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黨) 믿고 아편농사 짓다 마을주민 모두 떼죽음

중국에서 살기 시작한지 13년째, 나는 요새도 컴퓨터만 켜면 한국 사이트에 접속한다. ‘탈북자동지회’ ‘데일리엔케이’ 사이트에서 내 고향 사람들의 이름이나 소식을 애타게 찾아보기도 한다. 나에게 너무도 소중했던 사람들, 잊지 못할 추억으로 간직된 사람들…. 그들을 생각할 때마다 한숨과 함께 눈물이 흐른다.

나는 양강도 보천군 청림리라는 곳에서 1970년대 말, 평범한 농장원 가정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오빠와 남동생 사이에 끼인 여자라 어려서부터 집안일을 도맡아 해야 했다.

내가 살던 청림리 6작업반은 리 소재지에서 20리가량 떨어진, 앞뒤로 꽉 막힌 산과 그 사이를 흐르는 작은 시냇물 사이에 자리 잡고 있었다. 1960년대 어느 날인가 김일성이 청림리에 찾아와 양을 치는 축산농장으로 만들라는 지시를 내렸지만 끝내 양은 기르지 못했다. 대신 우리 6작업반이 축산 작업반으로 지정되어 양을 좀 기르던 생각이 난다.

어렸을 때 리 당비서 아저씨에 대한 생각은 그저 무서운 사람이라는 것뿐이다. 그것은 내가 인민학교(초등학교)에 다닐 때 눈 주변이 시퍼렇게 멍든 아버지가 집에 돌아와서 리 당비서에게 맞아서 그렇게 됐다고 어머니에게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을 때부터다.

리 당비서 아저씨에 대해 좋은 말들도 많았지만 나쁜 말들도 있었던 것 같다. 그 중에 유명한 것이 회의 도중이나 작업반에 나갔을 때 맘에 안 들면 주먹부터 휘두른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아버지도 그런 이유로 한 대 맞았던 것 같았다. 그때부터 나는 리 당비서나 리 간부들을 보면 멀리서부터 범을 본 것처럼 기겁하여 달아나곤 했다.

그러던 어느 해 단오날, 작업반 젊은 사람들이 술을 마시고 크게 싸운 적이 있었다. 술 먹은 사람들이 몽둥이와 삽까지 들고 나와 치고받으며 피범벅이 되어 뒹굴었다. 악독하기로 소문난 보위지도원과 분주소(파출소) 안전원들까지 나와 싸움을 말리려 했지만 술 마신 사람들이라 어쩌지 못하고 주변에서 고래고래 소리만 질러댔다.

어디선가 리 당비서 아저씨가 나타났다. 멀리서부터 헐떡이며 달려온 그는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웃옷을 벗어던지더니 피 흘리는 사람들 한복판에 뛰어들었다. “야, 이 개새끼들 모두 다 죽어봐라!”, 범처럼 무서운 기상으로 덤비며 주먹을 날리는데 젊은이들이 맞은 족족 쓰러지는 것이었다.

상대가 리 당비서라는 것을 알게 된 싸움꾼들은 그 자리에서 몸이 굳었는지 꼼짝도 못했다. 그 틈에 분주소 안전원들과 보위지도원이 달려들어 싸운 사람들을 모두 끌고 가면서 싸움은 종료됐다. 지금도 그때의 리 당비서 아저씨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아편농장 – 그 어리석었던 환상!

내 고향인 양강도 보천군 청림리는 ‘고난의 행군’때 죽음의 한 복판에서 가장 큰 희생을 당했던 곳이다.

고난의 행군이 닥치기 직전인 1993년에 내가 살던 청림리는 통째로 ‘백도라지 농장’(아편농장)으로 전환됐다. 농장 분배가 모자라 늘 부업농사에 신경을 써야 했던 청림리 사람들에게 그 보다 반가운 소식은 없었을 것이다.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청림리가 아편농장으로 지정된 것에 대해 큰 기대를 갖고 있었다. 아편농사만 잘 되면 이젠 농장분배가 아니라 국가에서 직접 입쌀로 배급을 받게 되고, 우대공급으로 해마다 양복지 2벌과 기름, 농장 전체에 텔레비죤(TV)을 무상으로 선물해 준다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다.

그해 산골마을 밭에는 하얀 아편 꽃들이 곱게 피었다. 그리고 우리는 난생처음 협동농장 분배가 아닌 국가에서 내어주는 하얀 입쌀을 받게 되었다. 가을이 되니 아편 농사를 돕기 위해 중학생들은 물론이고 도 소재지(양강도 혜산시)에서 공부하는 대학생들과 공장 노동자들까지 총동원되어 우리 농장에 지원을 왔다. 집집마다 지원자들을 7~8명씩 들여야 했다.

1994년, 아편농사에 재미를 들인 사람들이 식량보충을 위해 짓던 부업농사를 다 집어치웠다. 아편농사만 잘 되면 잘 살 수 있다는 기대에 부푼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부업용 밭마저도 농장에 반환하고 아편을 심게 해달라고 했다.

그해 7월, 김일성이 사망하고 애도 열풍이 온 나라를 뒤덮었다. “슬픔을 힘과 용기로 바꾸어 사회주의 강성대국 건설에 더욱 분발하자!”는 구호가 여기저기 나붙었다. 가뭄과 큰물(홍수)로 온 나라가 농사를 망쳤다고 아우성이었지만 우리 마을의 아편농사는 대풍작을 이루었다.

