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북 식량지원 둘러싼 한반도 외교방정식

북핵문제의 급진전 조짐과 맞물려 한반도 정세가 미묘하게 전개되면서 대북 식량지원 문제가 핵심 쟁점으로 부각하고 있다.

이제 막 출범한 한국의 이명박 정부, 임기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미국의 부시 행정부, 8월 베이징 올림픽을 앞둔 중국, 일본인 납치 문제에 천착하는 일본 등의 자체 정세 판단이 복잡하게 얽힌 가운데 식량난을 겪고 있는 북한에 대한 식량지원 문제가 북핵 협상은 물론 남북관계와 한.미관계 등 국제정치 지형을 움직일 변수가 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정부 출범 전부터 ‘상호주의’를 내세우며 북한과 새로운 관계 설정을 추진했던 이명박 정부로서는 북한과의 협상에 적극적인 미국 정부와 호흡을 맞추기 위해 고심하는 흔적이 역력하다.

대북 식량지원과 관련, `북한 측의 요청이 있을 경우 가능하다’는 한국 정부가 이 문제를 계기로 적어도 부시 행정부 임기가 완료될 때까지의 대북 외교안보 정책 방향을 취사선택해야 하는 과제를 안게된 것이다.

◇ 북핵과 사실상 ‘연계’된 식량지원 = 부시 행정부는 수일 내로 대북 식량지원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이를 위해 이미 이달초 미국 정부의 대표단이 북한을 방문했다. 미국 대표단은 북한의 식량 부족상태에 대한 현지 상황을 살펴보고 대규모 식량 지원을 했을 경우 지원된 식량이 어떤 루트로 북한 주민에 전달될 수 있을 지에 대해 점검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른바 모니터링 메커니즘을 확인한 것이다.

숀 매코맥 국무부 대변인은 13일 미국 정부가 현재 구체적인 대북 식량지원계획을 조율하고 있으며 수일 내로 ‘모종의 발표’가 있을 것이라고 밝히면서 “대체로 우리가 보기에 보다 개선된 식량 배포 모니터링 메커니즘을 도출해낼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미국 정부는 북한의 구체적인 식량 수요와 이를 충당할 수 있는 미국의 지원 능력, 만족스러운 모니터링 메커니즘 구축 문제 등을 면밀히 검토하고 있다고 매코맥 대변인은 덧붙였다.

이와 관련, 일각에서는 미국이 모니터링을 위해 북한 내부 사정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도록 한국말을 모르는 요원 20여명을 파견하기로 북.미가 합의했다는 얘기도 흘러나온다.

북한에 대략 50만t 규모의 식량을 지원하려는 미국의 움직임은 부시 대통령의 확고한 대북 협상의지와 연계돼 있다는 게 외교가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데이너 페리노 백악관 대변인이 같은 날 브리핑에서 “부시 대통령은 수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는 북한의 인권상황에 대해 거듭해서 우려를 표명해 왔다”면서 “충분한 영양공급이 없으면 일상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일과 공부를 하기 힘들다는 점에서 특히 굶주리고 있는 아동들에 대해 가슴 아파하고 있다”고 말했다.

페리노 대변인은 나아가 “부시 대통령은 북한 정부가 지원된 식량을 주민에게 분배하는 대신 군대로 빼돌리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전했다. 지원 식량이 군대로 전용될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식량지원을 하기로 한 것이 부시 대통령의 `결단’에 따른 것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는 물론 북한이 1만8천쪽에 달하는 북핵 자료를 제공하는 등 이른바 핵 신고 협의에서 적극성을 보이고 있는 것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북한의 적극적 태도로 볼 때 조만간 6자회담이 재개돼 비핵화 2단계(불능화와 핵신고) 조치가 마무리되고 신고 내용을 검증하고 나아가 핵폐기라는 비핵화 3단계로 진입하는 국면까지는 순조롭게 진행될 것으로 전망된다.

만일 이런 전망이 현실화되면 이는 부시 대통령이 취임한 이후 폐기된 90년대 (북핵)제네바 체제보다 진일보한 상태로 들어서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물론 2003년 초 제네바 체제 폐기 이후 북한이 무기급 플루토늄을 추가 생산하긴 했지만 이번 기회에 추가 생산된 양은 물론 1994년 제네바 합의 이전에 생산된 플루토늄을 모두 북한 수중에서 건네받을 수 있다면 이는 매우 큰 진전으로 인식될 수 있다는게 북핵 외교가의 평가다.

외교 소식통은 “임기가 얼마 남지 않은 부시 행정부가 점점 수렁으로 빠져드는 이라크 문제 등 중동 사태와 달리 가시적인 성과를 거둘 수 있는 분야로 북핵을 선택했음을 알 수 있다”면서 “대북 식량 지원도 북핵 문제와 직접적 관련이 없다고는 하지만 사실상 한 묶음에서 다뤄지고 있다고 봐야한다”고 말했다.

미국은 50만t 규모의 식량지원을 할 경우 비정부기구(NGO)를 통하거나 세계식량기구(WFP)를 통하는 방안을 택할 것으로 알려졌다.

