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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DA 문제 해결이 임박하여 이미 2개월이나 지연된 2․13합의 초기 이행조치를 김정일 정권이 실행에 옮길지 여부에 관심이 쏟아지고 있다.
북한은 이미 BDA 문제가 해결되면 영변의 핵시설 폐쇄를 위한 조치를 이행할 것이라고 공언하였고, 이번에 미국의 연방준비은행과 러시아 중앙은행이 개입한 “송금작전”에 북한 측도 이해를 표시한 것으로 알려져 초기이행 조치는 무난히 이루어질 것이라는 관측이 대세다.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북한이 자신들의 계좌로부터 제3의 은행에로의 자유로운 이체를 요구할 경우 BDA 문제는 원점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초기이행조치 이후 북한이 핵시설과 핵프로그램을 신고할 때 고농축우라늄(HEU) 프로그램의 존재여부에 대하여는 미국과 북한의 주장이 180도 다른 만큼, 어떤 낙관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결렬 이외에’ 어떤 방식으로 이 문제가 귀결되든 미국과 북한 중 어느 한 쪽은 지난 5년 동안 거짓말을 하였거나 과장을 하였다는 결론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북한이 HEU 프로그램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미 한국 쪽의 몇몇 인사들은 미국이 우라늄 문제를 과대포장하였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만일 미국이 HEU에 대한 북한의 주장을 얼마간이라도 받아들인다면, 북핵문제를 둘러싼 지난 5년의 상황은 미국의 완전한 실책으로 결론날 수밖에 없다.
채찍 들려면 실제로 명줄 쥐어야 가능
그렇다면 왜 이렇게 북한과의 협상은 힘든 것일까? 여기서 한국, 미국 등의 대북정책의 논리적 구조에 대하여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북한과의 협상의 필요성은 한국과 미국 등이 북한에 ‘무엇인가 요구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요구는 여러가지 방식으로 발생할 수 있고 또 대부분 정당한 것이다. 예를 들어 ‘납북자와 국군포로 송환’에 대한 한국의 요구, 일본의 ‘납치자 문제의 완전한 해결’ 요구, 미국의 ‘북핵 폐기’에 대한 요구는 인도주의적 관점에서나, 북한이 약속한 한반도 비핵화라는 관점에서 완전히 정당한 것이다.
이제 북한 측에 무엇인가 요구할 것이 생겼으니 그 요구를 관철할 수단을 강구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때 ‘당근과 채찍’, 즉 ‘회유와 강압’이라는 전통적 수단이 고려의 대상이 된다. 제기된 요구가 정당하다는 점에서 당연히 북한이 ‘무상으로’ 들어주어야 하나, 들어주지 않을 경우 채찍이라는 수단을 쓰는 것이 정상이지만, 현실은 요구를 관철시킬 만큼 북한 정권에게 강한 아픔을 주는 채찍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2002년 미국이 북핵문제의 해결을 놓고 협상을 통해 ‘못된 짓’에 보상을 주기보다는 북한정권교체를 목표로 해야 한다는 강경파와 협상을 선호하는 협상파가 지루한 줄다리기를 하다 결국 협상파가 주도권을 잡은 것은 강경파가 의도했던 6자회담에서 북한의 외교적 고립(5:1)이 도저히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6자회담에서 북한이 핵실험을 하여도 한국과 중국은 실제로 북한에 채찍을 들지 않았다. 다만 드는 시늉만을 하였을 뿐이다. 즉 강압은 강압이 가능한 맥락에서, 상대방의 명줄을 쥐고 있는 자만이 할 수 있다.
채찍에서 당근으로 관철수단을 바꾸었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전혀 아니다. 요구의 종류에 따라서 정도의 차이가 있을 수 있겠지만, 일단 당근을 내밀면서 무엇인가를 요구할 경우에 북한은 절대로 한 번에 요구를 만족시켜주지 않는다. 납북자나 국군포로의 경우에는 끝없이 잘게 나누어서, 즉 여러 번의 이벤트로 바꾸어서 팔아먹는다. 북핵과 같은 경우에는 협상문안을 모호하게 한다든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를 한다든지, 아니면 합의를 해도 금방 깨버린다.
