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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전향했다.”
며칠 전 인터넷을 뒤지던 중 우연히 발견한 이 문구가 필자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1기 부시 행정부 시절 미국의 힘을 바탕으로 한 세계민주주의 확산 정책을 적극 지지했던 후쿠야마의 ‘전향’은 어떤 의미일까?
‘강한 국가의 조건’ ‘역사의 종언’ 등 그간의 저서활동으로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신념과 세계 민주주의 확산의 첨병을 자처했던 그였기에 필자로서는 그를 ‘전향자’로 보는 시각이 쉽게 납득이 가질 않았다.
이러한 의문은 그의 최근 저서 ‘기로에 선 미국’이라는 책을 통해 어느 정도 해소될 수 있을 것 같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필자는 후쿠야마가 전향했다는 주장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보통 전향이란 사상이나 신념 등이 정반대의 상황으로 변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후쿠야마는 부시 행정부가 앞세운 테러와의 전쟁이 결국 실패로 귀결됐다고 평가하고, 이를 밀어부친 네오콘과도 대립각을 세운다.
그러나 후쿠야마가 이 책에서 세계민주화에 대한 신념을 포기했다는 흔적은 찾을 수 없다. 오히려 치열한 자기성찰을 통해 더욱 현실적인 접근을 찾고자 노력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후쿠야마는 당초 이라크 문제에 대해 강경한 입장이었다. 그러나 9·11사태를 거치면서 불량국가와 테러세력에 대응하는 관점이 서서히 변화하기 시작했고, 2004년 여름부터는 신보수주의 대외정책을 더 이상 지지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고백한다.
그가 부시 행정부의 대외정책에 대해 날을 세운 배경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
첫째, 이슬람 세력이 미국에 제기하는 위협의 실체를 오인했다는 것이다. 그는 미국에게 가장 위험한 사람들은 중동의 독실한 무슬림들이 아니라 유럽에 살고 있는 소외되고 뿌리 뽑힌 이슬람계 젊은이들이라고 말한다. 그는 중동 지역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근대화나 서구화를 거부하지 않기 때문에 ‘문명의 충돌’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둘째, 냉전종식 이후 국제질서에서 미국은 단극(單極)으로 존재하며 ‘선의의 헤게모니’를 행사해야 한다는 관점, 여기서 비롯된 ‘예방전쟁’ 불사 전략은 유럽과 같은 오랜 동맹국들로부터도 거부감을 사고 있다고 지적한다.
미국인들은 자신의 선한 의도를 스스로 믿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으며,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이를 납득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를 소홀히 함으로써 전 세계적으로 반미주의를 확산시키고 있다고 꼬집는다.
그는 이라크 전쟁 실패와 같은 우(愚)를 범할 수밖에 없는 한 신보수주의자들의 네 가지 문제를 설명한다.
첫째로 네오콘은 정치체제의 내적 성격이 중요하며 대외정책은 자유민주주의 사회의 심오한 가치를 반영해야 한다고 믿는다. 둘째, 미국이 도덕적인 목적을 위해 힘을 행사해 왔으며 그렇게 행사 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셋째, 야심적인 사회공학 프로젝트에 대한 불신이다. 넷째, 안보나 정의를 달성할 수 있는 국제법 및 국제기구의 정당성과 효율성에 대한 회의론이다. 그
리고 냉전시기 공산주의에 대한 자유민주주의의 세계적 투쟁이라는 쟁점과 관련하여 신보수주의자들의 이 같은 원칙은 스스로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옳았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 이런 것들 하나하나가 민주주의 증진과 정치발전에 관한 미국의 경험이었다는 것이다.
얼핏 보면 후쿠야마는 이라크 전쟁과 전후 혼란상황을 지켜보면서 신보수주의의 종말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책을 끝까지 세세하게 읽어보면 저자가 말하고 싶은 진정한 의도가 드러난다. 후쿠야마는 신보수주의의 종말은 있을 수 있어도 세계민주화의 길은 꾸준히 걸어 나가야한다고 역설한다.
이라크 전쟁이 잘못됐다는 것은 후세인과 같은 독재자, 독재국가권력에 의한 인권유린이 방치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 문제가 대단히 복잡하고 중층적인 만큼 좀 더 신중한 접근이 이뤄졌어야 한다는 것이다.
후쿠야마는 미국이 세계의 발전 과정에서 가지는 도덕적 의무를 이렇게 설명한다.
“미국이 가난한 나라들의 경제발전을 증진시키는 것은 그 자체로도 목적이 되고 민주주의를 증진시키는 노력의 보완물이다. 경제성장을 배경으로 할 때 민주주의가 훨씬 더 공공해지기 때문이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부유하고 강력한 나라가 인적-사회적 자원이 결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삶의 질까지 끊임없이 후퇴하는 나라들의 곤경에 무관심한 것은 도저히 용인될 수 없다.”
이렇게 볼 때 저자의 네오콘 비판은 세계민주화라는 신념에 대한 자기성찰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미국과 네오콘이 더욱 능력 있는 집단으로 거듭날 필요성을 역설하는 것이다. 나의 이런 판단을 뒷받침이라도 해주듯 저자는 책의 중반부터 세계민주주의의 증진과 정치경제발전을 위한 방법, 세계화된 세계를 위한 새로운 국제기구, 미국 대외 정책의 변화를 이야기 한다.
저자는 현재적 조건에서 세계민주화를 위해 미국이 결정적 역할을 해야 한다는 점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그 접근방법은 군사력 같은 하드파워가 아닌 지원이나 협력과 같은 소프트파워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각국 내부에 벌어지는 일을 관심을 가지고 노력을 기울이되 그 방법은 본보기를 제시하고 교육과 훈련을 제공하며 조언과 자금으로 지원하는 부드러운 능력이라는 것이다.
처음 시작됐던 후쿠야마에 대한 필자의 의문은 여기까지 오면서 어느 정도 풀린 셈이다. 나머지 저자가 제시하는 대안에 대한 검증과, 네오콘에 대한 평가는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의 몫으로 돌리고 싶다.
김민수/자유주의대학생네트워크(jayou2006.net)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