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식량계획(WFP)를 통한 우리 정부의 대북 쌀 지원이 답보 상태에 머물고 있다. 정부는 지난 6월 북한의 식량난이 심각한 수준이라는 국제기구의 보고서 발표 이후 동포애와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WFP를 통해 국내산 쌀 5만 톤을 북한에 지원하기로 결정하고, 공여를 위한 내부 행정절차를 진행해 왔다.
그러나 그 후 7월 북측이 한미연합훈련을 거론해 우리 정부의 쌀 지원 거부 의사를 보이면서 대북 식량지원과 관련한 논의는 현재까지 진척되지 않고 있다. 정부는 여전히 WFP를 통한 북측의 공식적인 입장을 확인해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지만, 9월 내 쌀 지원을 완료하겠다는 당초 계획을 이행하기에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해 보인다는 관측도 나온다.
북한이 우리 정부의 쌀 지원을 거부하고 있는 배경과 관련해서는 현재 여러 가지 추측들이 나오고 있다. 실제 북한의 식량 사정이 국제기구 보고서를 통해 알려진 부분과 차이가 있는 것 아니냐, 표면으로 내세운 거부 이유와 달리 내부적으로는 다른 배경이 있는 것 아니냐는 합리적인 의심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실제 본보와 접촉한 북한 내부 소식통들은 “작황이 좋지 않은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시장에 쌀이 없는 것은 아니다”, “1990년대 고난의 행군 시기 때처럼 굶어 죽는 사람들은 없다”고 말하고 있다. 북한의 식량난은 정말 심각한 수준일까.
◆굶어죽는 사람 없다는데…식량난은 통계 허수?
실제로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WFP와 FAO의 보고서는 북한 당국이 제공한 데이터를 근거로 하고 있기 때문에 근본적인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북한 당국이 국제사회의 식량 지원을 유도하기 위해 실제 경작지 면적은 줄이고, 인구수는 늘려 수요량을 부풀렸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국책연구기관의 한 전문가는 “WFP 등 국제기구의 북한 식량 보고서에 대한 신빙성 문제는 예전부터 있었다”며 “북한에 식량이 부족한 것은 객관적인 사실로 보이지만, 국제기구 보고서대로 부족량이 갑자기 확 늘었다면 시장에서 물가가 오르는 현상이 나타났어야 하는데 아직까지 그런 점은 목격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일각에서는 이번 국제기구 보고서에 개인 뙈기밭(소토지)과 15도 이상 경사지에서의 곡물 생산량 통계가 반영되지 않은 점도 문제점으로 거론되고 있다. 뙈기밭이나 경사지에서의 비공식 재배를 통해 생산되는 작물이 북한의 식량사정을 변화시킬 만큼의 양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앞선 보고서에 반영됐던 통계가 이번에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포함되지 않은 점은 의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실제 WFP·FAO는 보고서에서 “경사지에 대한 공식 통계는 없었는데, 북한 당국에 의해 공식적으로 제외되기 때문”이라며 이를 보고서가 갖는 한계점으로 언급했다. 아울러 보고서는 “시장에 접근하고 시장 관련 데이터를 획득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현장 방문 기간 동안 역시 농산물 시장을 찾지 못했다”는 점도 한계로 제시했다.
