 경제지원을 했다면 독일통일은 불가능했거나 통일 과정이 훨씬 지연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셋째, 소련이 독일통일을 수락한 것도 독·소 관계의 개선과 자발적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라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점이다. 이렇게 볼 때 독일통일은 ‘접근을 통한 변화 정책’ 보다는 ‘자석이론’의 성과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생각된다.


② ‘흡수통일’은 바람직하지 않은 통일방법인가?


‘흡수통일’은 한쪽의 의사를 다른 쪽에 강요하거나 약자의 희생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우리나라에서는 바람직하지 않은 통일방법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양측이 대등한 관계일 경우 갈등과 이해관계의 조정이 어려워 통일이 이루어지지 못할 가능성이 많다. 대등한 관계에서 통일에 합의한 예멘의 경우 통일 후 내전을 겪고 나서 완전한 통일을 이룰 수 있었다.


독일의 경우, 서독 주도하에 서독체제로 통일된 것은 동독 체제나 제도 가운데 통일독일이 계승해야할 요소가 적고, 대부분의 동독주민들도 서독체제로의 병합을 원했기 때문에 이른바 ‘흡수통일’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동독 측이 새로운 국호, 국가, 국기 제정을 요구한데 대해서도 특별히 그렇게 해야 할 이유가 없고 각종 비용만 가중시키게 된다는 점에서 서독 측이 수용하지 않았다.


남북한의 경우 ‘흡수통일’이 아닌 ‘대등한 통일’을 해야 한다면 남북한이 서로 타협하고 양보하고 절충해야 한다. 이 경우 통일을 위해 우리는 우리 제도 가운데 무엇을 양보하고 북한의 제도 가운데 무엇을 수용할 것인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고수하고 사회주의 계획경제 체제를 수용할 것인가? 김일성 주체사상을 통치 이데올로기로 수용하고 시장경제체제를 고수할 것인가? 아니면 한 때 유럽에서 논의되던 “제3의 길”을 택할 것인가? 결국, 북한이 자유민주주의 체제, 시장경제 체제로 전환되지 않는다면 대등한 통일은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될 경우 한국체제가 우위를 갖고 있어 한국주도하에 통일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또 역사상 대등한 위치에 있는 분단 양측이 평화통일을 이룬 사례는 없으며 힘의 차이가 있을 때 통일이 용이하다는 점을 감안할 때 ‘흡수통일’은 불가피한 선택이 될 가능성이 많다.


③ 신속한 통일 대신 점진적 통일을 했어야 하는가?


베를린장벽 붕괴 이후 야당인 사민당과 일부 지식인들은 동서독이 일정기간의 과도기를 거친 후 통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콜 정부는 ①동독 탈출자의 물결을 억제하기 어렵고, ②동독경제가 파탄상태에 빠져 자생력을 잃었고, ③자유선거로 집권한 동독정부가 신속한 통일을 요청하고 있고, ④동독주민의 저축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동독의 인플레가 심각해지기 전에 통일을 할 필요가 있었고, ⑤고르바초프의 실각과 소연방의 붕괴 가능성이 있고, ⑥시간이 경과할수록 주변국의 반대가 조직화될 가능성이 있고, ⑦점진적 통일이 실익이 없다는 점 등을 고려하여 신속한 통일을 결정했다.


갑작스러운 통일로 서독 측은 통일비용 조달에 어려움을 겪었고 동독 주민들은 서독체제에의 적응에 어려움을 겪게 되는 등 통일 후유증이 증폭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당시의 국내외적 상황으로 보아 통일의 기회를 기민하게 활용하여 통일을 이룬 것이 타당한 결정이었다는 점에 대해 독일에서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다. 독일이 통일된 지 1년 후 고르바초프가 실각하고 소련이 15개 독립국가로 분리됨으로써 이들의 동의를 얻는 데는 더 많은 시간과 비용이 수반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동독 공산정권 붕괴 후 독일이 점진적 통일을 추구했다면 통일 후 경제여건은 더욱 악화되고 혼란이 가중되었을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 평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