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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해방 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일제 식민지 시대에 대한 평가와 논란은 우리 사회내에서 ‘뜨거운 감자’로 자리하고 있다.
낙성대연구소를 중심으로 제기해온 일제 식민지 시기가 조선의 경제발전과 근대화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는 국내 역사학자들 사이에 치열한 논쟁거리다. 그러나 역사학계에서 뜨거운 감자가 된 식민지 근대화론은 정작 역사학계에서 제대로 토론조차 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언론을 통한 이전투구만 횡행한다.
일제시대 광범위한 사료와 각종 통계를 접목해 정리된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해 민족주의 역사학계는 친일이니 민족문제에 대한 사대적 접근이라는 비난만 퍼부을 뿐 뚜렷한 반론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이처럼 역사학계의 쟁점이 된 식민지 근대화론을 두고 그 당사자와 대학생들이 마주 앉았다. 이영훈 서울대 교수와 5인의 대학생들은 일제 식민지 시기 조선인들의 경제 활동 동향과 당시 상황을 재조명하면서 일제 식민지 시기가 조선의 경제와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에 대한 대담을 펼쳤다.
이 교수는 일본의 쌀 수탈론에 대해 일본의 쌀 값이 조선 쌀 값보다 높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조선에서 일본으로 쌀이 수출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 과정에서 운송·유통망이 형성돼 조선 지주들은 이익을 얻었으며, 이를 통해 축적된 자본이 금융업·상업·광산업·산업에 투자된면서 조선 근대화에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대담에 참여한 대학생들은 이영훈 교수의 설명에 수긍하면서도 “소작농이나 빈민층들은 조선에서 쌀이 수출됐다고 삶의 질이 나아지지 않았다”면서 오히려 식민지기는 경제적 신분 계층화를 심화시킨 시기이지 않냐고 반문했다.
이에 대해 이 교수는 당시 경제 성장의 혜택이 저소득층까지 확대되지는 않았지만 조선인 상업자본의 성장, 중인계층의 경제적 성장, 취학 아동 숫자 증가, 유학생 숫자 증가등의 통계를 제시하며 근대적 사회 발전의 토대가 마련됐다고 주장했다.
이날 대담에서는 ‘친일파’의 정의에 대해서도 치열한 토론이 벌어졌다. 이 교수는 “현시대에 친일파를 처벌하는 올바른 잣대가 있을 수 있는가”라면서 ‘마녀사냥식’ 과거사 평가에 회의를 나타냈고, 대학생들은 “당시 친일행위를 ‘어쩔 수 없었던 상황’이라고 치부하는 건 면죄부를 주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반박했다.
이에 대해 이 교수는 “(조선인들이 스스로) 실력양성을 해야만 국제적인 기회가 올 때 독립을 할 수 있다는 마음에 일본인들에게 협력, 배운 사람이 많다. 배우는 입장에서 협력은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지금의 관점에서 식민지 시대 사람들을 섣불리 재단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 교수는 마지막으로 일제 식민지 시대가 “억압과 차별로 인해 불행했던 역사라는 것은 사실”이라며 “제국주의의 지배가 안고 있는 모순에 대해 비판의 고삐를 늦춰서는 안된다”고 지적했다.
