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배고파”…앉은 자리서 속도전가루 4kg 먹고 응급실行

나는 교화소에서 내로라하는 반장, 티들과 어깨를 나란히 겨루며 생활했다. 때문에 다른 교화반에서 일어났던 충격적인 사건, 보안원들의 악행, 심지어 2과와 4과 등 분소에서 일어나는 실태까지 잘 알게 되었다.

내가 일반 죄인이었다면 다른 반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일까지는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교화소에서는 다른 반에 고향 친구가 전입을 와도 반장이나 티의 승인 없이는 움직일 수 없기 때문이다.

보통 일반 죄인들은 남의 일에 관심 갖기보다는 오직 배고픔을 면할 수 있는 먹는 문제에 모든 신경을 집중한다.

나는 전거리 교화소에서 많은 일을 보고, 듣고, 느끼면서 나름대로 인생수업을 쌓았다고 생각한다. 나쁘다고 생각되는 것은 과감하게 배척하고, 좋은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배우고 내 것으로 만들었다.

그것들이 현재 중국 생활에서 큰 밑천이 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 스스로 전거리 교화소에서 가장 처음 배운 것은 남을 딛고 올라서는 ‘포악성’이었다.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포악성을 소유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교화소에서는 ‘내가 살기 위해 너를 딛고 올라서야 한다.’는 생각이 첫 번째로 자리 잡게 된다. 그리고 이 포악성이 시간이 지나면서 좀 더 세련되게 되면 교활성을 가진 비인간적인 사람으로 변하게 된다.

이즈음에서 사람이 두 가지 부류로 나뉘게 된다.

첫 번째 부류는 교화소의 나쁜 분위기에 물들지 않고 사회에서 자기가 갖고 있던 가치와 생활 방식에 따라 자기보다 어려운 사람들의 고통을 이해하며 그 사람의 심리적, 육체적 고통을 함께 풀어가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이 출소해서 사회로 돌아가면 교화소에 다녀왔다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자신의 능력에 따라 타인의 부러움을 사면서 열심히 살아간다.

두 번째 부류는 교화소에서 습득한 너절한 가치를 자신의 인생관으로 확정하여 불행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출소자 대부분은 사회에 돌아가도 대중의 비난과 조소를 이겨내지 못하고 다시 교화소에 잡혀온다.

죄인들이 이런 악순환을 겪는 이유는 교화소의 교화 정책에 있다. 교화소에서는 죄인들이 스스로 자기 죄를 반성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멀쩡한 사람도 포악하고 교활한 짐승으로 만들어 버렸다.

교화소에서는 아무리 열심히 노동을 해도 먹는 문제조차 해결해주지 않았다. 때문에 많은 죄인들은 생활 형편이 어려워서 면회를 오지 못하는 아내나 가족들을 원망하게 되고, 출소해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서도 이런 원망들을 가슴속에서 지워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사회에서는 교화소 출신자라고 해서 일자리도 잘 주지 않고 배척하기만 하니까 술로 허송세월을 보내는 사람도 많다. 결국 이들은 도적질이나 협잡질에 빠져 다시 교화소에 붙잡혀온다.

곽만호는 당시 33살로 사기협잡으로 교화소에 세 번째 잡혀온 사람이었다. 말을 기막히게 잘한다는 것이 곽만호의 유일한 장점이었다.

곽만호가 전거리 교화소에 들어온 지 거의 1년 만에 그의 어머니가 첫 면회를 왔다. 나는 취사장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나오면서 면회 나갔던 곽만호가 면회반장과 함께 돌아오는 것을 목격했다.

먼발치에서 보니 면회반장이 곽만호에게 한바탕 욕을 하고 있었다. 면회반장은 함경북도 나진 출신으로 전직 외화벌이 단위에서 소장질을 했던 사람이었다. 말수도 적고, 죄인들 사이에서 평판이 괜찮은 사람이었다.

“야, 이 개새끼야! 이 사람 같지도 않은 새끼! 너 같은 것도 아들이라고 찾아온 어머니에게 그게 할 소리야? 이 개 같은 새끼야!”

평소 점잖던 사람이 저렇게 흥분할 정도면 분명 곽만호가 무슨 짓을 벌인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조용히 이유를 물었다.

“아, 이 새끼가 글쎄 늙은 제 엄마 앞에서 뭐라고 지껄였는지 아오? 내가 옆에서 들어보니 ‘노치 어째 이제야 왔소? 씨베, 배고파 죽을 뻔 했소.’ 이러지 않나? 그래도 그 엄마는 ‘그랬니? 글쎄 너가 힘든 줄 뻔히 알면서도 내가 너무 힘들어서 오늘에서야 왔다. 소토지 농사지은 강냉이 300kg을 팔아서 왔다.’며 달래는데, 이 새끼가 ‘에잇, 이 간나 노치, 됐다. 다음부터 내게 오지 말라!’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오! 에익, 이 사람 같지 않은 개새끼.”

