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함부로 동독과 북한을 비교하느냐

▲ 베를린 장벽 붕괴 당시 동독시민들의 모습
<사진:www.pohl-projekt.de>

제2차 세계대전 후 초강대국 간의 경쟁이나 국내 갈등으로 말미암아 민족분단을 당한 나라는 3개국이다. 중국, 독일, 한국이다.

대만과 중국은 인구와 땅의 차이가 너무 커서 중국은 특별 경우로 볼 수 있지만, 한국과 독일은 비슷한 점이 많아 이 두 나라를 비교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실 독일과 한국의 분단을 비교하는 책이나 학위논문은 수백 편이 넘을 것이다.

물론 한국과 독일은 비슷한 점이 많다. 동독과 북한은 둘 다 소련군대의 점령지역이었고, 냉전이 첨예화함에 따라 완전히 독립(분단)국가가 되었다. 1940년대 말 소련의 스탈린식 사회주의를 도입했고 이후 각각 문화적 전통과 정치적 환경에 맞게 이 체제를 수정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레닌주의식 사회주의 체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동독, 북한과 비교도 할 수 없어

그러나 독일과 한국을 비교하려면 공통점만 아니라 차이점도 많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면 안되다. 필자는 동독도 북한도 경험한 사람으로서, 이 두 국가를 너무 쉽게 비교하는 논문을 읽으면 좀 놀랍다는 생각이 든다. 공통점이 있지만 차이가 아주 크기 때문이다.

아마 가장 큰 차이는 독일 땅에서는 동족상잔의 피가 흐르지 않았다는 사실일 것이다.

동서독 관계가 아주 긴장된 적도 있었지만 대체로 폭력적인 성격은 띠지 않았다. 지금도 과거 국경을 지키던 동독 병사들이 망명자를 ‘사살’한 것이 많이 논의되고 있지만, 2003년에 완성된 공식적 조사 결과에 따르면 동독군에 의해 사살된 사람은 421명이었다.

또 바다로 탈출을 시도하다 익사한 자나 탈출 실패 후 자살한 자까지를 포함하면 사망자 수가 1008명이라고 희생자 가족들은 주장한다. 그러나 421명이든 1008명이든 한국의 입장에서 보면 6.25 전쟁과 비교할 것은 못된다.

동서독 군대도 서로 싸울 준비를 계속했지만 학살된 병사들은 거의 없었다. 1948~90년에 국경에서 사살된 동독 군인들이나 경찰들은 28명에 불과하고, 그중 절반도 서독 군인이 아니라 서독으로 탈출을 시도한 ‘무장 탈출자’ (주로 동독 군인들)이 사살되었다. 서독군인에게 사살된 사람들에 대한 통계는 찾지 못했으나 동독보다는 더 적게 보인다.

이 통계를 보면 독일의 경우에는 민족분단이 피로써 굳어지는 것이 아니라, 독일인들이 ‘다른 독일’을 정치적으로 거절한 것이다. 따라서 자신이나 가족의 죽음으로 일어난 개인적인 적대감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동독 ‘탈동자’, 탈북자의 75배

또 하나의 차이점은 동독에서 서독으로 ‘탈동'(脫東)한 규모가 북한에서 탈북한 규모보다 비교도 할 수 없이 컸다는 사실이다.

1950년대 말 ‘탈동자’가 너무 많아지자 동독정부는 1961년에 유럽의 분단과 대립의 상징이 된 베를린 장벽을 건설했다. 이후에도 1989년 독일통일이 될 때까지 동독에서 서독으로 넘어온 사람들은 매년 평균 2만1천명이었다. 이를 합치면 1961년~1989년에 서독으로 온 사람은 50만 명 이상이다.

1953년~2005년까지 50년 동안 북한에서 남한으로 온 6,700명의 탈북자보다 75배가 넘는다. 국경을 넘을 때 총격을 맞아 죽을 수도 있었지만 동서독 국경은 ‘죽음의 땅’인 38선보다 경비체제가 엄격하지 않았다. 제3국을 통해 남한에 올 수 있는 탈북자와 달리 ‘탈동자’ 대부분은 그냥 국경을 넘어서 서독으로 갔다.

또 1980년대 초부터는 서독에 망명한 동독사람도 고향을 방문할 수 있었다. 지난 8월 북경에서 북한 대사관을 찾아가 북한에 있는 가족을 만나게 해달라고 요구한 김형덕씨 사건은 현 한반도 상황에서는 상징적인 행위로만 볼 수 있으나, 분단 독일에서는 늘 있는 일이었다. 물론 서독에 가자마자 동독의 입국허락을 받지는 못했으나 몇 년이 지나면 동독에 남아 있는 가족들을 찾을 수 있었다.

1960년대부터 동서독 민간교류는 지금 한국에서는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활발해졌다. 서독사람들 누구나, 어느 때나 돈만 내면 동독을 별 문제 없이 갈 수 있었다. 1970년에 동독을 찾아간 서독 방문객 수는 125만 명, 1980년에는 227만 명에 이르렀다. 동독사람들의 서독 방문도 가능해서 노령 퇴직을 한 사람이면 별 제한이 없었다.

