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10초만에 ‘아버지’된 90년대 어느 북한군 이야기

▲ 90년대 중반 북한열차 풍경

북한의 이른바 ‘집단주의 미풍’을 소개한 최근의 ‘청년전위’ 기사 하나가 눈길을 끈다.

지난 5일자에 실린 ‘열차 안에 비낀 우리 제도의 참 모습’이라는 제목의 이 기사는 올해 3월 사리원-나진행 열차에서 통증을 느끼는 한 여성을 구하기 위해 열차의 모든 손님들이 저마다 달려와 혈육처럼 피와 살이 필요되면 자기를 불러달라며 ‘동지적 사랑’을 꽃피웠다는 내용이다.

요즘 개인주의와 배금주의가 확산된 북한에 이러한 경이적인(?) 스토리가 있다는 자체가 놀라울 뿐이다. ‘청년전위’는 청년동맹(사로청) 산하 기관지로 ‘노동신문'(당 기관지), ‘조선인민군'(군 기관지)에 이어 북한의 3대 신문 중 하나다.

‘청년전위’는 이 기사를 통해 북한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개인주의 풍조를 막고, 전체 주민은 한 가족이라는 집단주의 의식을 선전하려는 것 같다.

‘청년전위’의 여성 구원 기사는 만들어낸 작문일 가능성이 높다. 북한에서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라는 집단주의 구호는 적어도 80년대까지는 통했다.

그러나 90년대 식량난을 전후하여 이 구호는 사라졌고, 동지적이고 인간적이었던 주민관계는 극도의 생존을 위한 전투로 배타의 대상으로 변했다. 오직 남을 속여야 살고, 남을 디디고 올라서야 산다는 의식이 팽배해졌다. 90년대에는 극심한 식량난에 시달린 나머지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고유의 미풍양속까지 변했다.

이렇게 말하면 믿기 어렵다고 할 이곳 사람들도 있겠지만 굶어 죽는 판에 남 생각할 여력이 어디있겠는가. 남한 사람들에게 자기 자식이 굶어 죽는데 남 생각할 수 있겠냐고 물어보고 싶다.

북한은 그렇게 변했다. 남이야 굶어죽든 말든 상관없고, 사기, 절도, 강도행위가 극에 달했던 90년대 이후 상황이 달라졌을리는 없다. 먹고 사는 것은 조금 여유로워질 수 있겠지만 개인주의는 더욱 확산됐다고 최근 탈북자들은 말한다.

국가 재산인 열차를 이용해 장사한 ‘군인 아저씨’

기억에도 생생한 1998년 4월 18일에 있었던 일이다.

함경남도 신포시에 있는 동생 결혼식에 참가하기 위해 평양-금골행 열차에 오른 나는 허탈한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열차가 함흥역을 출발하자, 그 전부터 창문 쪽에 앉아 있던 한 젊은 군인이 장사꾼들을 열차에 태워주고 돈을 받고 있었다. 창문이 다 떨어져 나간 차창에 걸터앉은 그는 한 사람 태우는데 50원씩 받았다. 짐 한 개당 추가로 50원씩 더 받았다. 그 군인은 국가재산인 열차를 이용하여 개인 사리를 채운 것이다.

어떻게 이런 것이 가능하냐고 물을 수 있다. 위 사진에서 보이는 것처럼 기차 출입문은 사람이 너무 많아서 애초부터 열어주지도 않는다. 그러니 올라타는 곳이 창문 밖에 없다. 이 창문에서 민간인이 장사를 하면 승객들에게 혼이 나지만 군인이 하면 사람들도 손을 대지 못한다. 이것이 진정한(?) 선군의 모습이다.

그 군인은 경무관(헌병)이 오면 견장을 떼서 감추고, 안전원(주민단속 경찰)이 다가오면 견장을 달아 자신을 은폐했다. 군인은 탈영병 같았다.

