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당국의 비핵화 진정성과 관련된 논란에 종지부를 찍을 시점이 됐다. 북한 당국이 은폐해왔던 병진노선의 실체가 민낯을 드러낸 것이다. 그들이 주장하던 병진노선이란 핵보유를 기반으로 하여 국제사회를 상대로 경제발전의 밑천을 확보한다는 것으로 비핵화와는 거리가 먼 개념이라는 점이 밝혀졌다.
지난해 싱가포르에서 역사적인 미북정상회담이 개최(6.12)된 지 약 석 달 후인 9월 9일 조총련 산하 ‘재일본 조선사회과학자협회’는 『21세기의 태양 김정은 원수님』이란 책을 발간했다. 이 책에선 병진 노선과 관련하여 “우리 공화국의 자위적인 핵보유를 영구화하는 것이 병진이 안고 있는 중대한 의미”라며 “병진 노선은 급변하는 정세에 대처하기 위한 일시적인 대응책이 아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덧붙여 병진노선의 중대한 의미 가운데 하나로 “핵보유의 영구화에 토대하여 경제 강국 건설에서 결정적 승리를 이룩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북한 당국은 김정은 시대 들어 처음 개최된 당 전원회의인 2013년 3월 전원회의에서 ‘경제건설과 핵무력 건설의 병진노선’을 ‘새로운 전략적 노선’으로 내세운 바 있다. 그 후 5년 후인 지난해 4월 열린 전원회의에서 김정은은 핵·경제 병진노선을 일단락 짓고, 경제건설에 집중하는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겠다는 뜻을 구체화했다. 당시 많은 전문가들은 북한의 비핵화 가능성을 기대하며 앞으로는 북한 당국이 경제건설에 매진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었다. 아직까지도 북한 당국의 비핵화 진정성을 믿고 있는 이들은 ‘재일본 조선사회과학자협회’가 발간한 책자의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할 것이다. 외무성 등 북한 당국의 공식적인 발표가 아니기 때문에 북한 외곽 매체의 선전선동에 불과하다고 할 수도 있고, 비핵화 협상에 불만을 표하는 군부와 일부 주민들을 달래기 위한 국내용이라는 주장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간 <조선신보>를 비롯한 조총련 매체들은 북한 당국이 공식적으로 제기하기 부담스러운 내용들을 대변해왔다는 점을 감안할 때 조총련 산하기관인 ‘재일본 조선사회과학자협회’가 펴낸 이 같은 책자는 북한 당국의 의중을 반영하고 있다고 평가된다. 뿐만 아니라 다른 매체에서도 비핵화 협상이 진행되고 있던 와중에도 북한 당국이 핵개발을 계속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해주고 있기 때문에 그동안 북한 당국은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를 기만하며 시간만 끌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지난 21일 일본 교도통신(共同通信)이 IAEA(국제원자력기구)의 보고서를 인용해 발표한 보도에는 “북한이 영변핵시설에 있는 흑연감속로에서 사용 후 핵연료봉을 3천 개에서 최대 6천 개까지 꺼냈을 가능성이 있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IAEA에 따르면, 이 같은 핵연료봉은 실제 재처리가 이뤄졌을 경우 1개 이상의 핵폭탄을 추출할 수 있는 분량이라고 한다. 또한 IAEA는 북한 당국이 지난해 미국과의 핵협상을 추진하고 있는 동안에도 영변의 5MW 원자로를 계속 가동하며 핵개발에 매진하고 있었다며 그 증거를 공개하기도 했다.
조총련 산하 기관에서 발간한 책자의 내용과 IAEA가 공개한 자료 등을 교차 확인해볼 때 북한 당국은 여전히 병진노선을 추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병진’의 내용은 핵개발을 포기하고 경제건설에 매진한다는 게 아니라 핵보유국의 지위를 확고히 하고 그것을 토대로 국제사회에 ‘갈취외교’를 통해 경제발전을 도모해보겠다는 것이다.