여기서 북한이 정상국가가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지만, 이런 비정상적인 행태를 통해 북한은 한국과 미국의 요구를 들어줄 것인지 여부를 모호하게 만든다. 북핵의 경우 과연 북한이 핵을 당근과 바꿀 의향이 있는지조차 불확실하다. 이런 불확실성이 북한에게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이른바 ‘벼랑 끝 전술’ ‘시간을 자기편으로 만드는 전술’이 그것이다. 즉 북한은 유리한 조건으로 협상이 타결 되어도 좋지만, 협상이 타결되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이중 전략을 항상 이 모호성에 기반하여 추구하여 왔다.
이런 상황에서는 한국과 미국 등 북한에 정당한 요구를 제기한 쪽이 오히려 딜레마(dilemma)에 빠진다. 북한에게 요구를 관철시키려 해도 여의치 않고, 그렇다고 요구를 포기할 수도 없다. 한국의 경우 햇볕정책을 천명한 좌파정권은 대북정책을 정권의 정체성과 연결시켰기 때문에 북한에 대하여 어떠한 요구도 당당하게 관철시킬 수 없는 처지에 빠졌다.
그렇다고 비판적 여론을 완전히 무시할 수도 없어 납북자․국군포로 등의 문제를 비굴한 언어로 제기하지만 대부분 북한이 던져주는 이벤트를 확대 해석․포장하여 마치 문제가 해결되고 있는 것처럼 북한을 옹호․변호까지 해야 한다. 미국의 경우에도 크게 다르지 않다. 2․13합의에 대한 비판여론에 크리스토퍼 힐은 북한의 입장을 옹호해야 하는 처지에 빠졌다.
‘게임의 규칙’에서 이기려면
정당한 요구를 제기한 쪽이 거꾸로 딜레마에 빠지고 심지어는 북한을 옹호하게 만드는 기술, 그것이 북한의 협상전략임은 분명하다. 간단히 말해 딜레마에 빠지는 쪽이 지고, 양수겸장(兩手兼將)을 부르는 쪽이 이기는 것이 대북정책이라는 ‘게임의 규칙’이다. 이 게임에서 이기려면 주의해야 할 몇 가지 사항들이 있다.
첫째, 정당한 요구의 관철 수단으로 당근과 채찍 중에 하나를 선택한다는 것은 회유나 강압 중 어느 한 쪽이 먹혀들어갈 수 있는 맥락에서만 의미가 있다. 팔겠다는 의도가 없는 한 북한핵을 아무리 큰 당근으로도 살 수는 없다. 한국과 중국이 북한을 옹호하고 북한에 대한 실질적인 제재를 할 의사가 없는 상황에서는 뾰족한 압박수단이 없는 미국이 북한을 강압하여 북한 핵을 포기시킬 수는 없다.
둘째, 당근과 채찍에 적절한 맥락과 상황이 존재하지 않을 경우, 어느 한 쪽을 선택할 수도 또 선택할 필요도 없다. 즉 선택을 북한으로 넘기는 것이 필요하다. 이때 중요한 점은 북한이 유화적으로 나와서 요구를 받아들였을 경우와, 요구를 거부하고 강경하게 대응할 경우 북한이 얻게 되는, 혹은 직면하게 될 상황을 분명하게 설정해야 한다.
바꿔 말해 북한과의 협상보다는 이미 일방적으로 결정된 선택을 제시하는 것에 그쳐야 한다. 또한 북한에게 인센티브로 주는 것은 북한의 행동에 대한 보상으로 해석될 수 없는 선에서 그쳐야 한다. 동시에 북한에게 선택의 시간을 많이 주어서는 안 되며, 선택을 번복하는 것도 용인해서는 안 된다.
셋째, 북한에게 양자택일의 선택을 요구할 경우, 우리는 양쪽 상황 모두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역으로 북한 정권에게는 어떤 경우도 만족스럽지 않은, 혹은 위협적인 상황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북한 주민들에게는 어떤 경우에도 도움이 되는 상황을 고안해야 한다. 즉 북한의 개혁․개방과 주민들에게 정신적․물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정책 모음 A와 북한주민들에게 외부세계의 정보와 문화, 김정일 정권의 폭압정치와 사치스러운 생활상을 알릴 수 있는 정책모음 B를 설정하고 북한이 유화정책을 쓸 경우 A群의 정책으로, 북한이 강경하게 나올 경우 B群의 정책으로 북한을 딜레마 상황에 빠뜨려야 한다.