아편이라는 식물이 생활력이 강해서인지 우리 청림리 뿐 아니라 이웃 농장들인 내곡리, 호산리와 의화리에서도 모두 아편 농사가 풍작을 이뤘다. 가을에 또다시 대학생들과 노동자들이 아편 농사를 돕기 위해 왔고, 우리 마을 사람들은 이제 곧 차려지게 될 두둑한 돈뭉치와 하사품들을 생각하며 화려한 환상에 젖어 있었다.

그때까지 사람들은 자신들 앞에 어떤 비극적 운명이 기다리는지 알지 못했다.

죽음의 행진-‘고난의 행군’

그러나 아편을 다 끌어간 그해 11월부터 국가는 농민들에 대한 배급을 중단했다. 국가배급을 믿고 아무런 농사도 짓지 않았던 사람들이 졸지에 길거리에 나앉았다. 여기저기서 굶어서 쓰러지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리 당비서 아저씨가 군당과 도당으로 식량을 얻으러 갔다는 소문만 무성하게 돌았다. 11월 말, 식량이 도착했다는 소식에 모두 배급소로 달려갔다. 굶주림 때문에 학교도 나가지 못했던 나도 배급을 준다는 소리에 엄마와 함께 배급소로 갔다.

그날 배급소에서는 2호물자(전쟁예비물자) 창고에서 가져왔다는 언 감자와 보리콩을 한 달 분씩 받을 수 있었다. 배급소에서 리 당비서 아저씨가 주민들을 향해 “자연재해로 농사를 망쳤으니 언제 식량이 들어올지 모른다. 그러니 정말 아껴 먹으라”고 호소했다.

사람들은 그때까지만 해도 불과 한 달 후 자신들의 운명에 대해 알지 못했다. 그저 막연히 그 많은 아편을 걷어갔으니 국가가 조금이라도 배급을 주겠거니 하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을 뿐이다.

그해 12월부터 군인들을 태운 수많은 자동차들이 마을로 들어오더니 앞 뒷산의 나무들을 마구 베어가기 시작했다. 중국에 나무를 팔아 군인들을 먹일 쌀을 들여온다는 것이었다.

그날 어머니와 나는 50여리가 넘는 군 장마당에 가서 집에 보관하고 있던 양복지 두 벌과 개가죽 등을 팔아 쌀을 조금 사오는 중이었다. 마을 한복판에 들어서니 피투성이가 된 이당비서가 통나무를 실은 군인들의 차를 가로막고 서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굶어죽고 있다. 나무를 베어가겠으면 쌀을 내놓아라! 쌀을 안 내놓으면 나무 한 대도 못 베인다.”

차 앞에 버티고 선 리 당비서에게 군인들이 덤벼들더니 사정없이 치고 밟았다. 마을사람들이 발을 동동 구르며 울었다. 군 안전부에서 새로 배치되어온 담당 주재원(경찰)이 달려오더니 권총을 뽑아들고 공중에 발사했다. 담당보안원의 총소리에 군인들이 기겁을 하여 뒤로 물러섰고 군관(장교) 한 놈이 무슨 종잇장을 휘둘렀다.

“자! 장군님의 명령이다. 당장 군인들이 먹어야 나라를 지킬게 아닌가? 그래, 누구야? 장군님의 명령에 삿대질 할 놈이 있으면 나와!” 장군님이라는 말 앞에 누구도 할 말을 잃었다. 그때 리 당비서 아저씨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이 통나무는 나라의 재산이고 또 우리 농장의 재산입니다. 좋습니다. 장군님의 명령이니 실어가시오. 대신 우리 농장의 통나무를 베어간다는 승인장을 가져오시오.”

군관이 품에서 군 산림경영소 ‘영수증’이란 것을 내 밀었다. 리 당비서 아저씨는 ‘영수증’을 받아 들더니 그 자리에서 찢어버렸다.

“당신들 금방 장군님이라고 하지 않았소? 이런거 말고 장군님의 수표(사인)가 있는 송장(영수증)을 가져 오시오” 리 당비서 아저씨의 당당한 기개 앞에 군관들도 군인들도 멍하니 할 말을 잃었다. 급기야 군관이라는 사람이 리 당비서 아저씨의 팔을 잡고 사정을 하더니 리 당 사무실로 끌고 들어갔다.

이렇게 체결된 것이 군인들과 청림농장 사이에 맺어진 모종의 계약이었다. 즉 ‘청림리에 와서 통나무를 실어가는 차들은 무조건 한 차당 옥수수가루 4포대(총 80kg)를 내놓을 것’, ‘나무를 베고 실어주는 인원들을 농장원들로 하며 그들의 식사를 보장할 것’ 등의 내용이었다.

이런 계약에 대해 어처구니없다고 할지 몰라도 그런 방법으로라도 얼마간 식량을 받을 수 있는 농장은 우리 농장뿐이었다. 다른 농장들은 눈을 뻔히 뜨고 나무를 다 빼앗기고 있었다. 수십 년 자란 아름드리나무들이 다 실려 가고 한 순간에 벌거벗은 산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해 겨울, 전기도 오지 않는 추운 집에서 우리 식구들은 모두 이불을 뒤집어 쓴 채 죽을 시간만을 기다렸다. 매일 아침마다 리 당비서 아저씨가 집집을 돌아다니며 문을 두드렸다. “물이라도 끓여 마셔라, 맥을 놓으면 죽는다.” 그는 군인들의 나무를 실어주는 젊은 사람들을 동원해 굶어서 쓰러진 집들에 얼마간의 나무도 실어다 주고 손수 부엌에 불도 때어 주었다.

아침마다 리 당비서 아저씨가 집집마다 들고 다니며 따뜻한 물에 풀어주던 한잔의 미숫가루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下편에서 계속됩니다.)

한순희(가명, 양강도 보천군 청림리 1995년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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