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북으로 가고 싶었던 김미경씨 南정착 성공기

천주교 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에서 탈북자 지원활동가로 일하고 있는 김미경(사진) 씨는 탈북자다. 남한 사회 적응이 녹록지 않았던 그녀가 자신의 경험을 살려 탈북자 지원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에 오기까지 그녀의 탈북 과정은 예사롭지 않았다. 마치 한 편의 드라마를 떠올리게 한다. 지금의 남편을 만나기 전까지, 외교 업무를 하는 아버지 밑에서 부유하게 자란 그녀는 탈북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중국 조선족이었던 남편이 무역을 위해 북한으로 들어와 그녀의 집에서 한 달간 머물게 된 것이 새로운 운명의 시작이었다. 김 씨를 마음에 두었던 남편은 중국으로 돌아간 뒤 여러 차례 그에게 편지와 사람을 보냈다. 그러나 이사를 가는 바람에 아무런 연락을 받지 못해 인연이 비껴가는가했는데, 마침내 남편이 보낸 네 번째 사람과 만나게 됐다고 한다. 그녀는 그렇게 중국으로 왔다. 아무런 준비 없이 빈 몸으로 탈북한 것이다.


처음 탈북을 결심한 것은 막연한 호기심과 궁금증 때문이었다고 한다. 어릴때부터 음악을 공부했던 김 씨는 열다섯 살 때 중국의 어린이날 공연행사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북한에서 ‘자본주의 나라는 못산다, 중국도 자본주의로 황폐해지고 있다’고 교육 받았지만, 그녀가 보았던 중국의 현실은 완전히 달랐다. 그곳에서 본 풍요로움은 어린 마음에도 충격으로 다가왔다고 한다. 남편이 마지막 사람을 보내왔을 때 그녀는 불현듯 그 기억을 떠올렸고, 다시 중국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후 김 씨는 북한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됐다. 북한의 가족은 그를 교통사고 사망 처리를 했다. 그렇게 중국에서 사나 보다 했는데, 첫아이가 태어난 후 남편은 한국으로 가야 가족이 살 수 있다는 얘기를 하며 한국행을 권유했다. 또다시 예기치 않은 여정이 시작된 것이다. 그 후 남편과 가족을 중국에 두고 먼저 한국에 나온 그녀는 북한에 계신 어머니와 통화할 수 있었다. 남편이 국경을 넘어 자신의 어머니를 잠시나마 중국으로 모셔온 것이다.


김 씨는 “제가 한국으로 왔다는 것에 어머니가 충격을 받으셨죠. 살 수 있냐고 물어보시기에 살 수 있다고, 걱정하시지 말라고 말씀드렸죠. 그때 중국에서 바로 어머니를 모셔오고 싶은 마음뿐이었어요. 하지만 북한에 아버지, 형제들 다 있으니까…. 그때 제가 북한에서 사망 신고됐다는 얘기와 그간의 상황을 들었어요. 북한에도 불법으로 점 봐주는 사람들이 있어요. 어머니가 점을 봤는데 제가 스물여섯 살에 죽을 팔자라고, 영영 못 보니까 찾지 말라고 하더래요”라고 회고했다.


“남북이 서로 깊게 공감할 줄 아는 마음이 중요하다고 느꼈어요.”


뜻하지 않게, 아무런 준비 없이 시작된 한국 생활이 만만할 리 없었다. 김 씨의 경우에는 더욱 힘들 수밖에 없었다. 정착 초기 3년 동안에는 다시 북한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북한에 남부러울 것 없는 환경과 가족이 있었으니 더욱 힘들었을 것 같다. 만약 남편과 가족이 없었더라면 그의 방황은 끝을 가늠하지 못할 만큼 길어졌을 것이다.


이러한 경험들은 지금 그가 하는 일에 소중한 자산이 되고 있다. 그녀는 지금 천주교 민족화해위원회와 빈민사목위원회 소속으로 탈북자를 지원하고 있다. 특히 빈민사목위원회 평화의 집 활동가로 가장 가까운 곳에서 탈북자들을 돕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들이 사는 현장을 직접 찾아가 생생한 생활담을 들어주기도 하고, 가장 절실하게 도움이 필요한 부분에 대해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자 애쓴다.