열차에 오르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는 주민들은 돈을 바치고 겨우 열차에 올랐지만, 들어설 자리는 없었다. 열차 안에 사람이 많건 적건 상관없이 군인은 열심히 사람들을 안으로 끌어 들였다. 사람 위에 사람이 밟고 다니고, 밑에 깔린 사람들은 죽는다고 아우성을 치는 진풍경이 연출됐다.

전등이 없는 캄캄한 차칸에서 여객들은 자기를 밟는다고 주먹이 오갔다. 등짐에서 고약한 젖갈 냄새를 풍기자 주변 손님들은 코를 싸 쥐며 누군가 그 장사꾼의 따귀를 갈겼다. 주인은 엉엉 울면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누가 때렸는지 시비를 가릴 상황도 안됐다.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가족들이 굶어죽어가는 마당에 모두 악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무슨 질서가 있고, 예의가 있겠는가.

열차가 낙원역에 도착하자, 그 군인은 다시 돈을 받고 사람들을 끌어 올렸다. 따귀를 맞아 억울해 하던 장사꾼은 ‘새 손님’이 열차에 오르자 자리가 없는데 올라와서 힘들게 한다며 불이 번쩍 나게 따귀를 갈겨 분을 풀었다. 이러한 풍경은 2000년까지 계속됐다.

졸지에 아버지 된 ‘군인 아저씨’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군대에 복무 중이던 1995년 11월이었다.

7명의 군인들과 함께 8군단에 갔다 돌아오던 중 평안북도 염주역을 출발하려는 순간이었다. 창문을 등지고 앉아있던 한 군인이 갑자기 밖에서 다급한 소리가 들리자 뒤를 돌아보았다.

“아저씨, 승강대가 복잡해서 아기를 업고 기차에 오를 수가 없어요. 먼저 이 아기부터 좀 받아주세요”라고 소리쳤다. 승강장에는 수백 명이 몰려 저마다 먼저 오르겠다고 난리 북새통이었다.

엉겁결에 아기를 받아 든 군인은 여인이 오르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아무리 승강장 쪽을 목을 빼 들고 바라보았으나, 여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때 옆에 있던 한 여인이 혀를 쯧쯧 차며 “에구, 총각 군인이 얘를 어떻게 기르겠소? 요즘 여자들이 벌어먹기 힘들어 아기를 이렇게 열차에 버리고 가는 경우가 많소. 애 엄마가 올라오지 않을 게 뻔하오”라고 말한다.

순간 아기를 돌돌 싸맨 강보 안을 살펴보니 편지가 한 장 있었다.

“미안합니다. 군인 동무, 집에 먹을 것이 떨어져 나도 3일을 굶었어요. 애마저 굶겨 죽일 수가 없어서 맡깁니다. 장군님의 아들딸로 잘 키워주세요. 아기 이름은 김명심입니다”

군인은 억장이 막혔다. 부대에 도착하면 군복무를 해야 하는데 어린 애를 어떻게 키운단 말인가,

이것이 북한의 90년대 상황이다. 그나마 80년대까지는 환자에게 피와 살을 바치겠다고 찾아가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그것도 김정일의 특별지시를 받거나, 이름 있는 사람에게 찾아갔다. 아예 살 가망이 없는 사람들은 찾아가지도 않았다.

최근 입국한 한 탈북자는 “열차 창문은 이제 다 끼워져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오직 자기밖에 모른다. 살을 떼주고, 뼈를 깎아준다는 건 이미 오래된 옛말이다. 굶어 죽는 사람을 뻔히 보면서도 돌아서는 몰인정한 사회가 되어버렸다”고 말했다.

내가 북한을 떠난 지 3년 동안 얼마나 변했는지는 알수 없다. 그러나 내가 아는 북한은 벌써 그 이전부터 개인주의가 확산된 사회였다.

이런 북한을 놓고 ‘청년전위’가 “이름도 주소도 모르고 만나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 쏟아 붓는 지성은 ‘우리’라는 하나의 대가정 속에 화목하게 사는 우리 제도의 참 모습”이라고 소개했다. 뻔한 거짓말에 쓴웃음만 나온다.

소셜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