닮은꼴 ‘카다피·김정일’, 공통점과 차이점-②

북한과 리비아의 오랜 우호관계를 살펴보자. 북한은 1973년 발발한 4차 중동전쟁을 전후해 리비아와 급속히 가까워졌다. 1974년 북한은 리비아와 국교를 수립하였다. 동시에 북한은 리비아에 군사고문단 10명과 대공미사일 기술자 4명을 파견하였다. 1979년엔 공군 280명을 리비아에 파견하였다. 북한은 리비아의 트리폴리 비행장 건설을 비롯하여 각종 도시 건설 사업을 수주하면서 리비아와의 경제 관계를 강화하였다. 리비아와 북한의 밀월은 그 후에도 오랫동안 지속하였다.


그러나 북한과 리비아는 2003년 리비아가 핵개발 포기, 대량살상무기 폐기를 선언하면서부터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여기서부터 우리는 더욱 진지하게 김정일과 카다피를 비교해야 한다. 카디피와 김정일, 리비아와 북한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여기서 우리는 중대한 교훈을 얻어야 한다.


1980년대 들어 미국은 카다피 축출을 천명하였고 갈등이 극으로 치달았다. 1986년 3월 카다피는 미국의 항공모함을 공격하였고, 미 항모는 리비아의 군사기지를 공격하였다. 리비아는 같은 해 4월 베를린 디스코텍 폭탄 테러로 맞섰고, 미국은 영국 주둔 미군을 출격시켜 보복폭격을 감행하였다.


이에 카다피는 1988년 영국발 미국 팬암기 폭파테러를 감행, 탑승자 259명과 지역 주민 11명 등 270명을 사망시켰다. 이를 계기로 1992년 유엔의 경제제재가 시작되었다. 유엔의 경제제재는 리비아 석유수출을 ‘반토막’ 내었고 경제를 급격히 하락시켰다.


이처럼 극단으로 치닫던 리비아-미국 관계는 1998년 이후 변화로 돌아선다. 카다피가 팬암기 폭파를 시인하고 2명의 범인을 10년 만에 인도하고, 유족들에게 보상하겠다고 서명하자 유엔은 리비아에 대한 경제제재를 풀었다.


얼마 후 두 번째 변곡점이 왔다. 2003년 카다피는 핵개발 포기를 선언하고 대량살상무기 폐기를 공개적으로 천명하였다. 리비아와 미국 및 서방과의 관계는 급진전하였다. 유럽으로 전량 석유를 수출한 리비아는 세계 7위의 석유보유국답게 빠르게 성장하였고 오늘날 국민소득 1만8천 달러를 넘어섰다. 


카다피는 이렇듯 미국 및 서방과의 갈등에 종지부를 찍고 과감히 경제를 살리는 선택을 했다. 카다피의 이 같은 선택은 강경한 ‘일전(一戰)’을 피하지 않는 미국의 원칙적 대응과 일관된 압박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카다피는 그 간의 고립주의 노선을 수정하고 실용주의 노선으로 선회함으로써 경제적으로 리비아를 부흥코자 하였지만, 정치적으로 철권통치구조를 전혀 바꾸지 않았으며 오히려 자신의 아들에게 권력을 세습하려는 기도를 노골화하였다. 그러나 국민들의 국외 여행이 허용되고, 휴대폰과 인터넷이 널리 보급되어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세계적 SNS인 페이스북이 일상화되는 등 정보의 자유와 유통은 급속도록 확산됐다.


국제투명성기구의 2010 부패지수(CPI, Corruption Perception Index) 146위에서 보듯이 카다피의 실용주의 경제 노선도 국민들의 삶의 향상에 제대로 귀결되지는 못했다. 1인당 국민소득 1만8,000달러에도 불구하고 실업률은 30%를 웃돌았다. 중요하게는 미국이라는 외부의 적이 사라짐으로써 국민들로 하여금 국내의 정치를 직시할 수 있게 하였다. 작금의 민주화 시위도 카다피의 노선 선회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카다피를 보며 김정일은 어떤 생각을 할까. 김정일은 자신을 무척 ‘자랑스러워(?)’ 할지도 모른다. 김정일은 카다피가 미국과 타협함으로써 작금의 사태에 직면하게 되었다고 무릎을 칠 것이다.


과연 김정일은 카다피와 정반대의 길을 변함없이 걸어왔다. 김정일은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핵실험을 감행해 ‘핵보유국’으로서의 입지를 강화하고 있다. 북한에 대한 경제제재는 한국의 ‘햇볕정권’에 의해 일관성을 잃어 버렸다. 독재자 김정일이 북한 주민들을 위한 경제 부흥을 선택할 리 만무함은 1990년대 중반 대아사 사태와 2009년 11월 반인민적 화폐개혁을 통해 여실히 확인된다. 북한 주민들에게도 변화가 일고 있다지만 휴대폰 보급은 아직 미약하며, 인터넷은 차단되어 있고 여행의 자유가 없는 등 정보 통제는 여전히 강력하다. 


국제적으로도 카다피는 당시 믿었던 러시아가 소극적으로 나옴에 따라 외부 후원세력을 갖지 못했지만, 북한은 중국이 버티고 있다. 아랍 민주화 바람이 자국으로 튈까 우려하는 중국은 멍젠주 공안부장을 북한에 급거 파견해 상황을 공유하는 민첩함까지 보이고 있다.


이 같은 상황전개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는 김정일에게 원칙적 대응과 일관된 압박을 가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김정일이 한국을 공격함으로써 더욱 자신의 체제 단속에 이용하고 있지만 한국 정부든 미국이든 사실상 마땅한 보복조차 가하지 못하고 있다. 천안함 폭침에 의혹을 제기하고 북한의 김정일 독재체제와 대화하고 협상하라는 목소리는 크게 내지만, 북한 주민들을 위한 북한인권법에는 결사코 반대하는 세력이 의회의 제1야당으로 존재하는 것이 한국 정치의 현실이다.


이런 사정을 잘 아는 김정일은 독재를 위한 정확한 노선을 일관되고 확고하게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카다피를 보며 자신을 대견해 하고 있을 김정일을 향해 카다피처럼 몰락할 것이라는 단순한 도식으로만 바라봐선 안 된다.


그러나 우리가 카다피의 몰락을 보며 확인하는 것은 국민들의 저항이란 총칼과 죽음 앞에서도 저토록 불같이 터져 나올 수 있다는 분명한 사실이다. 북한의 주민들도 예외는 아니다. 북한 주민들도 터져 나오는 순간 이미 평양을 에워쌀 것이며 결코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그때 김정일은 카다피 보다 더욱 신속하고 무자비하게 학살을 자행하고 더욱 철저하게 정보를 차단 통제할 것이다. 만일 작금의 리비아처럼 ‘내전’으로 치닫는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죽어가는 리비아 국민들을 보면서 국제사회가 ‘손을 놓고’ 있어야 하는 상황을 한국 역시 반복할 것인가. 미증유에 북한의 유혈사태 발생 시에도 한국이 자동 개입할 수는 없다는 것이 원칙적인 국제법 해석이다.


우리는 우리의 문제로 냉정하고 진지하게 리비아를 주시하여야 한다. 그리고 카다피와 다른 김정일을 어떻게 대해 왔는지, 어떻게 대할지 우리 자신부터 깊고도 냉철한 성찰을 해야 할 시점이다.


※외부 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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