모든 활동 중에서 김 씨가 각별히 신경 쓰는 것은 탈북자들에게 친구이자 말벗이 되어주는 것이다. 이들이 정착 생활에서 겪는 외로움이 얼마나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것인지를 잘 알기 때문이다. 그 또한 한국에서 살면서 주변에 사람이 없다는 것, 힘들고 외로울 때 터놓고 얘기할 사람이 없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그녀는 잘 안다. 그래서 함께 얘기를 나누며 정신적인 안정감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데 자연스럽게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김 씨는 “여기 사람들은 북한에 대해 굉장히 추상적으로 생각하고 편견을 갖는 분들이 많아요. 저 역시 그런 것들 때문에 갈등을 많이 겪었어요. 겉으로 보이는 걸로만 평가하고는 ‘아, 저 사람 보기 싫어’ 하는 거죠. 제가 왕따 당한다고 느꼈을 때도 비슷한 상황이었는데 저는 저대로 속상하고, 나중에 그분들 얘기 들어보니까 그분들은 그분들대로 마음이 아팠대요”라고 말했다.


한국 동료들 입장에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이런데 저 왜 저렇게 밖에 행동할 수 없는 걸까’라는 문제로 고민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을 겪으며 김 씨는 탈북자에 대한 물질적인 지원도 좋지만 관심을 갖고 건네는 따뜻한 말 한 마디가 더 큰 응원이 된다는 사실을 느꼈단다. 그렇게 서로의 마음이 오고갈 때에 진정한 화합과 화해가 이뤄진다는 사실을 말이다.


“사람이라는 소중한 자산으로 탈북자들의 어려움 해결해주고 싶어요.”



자신 또한 탈북자로서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도울 수 있다는 것에 큰 자부심을 느낀다는 김 씨는 공부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최근엔 (사)새롭고하나된조국을위한모임이 주관하는 탈북자 전문상담사 1년 과정도 공부했다.


그는 “어느 날 문득, 정체성을 잃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니 초심을 잃고 살고 있다는 반성도 하게 됐고요. 그리고 공부를 게을리 한 탓인지 ‘하는 일에 대해 많이 아는 게 없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한국에 왔을 때와 비교해 탈북자 지원체계가 많이 바뀌었거든요. 부족한 부분을 더 채워야겠다 싶어서 공부를 시작하게 됐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거기서 만나는 교육생들이 다 벗이 될 수 있으니까요”라고 말했다.


김 씨는 새로운 사람을 알아가는 것에 관심이 많다. 또 인맥 관리도 중시한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언제 어떤 도움이 필요할지 모르는 탈북자들을 위해서다. 한 번은 동생 사망으로 인한 보험금 문제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던 탈북자에게 그가 교육과정 중에 알게 된 법률상담 교수님을 연결해서 문제를 해결해주기도 했다. 그렇게 도움을 줄 때의 기쁨은 말할 수 없을 정도란다.


“탈북자들이 편안하게 드나드는 공간 마련이 오랜 꿈이에요” 


김 씨에게 탈북자를 만나는 일은 그 자체가 즐거움이자 보람이다. 이 일을 하면서 인연을 맺은 탈북자들이 열심히 사는 모습, 구김살 없이 잘 자라는 아이들의 모습을 지켜 볼 때면 감동을 받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자극을 받는다. 탈북자에 대한 어떤 문제가 생겨날 때마다 그도 활동가로서 현장에서 느낀 경험을 바탕으로 다양한 의견을 이야기 한다. 주로 육아와 교육, 노인문제에 관한 내용들이다.


아이 때문에 다른 일을 할 수 없어 기초생활수급자로 살아가야 하는 엄마들을 위한 24시간 놀이방과 아이들 공부방, 정보 부족으로 자녀 교육 문제에 어려움을 겪는 부모를 위한 교육 프로그램, 이 외에 외로운 어르신들을 위한 대화 공간도 생각해 둔 터이다. 문턱을 낮춘, 탈북자 누구나 자기 집처럼 편안하게 드나드는 열린 공간은 그녀의 오랜 꿈이기도 했다. 지속적으로 노력하는 그의 열정이 있기에 그 꿈이 이뤄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