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이 ‘조급한 통일’을 추진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독일통일은 준비가 없는 가운데 ‘조급하게’ 추진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분단 이후 서독정부는 통일을 위한 실질적인 준비가 거의 없었다. 분단 직후부터 통일이 매우 어렵다고 보고 분단의 평화적 관리에 주력했고, 특히 동독주민의 대규모 시위사태가 발생하기 시작한 1989년 10월 이전까지는 동독의 변화와 통일이 전혀 예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독일이 준비 없는 가운데 ‘신속한 통일’을 추진하다 보니 여러 가지 어려움과 시행착오 과정을 겪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독일이 ‘조급한 통일’을 추진한 것이 ‘정책상의 실수’라고 평가하는 것은 잘못이다. 당시의 상황은 동독 이주민의 폭증, 동독경제의 붕괴, 고르바초프의 개혁정책의 후퇴 가능성 등으로 신속한 통일이 불가피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도 통일과정에서 나타날 불가피한 상황들은 어떤 것들이 있을 것이며 어떻게 대처할지에 대해 사전에 충분히 검토해 둘 필요가 있다.


‘조급한 통일’ 추진 배경


1989년 9월 이후 동독주민의 대규모 탈출과 시위사태가 시작되었을 때 서독정부는 통일을 예견하지 않았기 때문에 동독사태를 안정시키는 데만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그 이후 진전된 각종 사태는 ‘신속한 통일’을 불가피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


첫째, 동독정부와 동독주민들의 강력한 요구가 있었다는 점이다. 1989년 10월 이후 동독주민의 탈출로 경제·사회체제가 마비되어 동독은 더 이상 버티기 어렵게 되었다. 따라서 동독주민들과 자유선거로 집권한 로타 드메지어 정부가 신속한 통일을 강력히 주장한 데다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사태가 더욱 악화될 가능성이 많아 신속한 통일이 불가피했다.


둘째, 동독경제가 급속히 붕괴되어 시급한 대책강구가 필요했다는 점이다. 동독주민의 대규모 탈출과 경제·사회 기능이 마비되고 동독경제가 급속히 붕괴되어 신속한 화폐·경제·사회 통합이 불가피했다.


셋째, 동독 탈출자 억제를 위해서도 신속한 통일이 불가피했다. 1989년 34만 4천여 명이 탈출한데 이어 1990년 1월부터 6월까지 23만 8천여 명이 추가로 탈출함으로써 1년 6개월 동안에 총 58만 2천여 명의 동독인이 서독으로 탈출했다. 따라서 동독경제의 파탄을 막고 서독 각 주의 탈출자 정착지원에 따른 부담을 완화하기 위해서는 신속한 통일이 불가피했다.


넷째, 동독주민의 저축보호를 위해서도 필요했다. 1989년 10월 이후 동독경제가 마비되자 국가재정 유지를 위해서는 통화증발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따라서 드메지어 정부는 사유재산이 없는 동독주민의 저축을 보호하기 위해 동독 화폐가치가 대폭 하락하기 전에 통일을 할 필요가 있었다. 서독정부로서도 통일 후 동독경제 재건과 마르크화의 가치 안정을 위해서는 신속한 통일이 불가피했다.


다섯째, 점진적 통일이 실익이 없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점진적 통일의 경우 ①동독인의 탈출을 억제할 방법이 없고, ②동독경제 악화를 방지하기 어렵고, ③동독의 정치·경제·사회제도가 미흡한 가운데 경제지원을 할 경우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될 가능성이 많고, ④동서독 주민을 분리시켜 놓을 경우 서독체제 적응이 늦어져 점진적 통일의 실익이 없다고 판단되었다.


여섯째, 통일작업이 지연될 경우 관련국들의 반대가 조직화되어 동의를 얻기가 더욱 어렵게 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일곱째, 고르바초프의 실각과 소련 개혁정책의 후퇴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서독 정보당국은 소련 내 보수세력의 공격을 받아 고르바초프가 실각하거나 개혁정책이 후퇴할 가능성이 많다고 판단했다. 또 소연방을 구성하는 15개 공화국 내부에서 독립기운이 강해져 소연방의 해체가 우려되었기 때문에 신속한 통일이 불가피했다. 실제로 독일통일 1년 후인 1991년 12월 고르바초프가 실각하고 소연방이 15개 독립국가로 분리되었다. 이때까지 독일이 통일되지 않았다면 이들 15개 독립국가의 승인을 얻는 데는 훨씬 더 많은 시간과 비용이 필요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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