다만 “그 시대에 일본을 통해서 서구 근대문명이 이식되고 정착됐다는 점은 알아야한다”면서 “일제가 조선에 이식한 근대 문명은 20세기 인류가 공유한 선진적 문명의 자신이다. 그래서 나는 일제시대의 역사를 근대문명의 수용과 발전이라는 큰 관점에서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이영훈 교수와 대학생 참가자들과의 대담 요지]
김초롱 : 이 교수님은 일본인들이 조선인들의 곡물을 ‘수탈’이 아닌 ‘수입’을 해 갔다고 주장하셨다. 조선인들이 일본에 수출을 했다면 이득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수출이 있었다면 소작농들의 생활은 개선됐어야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알고 있기로는 소작농의 삶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이영훈 교수(이하 교수) : 그렇다. 농촌의 저소득층, 소작농들의 생활수준까지 개선됐다고 보기 어렵다. 그런 정도의 큰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조선후기 종두법(천연두 예방 백신)의 도입으로 일제 식민지 시기까지 조선의 인구는 8백 만명 정도가 늘어났다. 이에 비해 토지 증가는 5~10% 수준에 머물렀다. 인구는 많아지고 토지는 없으니, 소작농이 자연히 늘어나게 됐다. 때문에 농촌 소작농·빈농층의 빈곤은 1950~1960년대까지 큰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식민지 시기 조선에서 쌀 수출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일본의 쌀값이 높으니까 자연스럽게 수출이 이뤄진 것이다. 운송비용을 포함해도 상인들이 이익을 취할 수 있으니, 수출을 하는 것이다. 이 이익은 소지주들에게 돌아가고 이들이 다시 은행·광산·공업 등 여러 산업에 투자를 해 조선의 발전을 이끌었다. 때문에 식민지 시기 두드러진 발전을 했다고 평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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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 : 물론 일제는 조선의 공업화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았고 조선을 시장과 식량 공급원으로만 봤다. 이러한 일제의 정책 하에서는 조선은 농업국가로 지속될 수밖에 없었다. 불평등 종속구도가 계속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물론 이 같은 일본의 정책으로 지주계급은 번창한다. 하지만 1929년 세계 대공황이 닥치면서 일본 농민들이 조선 쌀 수입 반대운동을 펼친다.
일본 쌀의 가격 경쟁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농민들이 고사 위기에 처한 것이다. 이에 일본 정부도 조선 쌀을 수입하면서 정치적 부담을 갖게 됐다. 그러다가 1931년,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면서 한반도를 식량기지가 아닌 일본 제국권 내의 군수병참기지로서 한반도를 육성해야겠다는 정책 전환에 이른다.
일제는 이때부터 소작농을 비롯한 농민을 육성하고 지주를 억압하는 정책을 펼친다. 대규모 전쟁을 위해서는 통합이 필요하고 소수의 지주들을 위해 다수의 농민들을 버려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일제는 지주들에게 토지를 팔라고 강요하고, 압박을 통해 자작농을 육성한다. 이렇게 지주제가 쇠퇴한 것이다.
황인혜 : 일제가 우리나라를 식민지 삼으면서 우리 경제를 어느 정도 발전시킨 점은 일부 있다. 하지만 그것이 일제의 침략을 정당화시키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은 어떻게 평가돼야 하나.
교수 : 우리의 식민지 역사에 대해 ‘남 탓’을 하기보다는 진정한 교훈을 찾는데 주력해야 할 것이다. 당시 조선은 자주 국방의 의지가 없었다. 고종은 조선인에게 근대적 국민으로 권리를 부여해 국민 개병제를 실시하는 등의 자주국방에 대한 개혁을 단행하지 않았다. 수도 서울만이라도 필사적으로 사수하겠다는 의지도 없었다. 나라를 지키겠다는 필사적인 사명으로 국가를 경영했으면 조선이 일본에 넘어갔겠는가. 조선 지배층들의 잘못된 판단에 의해 나라가 식민지가 된 것이다.
김승재 : 교수님은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이라는 것은 결국 일본이 근대적인 조세제도를 확충, 쉽게 조선에서 세금을 거두기 위한 것이다. 조선을 위해서 진행했던 사업이 아니다. 이를 통해 조선이 근대화 시스템의 영향을 받은 것인데 조선인들에게는 이롭지 않은 일이었을 것 같은데.
교수 : 일제는 자신들이 부속영토로 장악한 한반도 영토에 토지, 산림 자원이 얼마나 있는지 조사가 필요했다. 토지조사 결과의 경우, 예상보다 40~50% 정도 경지가 많았다. 때문에 당초 정했던 세율보다 낮춰서 조세를 거뒀다. 또한 일본 농민에게는 10%의 조세를 거뒀는데 조선 농민은 3~4%의 조세를 거뒀다. 일제는 조선인들에게 조세를 많이 거두면 반발이 일어날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토지조사사업은 수탈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이승수 : 일제 식민지 시기, 경제적 성장을 이룬 것은 식민지 전기에 지나지 않는다. 일본이 확전을 하면서 조선에 대한 수탈이 심해졌는데 시기를 구분해서 평가하는 것이 정확하지 않나.
