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양 미군 양민학살사건 진상규명 절실

6.25전쟁 중 충북 단양에서 미군의 폭격 및 조준사격으로 4백여명의 양민이 희생된 사건에 대한 주민들의 진상요구가 거세지만 당국의 조치가 미흡해 희생자와 유족들의 한이 깊어만 가고 있다.

특히 사건이 발생한 지 50여년을 넘기면서 당시 상황을 증언할 생존자마저 하나 둘 세상을 뜨고 있어 피해자들의 한을 풀고 역사의 기록으로 남기기위해서는 당국의 적극적인 대처가 절실하다는 지적이다.

6.25전쟁 발발 56주년을 맞아 미군의 단양 양민학살사건에 대한 주민들의 증언을 통해 실상과 진상규명을 위한 대책 등을 정리해본다.

▲노동리·마조리 학살사건.

6.25 전쟁이 일어난 다음해인 1951년 1월10일-12일 충북 단양군 단양읍 마조리와 노동리에서는 미군의 폭격과 사격으로 주민 103명이 죽고 24명이 부상한 것으로 생존자들은 증언하고 있다.

부상당한 채 살아남은 주민 중 현재 생존자는 서학출(72.단양군단양읍노동리),정옥이(73.노동리)씨 등 고작 3명에 불과하다.

이들은 9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주최한 단양 노동리·마조리 민간인 희생 관련 증언 청취장에서 당시의 참담한 상황을 생생히 돌이켰다.

당시 소백산 지구에서는 인민군 잔류병들이 빨치산 활동을 전개하고 있어 단양읍 노동리와 마조리 일대에는 수시로 비행기의 폭격이 있었다.

이와 함께 미군은 단양읍 상진리와 중도리에 주둔하면서 인민군과 접전을 하고 있었다.

1951년 1월9일밤 인민군잔류병들은 마을로 내려와 서씨 집에 10명, 각 가구마다 서너명씩 들어가 총을 들이대며 음식과 잠자리를 요구, 밥을 해먹고는 미군이 들어오는 낌새를 차리고는 다음날 새벽 소백산으로 후퇴했다.

곧 이어 탱크와 항공기 폭격(기총소사)이 계속됐고 탄광 사택 사람들은 화약고로 숨고, 동네사람들은 노동동굴, 방공호, 집으로 피해야만 했다.

이때 화약고에서는 40명이 사살 당했는데, 미군이 마을로 들어오자 폭격을 피해 숨어 있던 화약고 내의 사람들이 반가워 만세를 부르며 환영하였으나 미군이 무차별 사격을 가하여 전원이 사망했다.

마찬가지로 미군이 동네로 들어오자 마을 주민들이 반가워 태극기를 흔들며 맞이했으나 미군은 어떤 이야기나 조사도 없이 무조건 총을 쏘았다.

당시에는 미군이 통역관을 데려 오지도 않았고 아는 영어라고는 오케이 뿐이었던 동네사람들 몇몇에게 뭐라 물으니 오케이하자 총을 쏘아 죽였다.

1월11일에는 미군 선발 세 명이 마을에 들어와 덮어 놓고 초가집에다 총을 쏘아대고 뛰져나오는 주민들과 가축들을 조준 사격했다.

노동리의 정옥이씨는 이 과정에서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를 잃었으며 서씨는 할머니를 잃었다.

집집마다 돌아 다니며 일일이 방화를 하고 사람과 가축을 모두 죽이니 마을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져 도망을 갔다.

노동리에 이어 마조리에서도 살육전은 계속돼 불에 안탄 집은 단 한집도 없었고 소만 해도 180마리가 죽었다.

미군이 노동리와 마조리에서 방화와 살인과 폭격을 자행한 것은 3일간이나 지속되었다.

이 때문에 노동리와 마조리의 주민들은 이때가 되면 수십가구가 같이 제사상을 차리고 있다.

▲곡계굴사건

중공군의 6.25전쟁 개입으로 1.4 후퇴가 한창이던 1951년 1월 20일(음력 12월 12일).

밀려내려오는 중공군을 피해 피난길에 올랐던 강원도 피난민들과 이 지역 주민들은 영춘면에서 단양읍으로 나가다 가곡면에서 미군들로부터 제지를 당해 영춘으로 다시 돌아왔다.

피난민들은 영춘면에 있는 곡계굴로 숨어들었고, 이날 점심무렵 미군의 무차별 폭격이 시작됐다.

미군은 당시 산간지역으로 숨어들었던 인민군을 소탕한다는 이유로 경북 예천과 충북 단양, 강원 영월 등지에 무차별 폭격을 감행했다.

미군은 이지역에 고열을 쏟아내는 네이팜탄을 쏟아 부었다.

