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인도적 차원에서 해오던 대북 비료지원을 놓고 정부가 고민을 거듭하고 있는 가운데 1kg의 비료라도 절실한 북한의 영농철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정부의 움직임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정부는 ‘선(先) 회담 후(後) 지원’ 원칙을 내세우고 있지만, 인도적인 차원에서 이뤄지던 대북 지원인 만큼 먼저 지원부터 해야 한다는 반론이 곳곳에서 쏟아지면서 정책 변화를 점치는 시각도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고 있다.
◇ 지나가는 비료지원 적기 = 북한의 올해 영농 캘린더를 보면 지난 10일 황해남도에서 올해 첫 모내기를 시작한 데 이어 이 달 중순이면 본격적인 모내기철에 들어간다.
비료는 농사 과정 곳곳에서 필요하지만 먼저 모내기 직전에 밑거름이 대량으로 필요한 점을 감안하면 지금이 바로 비료 한 줌이 아쉬운 상황인 셈이다.
정동영 통일부 장관도 지난 달 28일 “비료를 뿌릴 시기가 다가왔다”고 말했다.
이런 점에서 영농 초기에 비료를 지원하기는 시기상 이미 늦은 것으로 보인다.
작년의 경우 봄철 지원량으로 복합비료 16만t, 요소비료 2만8천t, 유안비료 1만2천t 등 총 20만t을 4∼6월 배 편으로 전달했다.
그러나 이모작을 하는 곳은 주로 6월 중순이 시비(施肥) 시기다.
하지만 이 역시 정부가 지원을 결정하더라도 육로 대신 예년처럼 배로 수송할 경우 구매 및 선적에 소요되는 기간이 빠르면 수 주에서 보통 한 달은 족히 걸린다는 점에서 적기에 가기는 힘들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 권태진 박사는 “재고가 있겠지만 많이 모자랄 것”이라면서 “특히 밑거름으로 주로 쓰는 복합비료의 경우 북한내 생산공장이 없어 사정이 좋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은 작년에도 저체 생산량이 전년보다 75% 증가하기는 했지만 전체 사용량의 72%를 남측을 비롯한 외부의 지원에 의존했다.
북한 농업성 자료에 따르면 작년에 성분 무게를 기준으로 모두 23만173t을 사용했지만 이 중 자체 생산량은 5만6천524t에 그쳤고 남측 지원량이 13만7천220t이었다.
이는 외부 지원 없이는 비료의 자급자족이 어렵다는 점을 그대로 보여준다.
◇ 고개 드는 선 지원 여론 = 최근들어 당국간 회담을 전제조건으로 내세우지 말고 하루빨리 인도적 차원의 지원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의견이 잇따르고 있다.
대북 지원단체들로 구성된 대북협력 민간단체협의회는 지난 6일 기자회견에서 “비료지원은 북한의 식량 생산과 직결된다는 점에서 주민의 생존과 뗄 수 없는 인도적 차원의 문제”라며 정부의 대북 비료지원을 촉구하고 나섰다.
이 단체는 “북한의 식량 수요량은 645만t인 데 비해 공급량은 480만t으로 약 16 5만t이 부족한 실정”이라며 “현지 농장의 파종이 끝나가는 시점에서 더 이상 비료지 원을 늦출 수 없다”고 강조했다.
여권에서는 정부가 나서지 못한다면 적십자 라인을 통해 일부라도 먼저 보내는 방안이 검토돼야 하는 게 아니냐는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다.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도 12일 한신대 강연에서 “비료와 식량지원은 남한에 대해 불신과 적대감을 갖고 있는 북한 주민의 민심을 감사와 동경으로 바꾸는 데 상당한 기여를 하고 있다”면서 “이를 핵과 분리해 다룰 필요가 있다”고 충고했다.
또 열린우리당 내부에서는 물론이고, 한나라당 정형근(鄭亨根) 의원도 이런 흐름에 가세했다.
그는 12일 홈페이지를 통해 “김대중 정권 이래 인도적 지원과 정치.군사적 협상은 별개로 한다는 게 정부의 기본입장이었다”고 전제한 뒤 “비료지원의 전제조건 때문에 남북관계가 더 꼬이고 있다”며 예년 수준의 비료를 즉각적으로 지원할 것을 촉구해 눈길을 끌었다.
◇ 남북 움직임에 이목 집중 = 이처럼 신속한 대북 지료지원을 요구하는 여론이 불붙기 시작한 상황인데도 정부의 입장에는 아직 큰 변화가 없어 보인다.
이봉조(李鳳朝) 통일부 차관은 12일 브리핑에서 “여러가지로 비료지원이 필요하다는 의견과 여론이 있는 것을 잘 알고 있다”면서 “그러나 당국간 협의가 있어야 지원할 수 있다는 정부 입장에는 변화가 없다”고 설명했다.
이 설명에는 대북 관계에서 상호존중과 합의된 약속은 반드시 이행하는 원칙과 신뢰를 지켜가는 관계를 지향하겠다는 정부의 입장이 깔려 있다.
이런 가운에 정부가 북관대첩비를 일본에서 돌려받기 위해 12일 북측에 당국간 회담을 제의한 것은 눈에 띄는 움직임이다.
작년 7월 이후 10개월간 남북 당국간 대화가 중단된 상황에서 이번 회담이 우리측 안대로 성사될 경우 문화재청장이 참석하는 고위급 회담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북관대첩비가 연결고리가 돼 향후 비료지원 문제를 포함한 현안을 협의하는 공식 회담까지 성사되는 긍정적인 흐름으로 이어질 기대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북한의 시급한 비료상황에 따라 국내에서 선 지원 여론이 조금씩 자리를 넓혀가고 있는 점은 정부 또는 적십자의 지원 시기가 앞당겨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게 만들고 있는 만큼 정부의 움직임이 주목된다./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