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지원전투, 머리카락 곤두선다”

▲ 퇴비작업을하고 있는 남양주민들 ⓒ데일리NK

‘농촌지원전투’는 말 그대로 노동자, 사무원, 학생, 군인,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농사일을 돕는 것이다.

물론 농장의 주인이라고 하는 농장원들이 있기는 하지만 변변한 농기계가 없는 조선의 현실에서는 인력으로 모든 농사일을 하다 보니 일손이 부족해서 시기를 놓치는 경우가 많다.

조선에서 농촌지원활동은 1년 내내 항시적으로 진행된다. 외국사람들은 조선의 ‘농촌지원활동’과 ‘농촌지원전투’를 잘 구별하지 못하는 것 같다. ‘활동’은 1년 4계절 내내 일상적으로 진행되는 사업이고, ‘전투’는 봄과 가을철에 ‘밥숟가락 들 수 있는 사람은 모두 농촌으로’ 내몰리는 국가적 집중사업이다.

‘전투’ 때는 소속단위의 출장증명서가 없으면 다른 지방에 여행을 다닐 수 없고, 장마당에 나가 물건을 사거나 파는 일도 할 수 없다.

내 집 변소에 자물쇠를 채워야 하는 이유

먼저 농촌지원활동에 대해 알아보자.

농촌의 1년을 살펴보면 우선 겨울철은 거름생산에 총집중이다. 1월 1일~2일 공휴일을 보내고 1월 3일부터 전국의 모든 공장, 기업소, 군부대에서는 김정일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충성의 선서모임’이 끝나자마자 거름생산에 나선다.

평양이든 지방이든, 도시나 농촌 할 것 없이 동시에 시작된다. 거름량은 기업소, 학교, 인민반 등 각급 단위마다 계획량이 정해진다. 노동자의 경우 내가 속한 기업소에도 거름을 바쳐야 하고 인민반에서 제기되는 세대별 정량을 또 바쳐 한다.

거름생산도 경쟁을 조직하여 바치는 거름량에 따라 평가사업을 진행하는데, 꼴찌를 차지한 단위에서는 그에 따른 비판과 제재가 가해지기 때문에 길 바닥에 떨어진 개똥 한 덩어리도 귀한 것이 된다.

농촌지역이나 소도시 외곽에 위치한 세대들에게는 자기 집 변소에 쌓은 인분도 적지 않은 값어치를 하게 된다. 아파트가 농촌지역 가구들은 자기변소에 쌓인 인분을 거름으로 쓰기 때문에 집집마다 인분을 모아 놓는다. 조선에는 ‘인분도둑’도 있다.

모아둔 인분은 여름철 채소농사는 그 인분을 흙과 섞어서 말린 다음 비료 대용으로 사용하거나 돼지먹이로 사용하기 때문에 인분을 도둑 맞지 않으려고 자기집 변소에 열쇠를 채우는 극성스러운 사람들도 더러 있다.

그러나 집 변소에 열쇠까지 채우면서 모아둔 인분만 갖고는 바쳐야 할 책임량을 채울 수 없다. 소나 돼지를 키우는 집들도 형편은 똑같다. 그래서 한겨울에 얼어붙은 땅을 파서 니탄(泥炭)을 캐내기도 하고, 톱밥무지에 소변을 재워 퇴비를 만들기도 한다.

보통 농촌 지방의 1개 세대에서는 1년에 약 1톤 정도의 퇴비를 바쳐야 한다. 결국 1월 초부터 2월 16일 김정일 생일까지는 거름생산에 온 힘을 기울여야 한다. 길가의 밭에서는 기업소별, 단위별로 거름더미를 만들어 경쟁을 부추키는 것이 겨울철 농촌 풍경이다.

인분을 얻으러 다니는 평양시민들

평양을 비롯한 대도시에서도 거름생산 전투는 진행된다. 평양에서는 1월 3일 ‘충성의 선서모임’이 끝나고 나면 ‘퇴비생산전투’와 ‘화력발전소지원전투’가 동시에 시작된다. 평양 시민들은 거름을 등에 짊어지고 평양시 주변 농장에 나가는 일과 지정 받은 날짜에 평양화력발전소(평양시 평천구역에 위치)에 나가 발전소 노동자들을 도와 석탄을 나르는 일을 동시에 수행해야 한다.

‘화력발전소지원전투’는 자기 몸으로 떼우면 되지만, ‘퇴비생산전투’는 평양시민들에게 큰 부담으로 다가온다. 통일거리나 광복거리, 특히 중구역 고층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동대원구역 같은 단층집이 많은 곳에 사는 친지나 지인들에게 도움을 받아야 한다. 텃밭이 없는 동대원구역 사람들에게 변소에 쌓이는 인분은 거추장스러운 것이기 때문에 인분을 흙과 섞어서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퍼주곤 한다.