피난민들이 숨어있던 곡계굴은 이 폭격으로 초토화됐고, 3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불에 타 죽거나 질식해 숨졌다.

이 때문에 영춘면에서는 매년 음력 12월 12일이면 집집마다 제사를 차리고 있다.

이 마을에 살았던 조봉원씨(72. 전 제천의림공고 교장)는 “정찰기 한대가 왔다가더니 4대의 비행기가 날아와 휘발유통 같이 생긴 폭탄을 쏟아부어 동굴은 삽시간에 불길과 연기에 휩싸였다”고 회상한다.

폭음과 불길에 놀라 동굴을 뛰쳐 나온 사람들은 여지없이 비행기에서 내뿜는 기관총탄에 쓰러져 갔다.

이날 폭격으로 조씨는 아버지와 여동생, 조카를 잃었다.

엄한원(71) 곡계굴대책위원회위원장은“동굴 속에 있다가 이렇게 죽을 바에야 맑은 공기라도 한번 마시고 죽어야 겠다는 생각에 동굴을 뛰쳐 나왔다. 다행히 미군의 기관총탄은 피했지만 동굴 속에서 숨진 어머니의 시신을 끝내 찾지 못했다“고 한다.

누나 셋을 잃었다는 김영구(63)씨는 ” 당시 동굴 밖에 있었다. 비행기 4대가 연방 날라다니며 폭탄을 퍼부었고 불길이 온 산을 뒤덮었다”고 회상했다.

단양 곡계굴은 철마다 바람이 부는 방향이 바뀐다.

겨울에는 바깥 쪽에서 안으로, 여름에는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분다.

이 때문에 미군 네이팜탄의 불길은 동굴 안쪽으로 깊숙이 파고 들었고, 폭격의 두려움을 피해 동굴 안쪽에 있던 여자와 어린이들의 희생이 컸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진상규명 노력과 경과

이들의 이유없는 희생에 대해 정부도 미국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다.

이제 반세기가 흘러 그때의 참혹함을 증언해 줄 주민은 열명도 채 남지 않았다.

54년 만에 국방부 관계자들이 2005년 5월 현장을 다녀가 주민들은 한을 풀어 줄 것으로 기대했지만 아직까지 답변이 없다.

지난해 국회의원 회관에서 단양 영춘 곡계굴 민간안 학살 진상전을 열었던 서재관(제천단양) 열린우리당 의원은 “곡계굴 민간인 학살사건이 억울하고 어처구니 없는 죽음이었다는 것이 속속 증명되고 있다”면서 “철저한 진상조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단양 곡계굴유족회는 매년 이날이 되면 위령제를 올리고 있는데 올해 5번째 위령제를 지내는 것으로 맺힌 한을 달래고 있다.

충북 단양 영춘면 곡계굴 양민학살 사건 등의 진상 규명의 근거가 될만 한 미 중앙정보국(CIA)문서가 발견돼 진상을 밝히는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부산일보는 지난해 6월 미 10군단이 한국전 당시 1950년 12월말부터 51년1월말까지 강원·충북·경북일원에 네이팜탄을 퍼부어 민간인 4천440명을 죽였다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보관 중인 미 CIA가 작성한 ‘베트남전을 위한 한국전쟁의 교훈’이라는 보고서를 인용, 이같이 보도했다.

문서에 따르면 미군은 한국전쟁 중 무려 3만2천여t의 네이팜탄을 사용했으며, 네이탐탄을 사용한 대표적인 사례가 강원 영월, 충북 단양, 경북 예천 지역을 대상으로 전개된 싹쓸이 작전이다.

미군의 16시간에 걸친 무차별 폭격으로 단양 영춘면 곡계굴 피난민 360여명이 불에 타거나 질식해 숨졌으며, 예천에서는 64명이 목숨을 잃었다.

특히 영월에서는 무려 4400명의 무고한 양민이 숨졌다.

그러나 폭격 직후 실시된 예천지역에 대한 미 제5공군 합동조사에서 인민군 사망자는 단 한명도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고 이 문서는 전했다.

단양 영춘면 등 피해지역 주민들은 곡계굴 현장 및 피해자 증언에 그쳐있던 정황에서 이 같은 문서가 발견돼 곡계굴 진상조사가 탄력을 받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으며 2000년부터 정부와 충북도, 각당, 국민고충처리위원회 등에 진정서 및 호소문을 발송해 정부차원의 대책을 호소하고 있다.

곡계굴사건과 노동리·마조리 대책위원회는 2000년 국무총리실·국방부·국민고충처리위원회·충북도·각당 등에 호소문과 진정서를 접수하고 있으나 당국은 ’노근리사건’의 진상규명에 노력을 집중하고, 최근에 제기되고 있는 유사사건에 대해서는 노근리사건 해결 후 검토 처리할 계획이다./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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