어떤 이는 김정은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친서를 보내 한미연합훈련이 끝나는 대로 비핵화 협상을 재개할 의사가 있다는 점을 밝혔다는 점을 들어 추후 비핵화 협상이 열릴 경우 의미있는 성과가 나오고 그것이 미북정상회담과 남북관계 개선으로 이어지는 그림이 그려지지 않겠느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 같은 기대는 북한을 여전히 모르고 하는 순진한 희망사항이다. 북한 당국이 스스로 정권 보위의 보검이라고 규정하는 핵을 내려놓을 리는 만무하기 때문이다.
얼마 전까지 북한 당국은 한미연합훈련을 맹비난해왔다. 김정은은 트럼프 대통령에게도 한미연합훈련이 종결되면 변화의 국면이 올 것 같은 친서를 보냈다. 한국 정부도 한미연합훈련이후의 대화 국면을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난 20일 한미연합훈련이 끝나자 북한 당국은 이번에는 한국군의 최신무기 도입을 비난하며 군사적 적대행위가 지속되는 한 비핵화 대화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하고 나섰다. 그동안 비난의 타겟을 한국 정부에만 두다가 한미연합훈련이 끝난 다음날인 21에는 <노동신문> 논평을 통해 미국을 직접 비난하기도 했다. “미국의 변함없는 대조선 적대시 정책은 우리 국가를 잠재적, 직접적 위협들을 제거하기 위한 자위적 대응조치들을 취하는 데로 떠밀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김정은이 최근 미사일 도발에 대해 트럼프 대통령에게 사과하며 양해를 구했다는 친서도 새로운 신형무기들의 완성을 위해 시간을 벌려는 의도에 다름 아니라고 본다.
어쩌면 김정은은 갖은 빌미를 들어 미국과의 핵 협상 자체를 파기하려는 생각을 지니고 있을 지도 모른다. 지난해부터 미북협상에 응했던 북한의 의도는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 경제제재를 완화하고 경제재건을 이뤄보겠다는 계산 때문이었다. 그러나 미국이 비핵화와 제재 완화를 연계시키며 그 뜻을 고수하자 북한의 셈법이 달라졌다. 북한, 더 나아가 동북아에서의 영향력 감소를 우려한 중국이 러브콜을 보내오며 갖은 지원을 다해주고, 최근에는 러시아와도 밀착하고 있다. 특히 중국은 지난 6월 시진핑의 방북을 계기로 북한에 80만 톤의 쌀을 지원해 주기로 했다는 보도도 나오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이기 때문에 북한 당국은 한국 정부가 자존심 상하게 ‘인도적’ 지원이라는 명분을 들어 제공하려던 5만 톤의 쌀도 수령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핵개발도 완성했겠다, 그것을 실제 사용할 위협적인 투발 수단도 새롭게 개발했겠다, 중국과 러시아가 뒤를 봐주며 경제 재건을 도와주고 있는 마당에 김정은이 미국과 핵을 포기하기 위한 협상을 벌일 이유가 있을까. 한국은 점점 관련국들로부터 고립되고 있는데 이제 한국의 효용가치가 있을까. 김정은에게는 4.27, 612, 9.19 남북, 미북 회담의 합의를 뒤집을 수 있는 명분만 필요할 것이다. 그것이 지금까지는 한미연합훈련과 한국군의 신무기 도입으로 나타났지만 다음 달 말 열리는 유엔 총회에서 북한인권문제가 제기되거나 다른 이슈가 대두할 경우 북한 당국은 협상의 판을 뒤집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때가 되면 북한 당국은 본격적으로 핵보유국임을 주장하며 핵군축 협상을 열자거나 핵 감축을 전제로 경제적 대가를 빼내려는 북한 특유의 갈취외교를 다시 선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요컨대 북한 당국은 병진노선을 포기한 바도 없고 앞으로도 그것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그들이 말하는 병진노선은 핵보다 경제발전을 우선시하는 개념이 아닌,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전제조건으로 핵을 상정하고 있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병진’이 아니라 ‘선 핵개발, 후 경제재건’ 노선이다. 핵개발을 완성한 후에는 ‘비정상적인’ 방법을 통해 경제발전을 도모하겠다는 것인데, 어떻게 이런 집단과 정상적인 협상을 통해 기대했던 결과(비핵화)를 얻어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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