6자회담 의장국인 중국의 경우 핵 신고 문제로 지난해 말부터 협상이 교착된 상황에서 식량이나 에너지 지원 등을 유효한 카드로 활용해왔다는게 외교가의 시각이다.

결국 인도주의적 문제라고 지칭되는 대북 식량지원이 핵 문제, 나아가 외교 업적을 바라는 미국, 베이징 올림픽의 성공을 염원하는 중국의 국내 정치 등과 미묘하게 얽히는 국면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 고심하는 한국 정부 = 미국의 적극성을 확인한 한국 정부도 이제 선택을 하려는 듯하다. 하지만 이전의 논리를 앞으로의 행동과 어떻게 조화롭게 풀어나가야 하는 지를 놓고 고심하는 기색이다.

이 대통령 취임 전과 취임 직후만 하더라도 남북관계에서 대부분 ‘상호주의’라는 단어가 등장했지만 최근들어 정부 고위 당국자들의 입에서 이 단어의 사용은 극히 제한되고 있다.

게다가 이 대통령은 방미 기간에 ‘남북간 고위급 연락사무소’의 개설을 언급하기도 했다. 이 대통령의 방미 이후 한국 당국자들의 발언에서 대북 식량지원과 관련된 발언이 미묘하게 변화하는 기류를 느낄 수 있다.

일단 유명환 장관은 지난 1일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북한의 요청이 와야 인도적 지원에 나선다는 방침이 재고될 수는 없나’는 질문에 “유엔도 인도적 지원은 상대방의 요청이 있어야 된다고 정의하는 것으로 안다”고 신중한 발언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외교부 고위 당국자는 13일 워싱턴에서 미국 측과 식량 지원과 관련된 협의를 진행했다. 남북 문제로 여겨졌던 식량지원 문제에 외교부가 참여하는 양상이 연출됐다.

국제기구를 통한 대북 지원에 정부가 참여한다는 관측이 잇따라 제기되는 상황에서 통일부 당국자는 “국제기구에서 지원 요청이 있으면 예년 수준에서 지원하는 방안을 검토할 수 있다”고 말했다.

‘예년 수준’이라는 전제를 강조한 데서 보듯 통일부 측은 북한의 직접적인 요청이 없는 한 대규모 지원은 검토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어찌보면 정부 내부에 대북 식량 지원을 둘러싸고 서로 다른 기류가 존재하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정부 내부 사정에 정통한 외교 소식통은 “국제기구를 통한 예년 수준의 식량지원과 대규모 지원 문제가 따로 떨어져있는 게 아니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 정부가 북한의 식량 지원 문제에 있어 무슨 조건을 보고 결정을 내리려는 게 아니라 일단 방향은 ‘인도적 문제인 만큼 지원하는 방안을 강구하자’는 쪽으로 잡았다는 얘기이다.

문제는 이명박 정부를 상대로 통미봉남(通美封南) 전술을 구사하려는 북한이 과연 ‘지원요청’을 할 지 여부다.

정부는 남북 관계는 물론 북핵 협상의 진전, 미국의 대규모 식량 지원 등 다양한 변수를 고려, 향후 대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유명환 외교장관이 15일 기자들에게 대북 식량지원과 관련, “직접 지원하면 제일 좋은데 WFP(국제식량계획)를 통해서도 해왔다. 매년 그때 상황봐서 검토했었다”면서 “어느 것이 효과적이냐는 통일부가 주관되서 검토하고 있다”고 말한 것도 정부의 내부 기류를 말해주는 것으로 풀이된다.

청와대 핵심관계자도 이날 비록 `북측의 선지원요청’을 전제로 하기 했지만 “북한 주민들에 대한 인도적 지원 방침은 이명박 대통령이 대선후보 시절부터 계속 갖고 있던 원칙으로, 지금도 변함이 없다”면서 “여건이 되면 언제라도 대북 인도적 지원에 나설 것”이라고 밝혔다.

정부 사정을 개략적으로 정리하면 일단 정부는 미국이 대규모 지원을 하는 것을 계기로 예년의 경우를 토대로 WFP 등 국제기구를 통해 일정규모(3-5만t)의 식량지원을 독자적으로 한 뒤 북한의 대남비난 공세와 북핵 상황 진전 등 여러 상황 변화 가능성을 봐서 직접적인 대규모 식량지원 가능성을 타진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렇게 보면 대북 식량 지원 문제는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경색 국면으로 치달은 남북관계가 해빙의 길로 접어들 수 있느냐, 아니면 계속 현재의 국면을 이어갈 것인지와도 연결될 수 있다.

외교 소식통들은 “비핵.개방 3000이라는 추상적 선언을 북한에 제시한 이명박 정부의 외교안보정책은 모호성이 내포돼있다”면서 “북핵 협상은 물론 미국 정부의 대응 양태 등 주변 상황의 변화에 따라 얼마든지 한국 정부의 정책적 선택은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다”고 말했다./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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