동서독 방송교류는 오래 돼

법률적인 면에서도 독일과 한국의 차이는 크다. 1948년 한반도에 두 개의 국가가 생겼을 때 남북은 각각 유일한 합법정부라고 주장하면서 치열한 ‘정당성 전쟁’을 수행해 왔다.

독일 경우에는 1960년대까지 비슷했지만 나중에 국가간의 관계가 완전히 정상화되었다. 1972년 ‘기본 조약’ (Basic Treaty)을 조인한 동독과 서독은 서로 주권국가로 무조건 인정하고 정상국가간 외교를 수교했다. 동독 수도인 베를린에 서독대사관이 있었고 서독 수도인 본에 동독 대사관도 있었다.

정보 교류도 너무 다양했다. 동서독은 면적도 크지 않은 나라이니까 ‘다른 독일’의 방송을 전국 어디에서나 쉽게 수신할 수 있었다. 서독에서는 당연히 아무런 제한이 없었고 동독도 소련처럼 외국방송 방해를 거의 하지 않았다. 물론 라디오는 없는 집이 없었다. 그래서 독일 사람들은 서로 소식도 듣고 양국간의 대중문화도 잘 알았다.

동독에서 서독 TV방송을 거의 대부분 수신할 수 있었다. 얼마 전 한 사회학자는 “독일분단 45년 동안 문화적 공통성에 제일 많이 참여한 것이 바로 동서독인들이 다 볼 수 있었던 TV방송”이라고 했다.

북한은 2000년을 전후하여 외제 VCR이 들어가 남한 영화와 연속극을 몰래 보게 되었지만, 동독에서는 벌써 1950년대부터 서독 대중문화에 대해 듣고 싶은 것 들었고 보고 싶은 것은 다 봤다. 실제로 서독TV를 안보는 집이 동독에 없었다고 한다.

한국 사람들이 들으면 놀라운 이야기가 될지 모르겠지만 동독에서는 서독 간행물까지 팔았다. 물론 동독체제를 혹독하게 비판하는 글을 게재하는 간행물은 아니었지만 비정치적인 잡지나 책은 팔았다. 이것은 2005년에 평양에서 ‘과학동아’지나 ‘산’지와 같은 서울 잡지를 구할 수 있는 것과 유사하다.

동독은 참혹한 독재 아니었다

원래 북한과 동독은 소련체제를 모방할 수밖에 없었지만 1953년 스탈린 사망 후 서로 다른 길로 나갔다. 북한은 극단적인 스탈린주의 체제를 유지했으나, 동독은 개혁을 통해 훨씬 더 온건한 권위주의로 바꾸었다.

1954년 이후 동독에서 사형당한 정치범은 한 명도 없었다. 1950년대 말 수용소에 갇힌 정치범의 수가 제일 많았을 때도 불과 수 천명이었다. 인구는 서로 비슷하지만 수용소에 15만 명의 정치범이 갇힌 북한과 비교해보면 2-3%에 불과하다.

동독에서는 1970년대부터 비정치적인 민간단체의 활동이 가능했다. 때로는 이러한 활동이 사실상 정치화되기도 했다. 대표적인 사례는 동독에서 영향력이 컸던 환경보호단체가 정부의 경제정책을 비판한 것이었다. 물론 종교의 자유도 있었고 정부에서 독립된 교회들은 직접 정치에 참가하지는 못했지만 영향력이 컸다.

정치적 압박의 수준을 정확하게 측량하는 방법은 없지만, 말하자면 1970-80년대 동독의 권위주의는 1970년대 남한의 유신독재와 비슷한 수준으로 보인다. 물론 문화도 정치환경도 다르니까 차이가 많지만 대체로 일치하는 것같다.

남한의 역사적인 경험을 절대화 하는 한국의 좌파들에게 유신독재는 악의 상징, 정치적 압력의 상징처럼 되어 있다. 러시아에는 “다른 동물을 보지 못한 쥐는 고양이보다 더 무서운 동물은 없다”는 속담이 있다.

구소련의 엄격한 독재를 체험한 필자로서는 유신독재나 그와 비슷한 동독체제를 참혹한 체제로 보기 어렵다. 물론 자유와 인권을 침해했지만 고전 스탈린주의에 의한 살인적인 독재와 비교해 보면 1960-80년대의 동독은 살 만한 나라였다.

동독의 경우를 참극의 나라 북한에 적용하긴 어렵다.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초빙교수, 역사학 박사

<필자 약력>
-구소련 레닌그라드 출생(1963)
-레닌그라드 국립대 입학
-김일성종합대 유학(조선어문학과 1986년 졸업)
-레닌그라드대 박사(한국사)
-호주국립대학교 한국사 교수(1996)
-저서 : <북한현대정치사>(1995) <스탈린에서 김일성으로>(From Stalin to Kim Il Sung 2002) <북한의 위기>(Crisis in North Korea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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