교수 : 일제 식민지 시기의 극단적인 궁핍은 1941년부터 시작됐다. 일제가 진주만 폭격을 하면서 법적인 권력을 발동해 조선의 식량을 강제 수매하기 시작했다. 쌀·보리·놋그릇에 이르는 모든 공산품과 소비품을 시장가격에 준하여 강제로 사들인 것이다.
또한 시장을 폐쇄하고 배급제로 전환하면서 농민들에게 수매대금으로 준 자금을 강제로 저금시킨다. 극단적인 궁핍상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 시기에 형성된 극단적인 억압과 빈곤이 식민지 말기 4년간 지속됐다. 이 상황이 식민지 전 기간의 생활상이라고 파악하는 경향이 크다.
김형주 : 친일파 문제에 대해서 말하겠다. 교수님은 저서 ‘대한민국 이야기’에서 “그들은 그들의 협력으로 그들의 민족이 제국과 같은 선진문명으로 발전해갈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래서 자발적으로 협력했던 것이지요”라고 친일파를 평가했다. 친일파들을 너무 미화시키는 것 아닌가.
교수 : 해방 후 60년이 지났는데도 친일파 문제가 계속 거론되고 있다. 이것은 과거문제가 아니라 현재의 문제다. 해방이후 반민특위가 2백여명을 처벌했다. 그것이 부족하다고 지난 정부 때 4천여명을 친일파로 규정, 명단을 작성했다. 때문에 이는 현대적인 사건이다.
해방 이후 친일파를 처리하지 못해 ‘오늘날 한국의 모순이 남아있다’ ‘우리 역사는 친일파가 지배한 역사다’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해방 이후 농지개혁으로 지주제가 없어졌고 그 이후 공부한 사람들이 사회에 영향력을 미치는 학력화 사회가 됐다. 일제의 잔재가 한국을 지배하고 있다는 생각은 옳지 않다.
또한 일제의 강요에 의해 친일 행위를 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당시 상황을 이해하고, 허용하는 자세를 가져야한다. 물론, 독립운동가들을 체포·고문하는 등 적극적으로 친일행각을 벌인 사람들을 허용하자는 말은 아니다.
김승재 : 당시 상황을 이해하고 친일파들을 허용하자는 것은 면죄부를 주자는 얘긴가. 그 사람들에게 면죄부를 줘야한다는 역사 서술은 문제가 있는 것 같다.
교수 : 하지만 조선인 스스로가 실력 양성을 해야만 국제적인 기회가 주어졌을 때 독립할 수 있을 것이란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배우기 위해 일본에 협력한 것이다. 배우는 입장에서 협력을 하지 않으면 곤란하지 않은가. 그들은 일제 밑에서 실력을 키운 것이다. 그렇게 불가피하게 일본에 협력한 사람들을 친일파라고 재단하는 것은 곤란하다.
이승수 : 그렇다면 일제 강점기의 역사적 의의는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가.
교수 : 그 시대가 일제의 억압과 차별로 인해 불행했던 역사라는 것은 사실이다. 제국주의의 지배가 안고 있는 모순에 대해 비판의 고삐를 늦춰서는 안된다. 다만 그 시대에 일본을 통해서 서구 근대문명이 이식되고 정착됐다는 점은 알아야한다.
일제가 조선에 이식한 근대 문명은 서구에서 발생해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지 ‘일본의 것’이 아니었다. (근대문명은) 20세기 인류가 공유한 선진적 문명의 자신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일제시대의 역사를 근대문명의 수용과 발전이라는 큰 관점에서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일제가 심어준 근대문명이 아니라 우리 민족이 스스로 학습하고 실천한 근대문명을 수용하는 시기였다.
▶대학생 대담 참여자
김승재(연세대 신문방송학), 김형주(연세대 신문방송학), 김초롱(경희대 언론정보학), 이승수 (연세대 신문방송학), 황인혜(동국대 신문방송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