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장 간부 밥상은 쌀밥 돼지고기 명태 기본이 7찬

나는 1990년대 후반 어머니가 집을 떠난 후 아버지와 오빠 셋이 함께 살았다. 어머니는 돈을 벌기 위해 북중 국경을 넘었고 아버지는 어머니 없이 오빠와 나를 키우느라 바쁘게 사셨다.


소학교 시절에 농장일을 하시는 아버지는 하루도 빠짐없이 출근해 열심히 일하셨다. 오빠는 당시 중학교를 다녔다. 집에는 개, 닭, 토끼 같은 짐승들이 있었는데 이것들을 사육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짐승키우기는 어려서부터 내 몫이었다.


우리 집의 생계는 이 짐승들에게 달려있었다고 해도 크게 다르지 않다. 어머니가 집을 나기시고 나서는 나는 소학교도 중도에 포기하고 집에서 짐승들을 돌봐야 했다. 부모들은 나가 일해야 하니 나 말고도 학교에도 가지 못하고 집을 지키는 애들이 한 두 명이 아니었다.


시도 때도 없이 출몰하는 도둑들 때문에 도저히 집을 비울수가 없어 학교를 가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우리 집은 내가 없으면 집이 비어있다는 것을 알고 내가 학교에 가기만 하면 무조건 집에 도둑이 들었다.


아버지는 오빠에게 ‘사내 자식은 꼭 공부를 해야 한다’고 하셨기 때문에 오빠가 살림에 관심을 두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버지 역시 집안의 가장이셨고 또 어머니의 탈북이 나라를 ‘배신’하는 행위라는 자책감에 잠겨 궂은 날 마른 날 가리지 않으시고 열심히 일했다.


집안에서 일체 모든 살림살이는 자연히 나이는 어리지만 유일한 여자인 나에게 차려졌다. 좋고 싫고가 없이 나는 무조건 가사를 돌보는 안주인이 되어버렸다.


이러한 가정환경은 어린 나를 일찍부터 조숙하게 만들었고 살림살이의 요령을 배우게 만들어주었다. 아버지는 1년 내내 열심히 일하셨지만 그래봐야 한 해 농사를 마무리한 겨울이 되어 손에 쥐어지는 돈은 10만원 정도였다.


사실 제대로 돈을 받게 되면 23만원 정도는 될 수 있다. 그런데 분배 받는 쌀값을 제하고, 또 농장 연구실을 짓는 비용을 비롯해 각종 명목으로 돈을 제하고 나니 일반 농장원들의 손에 쥐어지는 건 많아야 10만원이었다. 이 돈으로 다음 해 분배를 탈 때까지 살아야 했다.


하지만 리 관리위원회나 리당 간부들은 유급 간부라는 명목하에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도 년간 25만원이라는 현금과 2톤 가량의 옥수수가 세대별로 보장됐다. 남새를 비롯한 기타 부식물들도 일반 농장원들보다 2, 3배씩 타먹었다. 가을마다 일반 농장원들 집에는 고추가 20㎏정도 차려지지만 간부들은 10포대(400㎏)씩 들여갔다.


북한에서 돼지 한 마리를 50㎏이 넘게 키우려면 옥수수 가루를 30㎏ 정도는 먹여야 한다. 그런데 시장에서 옥수수 1㎏이 1000원(구화폐 기준) 했다면 50㎏ 키우는 데 2만 4천 원이 드는 셈이다. 하지만 일반 농장원들은 사람이 먹을 것도 모자라는 판에 이런 호사는 꿈도 꿀 수 없다.


돼지는 죽이지 않은채로 팔면 1㎏당 3천원이니 50㎏면 15만원이고 고기를 잡아서 육으로 파는 사람은  1㎏당 천원을 덧붙여 4천원에 판다. 15만 원으로 다시 새끼돼지를 사려면 6만 원이다. 그럼 손에 남는 돈은 9만 원이다.


결국 무엇 하나 싸게 살 수 없는 일반 농장원들에게 짐승 키우는 일은 인력도 많이 들지만 팔아서 이것 저것 떼고나면 남는 돈이 얼마 되지 않는다.


간부들은 집에서 기르는 짐승도 그 숫자가 일반 농장원보다 훨씬 많다. 또 일반 농장원들은 풀도 미처 먹이기 바쁘지만(어렵지만) 간부들은 옥수수를 비롯한 알곡을 끓여 먹였다. 