‘퇴비생산전투’와 관련해서 조선민주여성동맹 조직이 제일 극성스럽게 가두여성들을 괴롭힌다. 가두여성이란 직장에 출근하고 집에서 살림만 하며 여맹조직생활을 하는 여성들을 말한다. 할당된 거름을 바치지 못한 가두여성들에게는 주민들에게 모아진 거름을 농촌으로 옮기는 과업이 부여된다.

농촌으로 거름을 보낼 때 버스나 무궤도전차를 이용하지 않기 때문에 단위 별로 줄을 지어 농촌까지 수레를 끌고 가야 하는데,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는 가두여성들이 여기에 동원된다. 하루 종일 수레를 끌고 가는 것도 만만치 않지만, 그 옆에서 꽹가리를 치거나 붉은 깃발을 흔들면서 농촌까지 다녀와야 하는 여성들도 힘들긴 마찬가지다.

물 한 모금 얻어먹기도 힘들어

봄철에는 벼 모판 만들기, 강냉이 영양단지 만들기, 모내기 등이 진행된다. 특히 일요일에는 무조건 점심을 싸들고 농촌지원에 나가야 한다. 배정 받은 농장의 작업반 분조에 도착하면 현지 농장의 농민 중 한 사람을 ‘지도농민’으로 붙여준다. 그 농민을 따라 지시를 받고 그 날 과제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식이다.

평양 시민들은 새벽에 열차를 타고 평안남도 일대의 농촌에 나가 하루 종일 일하고 밤에 돌아오는 경우도 있다. 가두여성들은 보통 3일에 한번씩 농촌지원에 동원된다. 농촌을 돕는다는 명목으로 나가기는 하지만 실제로 보면 물 한 모금도 공짜로 얻어먹기 힘들다. 농촌인심이 야박해서가 아니라 실제 농민들의 생활처지가 그만큼 한심하기 때문이다.

인민학교 학생과 중학교 1~3학년 학생들은 보통 ‘모뜨기’에 동원된다. 또한 강냉이 영양단지를 옮기는 것도 어린 학생들의 몫이라, 강냉이 영양단지를 ‘학생단지’라고 부르기도 한다. 농장에 나가면 각계 각층에서 지원 나온 사람들이 모두 모이게 되는데 현지 농장의 농민들은 이 사람들의 소조를 한 개씩 맡아 농사일을 지도하게 된다.

여름철에는 봄철 모내기 전투보다 농촌지원활동이 뜸해진다. 여맹조직에 소속된 가두여성들은 자주 나가는 편이지만 학생, 노동자, 사무원들은 주로 일요일에 나간다. 논에 들어가 잡초를 뽑는 김매기가 기본이고 풀베기도 많이 하는 일이다. 풀을 베어서 쌓아 놓고 다음해에 거름으로 쓰기 때문이다.

이때 중학교 학생들은 옥수수 밭, 감자 밭의 김매기에 동원되고 소학교 학생들은 ‘딱정벌레 잡기’ 같은 벌레잡이에 동원된다. 농약이 부족해 벌레가 생기면 어린 학생들의 손을 이용하는 것이다.

가을걷이 역시 전국적으로 총집중하는 전투다. 우선 옥수수를 베고 이삭을 따고 옥수수 대를 모아두는 옥수수 수확을 끝내고 벼를 벤다. 이때도 군인, 학생, 노동자 할 것 없이 온 백성이 다 동원된다. 소학교 학생들과 중학교 1~3학년 학생들은 이삭줍기에 동원된다.

농촌지원전투는 온 백성에게 악몽

대략 이 정도가 조선에서 통칭되는 ‘농촌지원활동’이다. 조선 사람 입장에서는 해마다 전국적으로, 전사회적으로 진행되는 평범한 활동이다. 조선 사람 입장에서 이런 농촌지원활동은 크게 힘들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농촌지원에 나가 하루 하루 채워야 할 ‘공수’가 할당되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리 새벽에 집을 나서도 집합하여 작업분 분조를 배정받고 해당 작업지에 들어서면 최소한 오전 8시 30분이다. 오후 1시까지 일을 한다고 하더라도 1시간 점심시간을 갖고 오후 5~6시면 작업시간이 끝나기 때문에 노동에 단련된 조선백성의 입장에서는 큰 부담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솔직히 배나온 간부들에게 조차도 일정한 운동도 되고, 상쾌한 농촌 바람이나 쐬다가 작업반장이나 분조장과 앉아서 담배나 피우면서 빈둥거릴 수 있으니 농촌지원활동에 큰 불만을 가질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백성들은 ‘농촌지원’이라는 말만 들으면 머리카락이 곤두서게 된다. 그것은 봄철과 가을철에 진행되는 ‘농촌지원전투’에 대한 고생스러운 기억 때문이다. 조선사람이라면 중학교 4학년부터 6학년까지, 대학생인 경우 대학시절 전기간 ‘농촌지원전투’에 대한 경험을 갖고 있다. 조선에서 군대에 안간 사람은 있어도 ‘농촌지원전투’를 안간 사람은 극히 드물다. 그 악몽 같은 기억은 인민학교부터 시작된다.

