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아사 후 北 주민들 “자살자가 왜 반역자냐?”

30일 새벽 인기 연예인 박용하(33) 씨가 스스로 목숨을 끓었다. 박 씨를 사랑하던 가족들과 많은 한류 팬들이 충격에 휩싸인 모습이다. 


박 씨의 자살에 대해 언론과 인터넷 사이트를 중심으로 추도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 자살 이유야 어찌됐든 뛰어난 재능에도 젊은 나이에 생을 접은 박 씨를 안타까워 하는 마음이 먼저이기 때문이다.   


북한에서 자살은 금지돼 있다. 특히 유명인은 더욱 그렇다. 북한 고위층 내에서 개방파로 분류된 김달현 전 총리의 자살 정도가 알려져 있다. 자살은 공화국과 김정일 장군님에 대한 배신으로 간주돼 가족에게 피해가 가게 된다. 정치적 사건으로 비화될 수 있다.  

자살에도 정치적인 동기를 살피는 북한 내부 분위기를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지만, 장군복을 타고난 인민이 자살한다는 것은 이를 배반하는 행위에 해당한다. 당과 조국, 수령과 인민을 위해 바친 목숨은 ‘혁명가의 고귀한 삶’이지만 자살은 ‘자신의 정치적 생명을 더럽히고 키워준 당과 수령의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배신행위’라고 매도된다.


때문에 북한 주민들은 아무리 어렵고 고통스러워도 자살을 선택하기 어렵다. 자살자는 반역자로, 자살자 가족은 반역자 집안으로 몰아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매장한다. 이와 같은 기조는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전까지 유지됐다.


1990년대 중엽 평안북도  신의주시에서는 압록강여관 담당 보위지도원의 자살사건이 일어났다. 그는 무역일꾼들과 손잡고 여관을 드나드는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해 판 크게 돈벌이를 벌이다가 들통나 시보위부에 억류되었다.


당시 시보위부는 이들이 중국을 통해 한국 첩보기관과 내통하지 않는지를 조사했다. 보위지도원은 혹독한 고문으로 자신이 알고 있는 비밀이 드러나면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게 될 것이 두려워 스스로 혀를 깨물어 목숨을 끊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그의 아내와 자식들은 학교와 주변 사람들로부터 ‘반역자 집안’이라고 손가락질을 받게 되었고 얼마 후 신의주땅에서 자취를 감춰버렸다.


또 자살자에 대한 처분도 출신 성분에 따라 영향을 받는다.


1990년 대 초, 평안북도 선천군에 위치했던 4.25훈련소 산하 군의소에서는 군의관 이 모씨의 아내가 자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들 부부는 양가가 모두 빨찌산 줄기였다. 


양 가 부모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결혼’하게 된 이들 부부는 신혼초부터 비정상적인 결혼생활을 진행했다. 남편 이 씨는 매일이다시피 아내 유 씨에게 ‘다른 남자와 좋아한다’고 생트집을 잡아 손찌검하고 그녀의 옷을 갈기 갈기 찢어놓곤 했다. 유 씨는 남편의 폭행에 견디다 못해 부모에게 알렸으나 그녀의 부모들은 체면과 관습 때문에 딸이 결혼생활을 계속할 것을 강요했다.


이 씨의 폭행에 더는 견딜 수 없게 된 유씨는 얼마 후 ‘디아제판’(진정제) 50알을 복용하고 자살했다. 양쪽 집안은 그녀의 자살을 병사로 위조했고 유 씨를 자살하게 만든 당사자 이 씨는 외려 출세 길에 오르게 되었다. 이는 자살자기록이 문건에 남게 되면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매장되는 것은 물론 출세길도 막히게 되기때문이었다.


이 사건의 내막을 알고 있던 주변 사람들은 유 씨를 동정하면서도 ‘자살이 어떻게 병사로 되는지 참 어이가 없다’고 말했다. 또 아내의 자살 후 다른 군의소 과장으로 승급된 이 씨에 대해서는 ‘집안 좋은 사람은 부인을 죽게 해도 출세한다’고 노골적인 비난을 터뜨리기도 했다.


그러나 90년대 중엽을 넘어서면서 어려워진 형편으로 자살자들이 늘어나자 이들에 대한 사회적편견과 몰이해들이 점차 종식되기 시작했다. 이는 국가적인 식량공급이 끊기면서 국가에 대한 불신임과 취약해진 생활형편에 따라 자연발생적으로 이뤄진 주민들의 심리적인 변화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자살자 수가 가장 많은 연령대는 60세를 전후한 고령들이다.  일부 독거노인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자녀들이 있다 해도 어려운 형편을 핑게삼아 부모들을 돌봐주지 않아 자살하는 비율이 높았다. 또 먹고 살수 있는 가정들에서도 늙은 부모들이 방치 되자 이를 비관해 자살하는 이들도 생겼다.


평안남도 개천시에서는 60대 초반의 한 노인이 목매어 죽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에게는 다섯아들이 있었으나 저마다 늙은 노모를 모시려 하지 않았다. 실망한 그는 ‘손끝이 닳아질 정도로 열심히 일해 다섯 자식을 키웠지만 늘그막에 모시겠다는 자식이 없으니 자살할 수밖에 없다’는 유언을 남기고 목숨을 끊었다.


사람들은 ‘얼마나 힘들었으면 목숨을 끊었겠는가’며 그의 자식들을 ‘부모도 모르는 후레자식들’이라고 욕하면서 자살자를 동정했다. 그러나 예전과 달리 그에 대해 ‘자식들의 앞길을 망치려 한다’고 비웃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이와 유사한 사건들이 늘어나면서 일부 늙은이들 속에서는 자식도 필요없고 벌어서 잘 먹고 잘 살다가 더는 능력이 닿지 않으면 스스로 약을 먹고 죽으면 행복하게 죽는 것이라는 인식들이 자리잡게 되었다.


지금도 자살자들을 반역자, 배신자로 매도하려는 북한 당국의 선전은 여전하다. 그러나 북한 주민들은 더는 이들 자살자들에게 함부로 정치적감투를 씌워 사회적으로 매장시키고 외면하는 등의 행동을 하지 않는다. 


지난 해 11.30 화폐개혁 후 북한에서는 또다시 어려워지는 경제사정으로 인해 자살자수가 늘어나고 있지만 이들에 대한 북한 주민들의 평가와 견해는 더는 정치적이거나 편견적이지 않다.


북한 주민들의 이와 같은 변화는 당국의 거짓선전과 위선에 더는 속지 않으려는, 북한의 변해가는 민심을 보여주는 실례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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