폐쇄적인 북한 사회 특성상 국제기구의 조사원들이 자유롭게 실태 조사에 나서기 어려울 것이라는 의견은 꾸준히 제기돼왔다. 철저하게 북한 당국이 허용한 장소에서, 목적에 맞게 준비된 주민들과의 인터뷰로 얻어낸 결과물은 신뢰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이와 관련해 평양의 한 고위급 간부는 본보에 “웬만한 유엔 주재원이나 WFP 직원들 대부분은 포섭을 당했다고 봐도 된다”면서 “설령 정직한 사람이라도 포섭되는 척이라도 해야 조선에서 일할 수 있기 때문에 당국에 협조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베트남 쌀 시장에 풀려…부족한 식량 이미 충당했나
이런 상황에 한편에서는 ’이미 해외에서 식량 지원을 받고 있기 때문에 한국의 쌀 지원은 현실적으로 필요성이 떨어지는 것’이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실제 북한 관영 조선중앙통신은 지난 6월 베트남 정부가 기증한 식량이 남포항에 도착했다고 보도했다. 통신은 당시 보도에서 식량의 종류나 규모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는데, 이후 일본의 마이니치 신문은 베트남 하노이의 외교 관계자를 인용해 베트남 정부가 북한에 쌀 5000톤을 지원한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이와 관련해 함경북도 소식통은 본보에 “6월 중순이 지나 평성시장에 안남미가 나오기 시작하더니 7월 초부터 전국 시장으로 유통돼 현재 대부분의 시장에서 판매되고 있다”면서 “웰남(베트남)에서 우리나라에 지원해준 쌀이라는 것을 알 사람들은 다 안다”고 말했다.
아울러 최근에는 중국의 식량 지원 정황도 포착됐다. 앞서 본보는 지난 8월 북한 나진·선봉지역에 내린 폭우로 두만강이 범람해 원정리 일대 500여 세대의 살림집과 농경지가 침수됐으며, 홍수 피해 복구를 위해 중국에서 쌀이 대량으로 들어오고 있다는 함경북도 소식통의 전언을 보도한 바 있다.
실제로 중국산 쌀 가격은 최근 들어 하락세를 보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이와 관련해 함경북도 소식통은 “나진시장을 통해 중국쌀이 많이 들어오고 있다”면서 “9월 초만 하더라도 4000원대 초반이었는데 최근엔 3000원대 후반으로 거래되고 있다”고 말했다.
◆대북지원 움직임에 “생색내지 마라” 비난…北 ‘몽니부리기’ 여전
지난 5월 정부가 대북 식량지원을 검토하던 때 북한은 대남선전매체를 통해 “주변 환경에 얽매여 선언 이행의 근본적인 문제들을 뒷전에 밀어놓고 그 무슨 ‘계획’이니, ‘인도주의’니 하며 공허한 말치레와 생색내기나 하는 것은 북남관계의 새 역사를 써 나가려는 겨레의 지향과 염원에 대한 우롱”이라고 거칠게 비난했다.
이를 두고 신범철 아산정책연구원 안보통일센터장은 “북한은 인도적 지원을 거절하고 한국을 협상에서 배제하는 게 전략적으로 유리하다는 판단을 한 것으로 보인다”면서 “지난 협상에서 한국이 약속을 안지켰다면 그에 대한 보복조치일 수도 있고, 그게 아니라면 의도적으로 한국의 전략적 가치를 낮게 보고 활용하지 않으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현재 북한은 남북대화의 모멘텀을 살려내려는 한국 정부의 노력에 어깃장을 놓으면서 ‘근본적인 문제 해결에 나서라’고 압박하고 있다. 신 센터장은 “‘비핵화 협상에서 미국을 설득하라’는 이야긴데, 결국에는 자신들이 원하는 단계적 비핵화를 미국이 받아들이라는 요구인 셈”이라고 했다.
여전히 정부는 ‘인도주의·동포애 차원에서 대북 인도적 지원을 추진해나간다는 원칙을 견지하겠다’는 입장이지만, 북한이 한미연합훈련과 첨단무기 도입 등을 빌미로 수차례 미사일을 발사하고 때로는 원색적인 비난을 쏟아내며 ‘몽니’를 부리는 상황에서 정부의 식량지원이 현실화되긴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임수호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책임연구위원은 “일단 현재로서는 북한이 남북관계를 북미관계 이후로 돌리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보이고 있다”면서 “이런 상황에서 북한이 전향적으로 한국의 대북 식량지원을 수용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