이들은 새끼돼지도 농장 돈사에서 공짜로 가져오는데다 키우는 것도 사료를 팍팍 먹여 키우니 짐승기르기도 식은 죽 먹기고 돈도 쉽게 번다. 이래 저래 일반 농장원들은 살기 힘들고 간부들만 잘 살게 되어 있었다.


리 간부들은 짐승뿐 아니라 먹고 사는 것도 우리 일반 농장원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리에서 간부하는 사람들의 밥상을 들여다보면 이밥은 당연하고 찬도 보통 없어서 7가지다. 매 끼마다 명태나 까나리, 송어 등의 어물류와 돼지고기는 빼지 않고 오르며 야채, 튀김, 전 등 여러 가지 진수성찬을 갖춰 먹는다.


또 일년 내내 농장에서 땔감을 보장해준다. 분조별로 담당해서 한 달에 참나무 80통(둘레 20㎝, 길이 400㎝)씩 마련해준다. 이만한 량이면 소달구지로 두 달구지 정도 되는데 한 달구지만도 8만 원에 맞먹는 량이었다.


또 석탄은 해마다 좋은 것을 2톤씩 공급하며 땔감을 실어다 주다 못해 나무 패주는 사람까지 조직해 간부들의 집에 팬 나무가 떨어질세라 보장해준다. 간부집에 가서 하루종일 나무를 팬 사람은 그 날 하루 일한 것으로 수당을 잡아준다.


북한의 농장들에서 간부생활을 한 사람들이 나이가 들어 간부를 그만두게 되면 살던 집(집터 300~500평, 방 및 창고 7칸)만 본인 것이 되지만 권력이 없기 때문에 각종 특권은 사라진다. 그래서 자신이 힘이 있을 때 하나라도 더 많이 끌어들이려 악착같이 거둬들인다. 


농장간부들의 비리가 얼마나 심했는지 2009년 5월 함경북도 **군의 **리에서는 리 간부들이 벼를 일인당 2~5톤씩 횡령한 것이 제기되어 중앙검열그루빠의 검열을 받고 리 관리위원회와 리당이 해산되고 결국 다른 리와 합쳐지는 일도 생겼다.


우리 집은 아버지가 일년 내내 열심히 일해도 현금은 기껏해야 10만원이다. 식량배급은 아버지와 나, 오빠가 받는 량이 모두 달랐다. 


농촌에서 분배받을 때 보면 초등학생 1명은 1년에 벼 50~70㎏이고 중학생인 경우 100~120㎏였다. 분배받은 벼는 정미해서 깨끗이 손질하면 기껏해야 70%밖에 나오지 않는다.


옥수수인 경우 어린 아이(초등학생도 포함)는 이삭채로 100~150㎏, 중학생은 200~300㎏였다. 어른인 아버지는 중학생인 오빠보다 20㎏를 더 받았다. 


년간 농장에서 분배로 차려지는 식량은 결국 아버지와 오빠, 나까지 셋이서 이삭강냉이 800㎏ 좀 더 되었는데 이것도 알로 까서 말리면 기껏해야 200㎏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농촌 사람들은 밥이 주식이고 기름을 비롯한 다른 영양보충거리들이 부족했다. 보통 농촌 집들에서 식구에 관계없이 한 달에 소비하는 기름은 반병 정도밖에 되지 않는데 부족 되는 영양보충을 전부 밥으로 하려 한다. 그러니 당연히 먹는 량이 많을 수밖에 없다.


평균 1인이 한 끼에 옥수수쌀로는 400그람, 흰쌀로는 200그람 밥을 먹는데 이렇게 계산하게 되면 우리 집은 여자인 내가 좀 적게 먹는다고 해도 하루 평균 잡아 3㎏의 옥수수쌀이 있어야 한다.


한 달이면 90㎏, 1년이면 1100㎏ 정도의 옥수수쌀이 있어야 하는데 농장에서 분배로 받는 옥수수쌀은 기껏해야 200㎏, 백미는 정미하면 200㎏, 합쳐서 400kg인데 이 것 으로 일 년 동안 먹고 살기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부족한 식량은 짐승을 기르거나 소토지가 있는 사람들은 옥수수나 감자 등을 심어 식량을 보탰다. 하지만 거의 모든 농장원들은 먹을 것이 떨어지면 농장에서 쌀을 전불(꾸어먹는 것)로 얻어다 먹었다.


어떤 집들은 해마다 늘어나는 전불 덕분에 빚더미에 앉아 나중에는 돈이고 쌀이고 아무것도 배급받지 못한 집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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