이 방식의 장점은 북한정권을 압박하여 전쟁위협이나 외부로 대량살상무기 유출 가능성을 높였다는 비난을 받을 필요가 전혀 없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선택은 북한의 몫이며, ‘개혁개방을 지원’하는 A군과 ‘수령독재체제의 해체’를 목표로 하는 B군의 정책 모두 도덕적으로나 현실적으로 비난받을 소지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북한인민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항상 북한정권에게도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현재의 북한 수령독재체제의 약점을 역이용한 것이다.
예를 들어 납북자나 국군포로 송환을 요구하였을 경우 한국은 북한에게 줄 인센티브를 결정하고, 북한이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그만한 인센티브에 들어가는 비용을 북한주민에게 외부세계의 정보를 유입시키는 수단을 확보하는 데에 사용할 것임을 행동으로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즉 북한의 ‘정상화’에 필요한 일정한 비용을 어떤 방식으로 사용할지는 북한이 선택하는 것이다.
결국 대북정책의 핵심은 북한이 우리의 정당한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경우를 우리가 견딜 수 있는지 여부와, 이 경우 북한 정권이 스스로 무덤을 팔 수밖에 없도록 딜레마 상황을 유도할 수 있는지에 달려 있다. 이 점이 전통적인 ‘당근과 채찍’과는 다른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미국이 북한에게 핵을 포기하였을 경우에 줄 수 있는 큰 선물 보따리와 포기하지 않았을 경우에 맞을 엄청난 매를 제시하는 경우라도, 미국이 북한이 핵을 포기하지 않았을 경우를 정치적으로 견뎌낼 수 없다면, 미국의 당근과 채찍은 미국이 더 절박한 처지에 있다는 증거에 불과하다. 북한이 작년 10월 초에 핵실험을 한 지 불과 2달 후에 미국과 북한의 전격적인 베를린 회동과 2․13합의가 바로 이런 경우에 해당한다.
상대에 약점 잡히면 가차 없이 요구를 버려야
한국과 미국이 정치적․물리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북한의 행동이란 무력도발과 대량살상무기의 외부유출이 될 것이다. 이 경우에는 딜레마 상황까지 갈 필요도 없이 직접적인 대응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은 경우의 북한의 위협은 대량살상무기의 개발과 보유가 될 것인데, 지금까지 북한은 1994년 제네바 협약과 지난 수년간의 6자회담에도 불구하고 핵무기 개발과 보유에 성공하였다. 실제로는 1987년 영변 원자로를 70일간 가동 중지하였을 때에 북한은 이미 12Kg에서 20Kg의 플루토늄을 추출하였다는 것이 정설인 바, 당근과 채찍이라는 전통적 대응방식은 북한의 핵개발 저지에 지난 20년간 별로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였다.
북한은 6자회담에서 경수로 건설을 핵폐기의 전제로 내세운 바 있다. 이 말은 핵폐기가 빨라야 10년에서 15년이 걸린다는 것이다. 그만큼 북한이 핵문제에서 지연작전으로 나올 가능성은 크다. 어차피 걸리는 시간이라면 아무런 성과도 없이 북한에게 끌려 다니는 것보다는 북한의 핵보유를 이유로 크고 작은 B군의 정책을 시도하는 것이 봉건세습 수령독재, 선군정치, 경제원조와 적화통일 모두를 추구하는 김정일 정권에게 남은 여생에서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만드는 계기가 될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 북한과의 협상에서도 핵무기 폐기 요구 자체가 북한에게 약점으로 잡히지 않기 위해서는 – 예를 들어 부시 행정부가 빠른 외교적 성과를 갈구하고 있다는 사실은 누가 보아도 협상에서 약점으로 작용한다- 북한이 지연작전을 쓰거나 핵폐기를 회피할 때의 상황을 어떤 양보를 하더라도 피해야 하는 최악의 상황으로 보지 않을 필요가 있다.
즉 자기의 요구가 상대방에게 약점으로 잡힌다면 가차 없이 버릴 수 있어야 요구를 관철할 수 있다는, 마치 “功을 버려야 功이 자신에게 남는다”는 老子의 역설적 충고와 비슷한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