인민학교 학생들, 고사리 손으로 벌레잡기

국가적으로 ‘농촌지원전투’가 선포되면 인민학교 학생들도 동원된다. 물론 도시에 사는 인민학교 학생들은 농촌 학생보다 낫다. 하지만 평양시에서는 집단체조를 비롯하여 각종 국가행사 훈련에 동원되어야 하니 농촌지역 학생보다 반드시 낫다고 보기 힘들다.

지방도시의 인민학교 학생들은 수업을 마치고 주변 농장에 나가 모뜨기를 돕는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모대를 한 대씩 뽑아야 한다. 한 모판에 한 개 학급이 모여 앉아 담임교원과 지도 농민의 지도 밑에 모를 뽑는다. 내가 소학교 시절에 우리 담임선생님이 “모대 한 개를 끊어 놓으면 벌금 5전씩 물리겠다”고 엄포를 놓았던 기억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나와 동무들은 모대가 끊어지지 않게 뽑기 위해 구슬땀을 흘렸다. 우리가 모대를 뽑아 흙을 털어 놓으면 지도 농민들과 교원들이 단으로 묶어 놓았다.

인민학교 학생들은 논밭에 나가 일하는 것 외에 예술공연을 준비하여 휴식시간에 농장원들과 지원 나온 사람들 앞에서 공연을 벌여야 했다. 그러니 학생들에게는 휴식시간도 잘 보장되지 않는 셈이었다.

벌레잡이도 인민학교 학생들의 중요 과업 중 하나다. 털벌레, 딱정벌레, 메뚜기 등을 잡는 일이었는데 여자 아이들은 징그럽고 무섭다고 울먹이면서도 어쩔 수 없이 벌레 통을 갖고 다녔다. 벌레잡이가 끝나면 누가 많이 잡고 누가 적게 잡았는지 총화를 짓는데 꼴찌는 항상 담임교원의 지적을 받는다.

조선은 1등에게 차려지는 특혜보다 꼴찌에게 가해지는 압력이 더 크다. 다른 나라 아동들은 1등을 위해 노력하는 법을 배우지만, 조선의 아동들은 꼴찌를 면하기 위해 눈치 보는 법부터 배운다. 꼴찌한 동무의 자기비판을 바라보며 은연중에 그런 사상이 싹트는 것 같다.

내가 인민학교 학생이던 시절, 최고의 악몽은 단연 구더기 잡이였다. 한여름에 부글부글 끓어 오르는 농촌의 변소에서 구더기를 나무막대기로 잡으려면 무섭고 징그러워 진땀을 흘려야 했다. 구더기만 보면 울음을 터트리던 사촌 여동생은 삼촌이 미리 구더기 몇 마리를 비닐에 싸서 농장에 나가기 전에 챙겨주기도 했다. 구더기도 할당량이 있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가을철 농촌지원전투에서 인민학교 학생들은 이삭줍기에 나서야 한다. 벼 베기를 마친 논에 들어가서 벼 이삭을 주워 담임 교원에게 바치는 것이다. 물이 채 안 빠진 논에 들어가게 되는 경우 어린 학생들이 넘어져서 옷을 버리는 일도 자주 있었다. 매정한 교원들은 이삭줍기 총화를 할 때 어린 학생들의 바지주머니를 뒤지기도 한다.

물론 어린 아이들을 다그쳐서 할당량을 채워야 하는 교원의 입장도 딱하지만, 벼 이삭 몇 알을 바지주머니에 감추었다는 이유로 큰 잘못을 지은 것 마냥 눈가에 눈물이 맺혀 고개를 떨구어야 했던 내 동무들에게 무슨 죄가 있었다는 말인가? 그 때는 ‘재수가 없는 놈이구나’하고 지나쳤는데, 지금 다시 생각하니 화가 나서 심장이 터질 것 같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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