면회반장은 흥분해 있었다. 면회반장의 말을 들은 나도 눈에서 불이 튀는 것 같았다. 순간 참을 수가 없어서 10kg이 되나 마나한 속도전가루를 메고 서 있던 곽만호의 얼굴을 걷어찼다.

마치 곽만호가 우리 어머니에게 욕을 한 것처럼 느껴졌다. 순간, 섭섭한 마음으로 맥없이 집으로 돌아갈 곽만호 어머니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대가리를 땅에 박고 코피를 쏟고 있는 곽만호에게 다시 한 번 발길질을 해주고 감방으로 돌아왔다.

감방에 돌아오니 저녁 배식이 진행 중이었다. 배식이 거의 끝날 때쯤 곽만호가 감방으로 들어왔다. 반장이 곽만호에게 물었다.

“야, 임마! 너 밥 먹겠나?”
“예, 아직 배가 안 차서 먹어야겠습니다.”

원래 죄인들 사이에서는 면회 음식을 먹고 오면 배식된 자기 밥을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는 관습이 있다. 사람들은 면회 음식을 먹고도 자기 밥을 먹겠다는 그를 곱지 않은 눈으로 쏘아봤지만, 반장이라 하더라도 죄인의 밥만은 강제로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 교화소의 법이었으므로 모두들 잠자코 있었다.

식사가 거의 끝날 쯤에 감시창이 열리면서 면회조장이 나를 찾았다.

“준하 조장!”
“무슨 일이오?”
“저 새끼, 방금 면식 칸에서 속도전가루 4kg을 혼자 반죽해서 먹었소. 면식소부에서는 그곳에서 먹을 수 없다고 하니까, 마침 들어온 비서선생에게 먹게 해달라고 사정을 하더군. 비서선생이 ‘임마 너 얼마나 먹겠나?’ 하니까 ‘예, 한 4kg은 먹을 수 있습니다.’ 하고 대답을 하는 거야. 비서선생이 ‘뭐, 4kg을? 너, 다 못 먹으면 나머지를 몽땅 너희 반 허약자들에게 먹인다.’고 엄포를 놓으니 그 자리에서 그 많은 것을 다 먹어 버렸소.”

뒤에 앉아 있던 곽만호를 쳐다보니 마지막 밥을 입에 넣다 말고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나는 짐승 같은 저 인간을 좀 때려놔야 속이 풀릴 것 같았다. 배식이 모두 정리되자 나는 곽만호를 불렀다.

“야, 곽만호!”
“예.”
“너 이쪽으로 오라!”
“예.”

그런데 엉기적 일어서던 곽만호의 입에서 순간 ‘우웩’ 하는 소리와 함께 아까 먹었던 것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갑자기 벼락을 맞은 사람들이 그에게 발길질을 하는데, 나는 너무 더러워서 내 옆에 오지 말라고 손사래를 쳤다. 이제는 그 인간에게 말도 걸기 싫었다.

새벽 2시. 결국 곽만호의 위가 곽만호 자신은 물론 우리 반 전체를 두들겨 깨웠다. 앓던 소리를 내던 곽만호의 눈이 하얗게 뒤집히면서 경련을 일으킨 것이다.

“벌목! 벌목!”

배식공이었던 현철이 소리를 지르자 술주정뱅이 종학 선생이 가래 낀 소리로 악을 썼다.

“왜 잠도 못 자게 고아대? 빌어먹을 새끼들아!”

종학 선생은 신발을 신은 채 감방 안에 들어와 곽만호를 살펴보더니 위생원 두 명을 불러 곽만호를 데리고 나갔다.

그날 새벽 곽만호는 함경북도 회령시에 있는 병원에 실려가 수술을 받고야 살아났다. 다음날 아침 교화소에 돌아온 위생원들이 하는 말이 곽만호가 급성 위경련이 일어났는데, 위에서 꺼낸 음식 양이 양동이 하나에 작은 세숫대야 하나였다고 했다.

나는 믿기지 않았지만 곽만호를 데리고 갔던 위생원들과 그들을 감시하러 따라갔던 초병들이 한결같이 ‘한 양동이’였다고 해서 그 사실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사람 위가 잘 늘어난다고 하지만 놀라운 일이었다. 나중에 내가 출소해서 어머니와 고향 친구들에게 곽만호에 대한 이야기를 해줬더니 모두가 믿지 않았다. 나는 그때 곽만호에 대한 인상이 너무 나빠져서 그 후로는 ‘만호’라는 이름을 쓰는 사람들은 모두 싫어했다.

어쨌든 운이 좋았는지 곽만호는 그날 위경련으로 인해 병보석을 받아 병원에서 석방됐다. 그런데 1년 3개월 후, 곽만호는 또다시 전거리 교화소에 잡혀 왔다.

병보석으로 나갔으면 조용히 살 것이지 어머니에게까지 주먹을 휘둘러 동네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는 것도 모자라 또 사기협잡질을 해서 붙잡혀 온 것이다. 이번에는 목공반에 배치됐다.

또 죄를 지어 교화소에 들어오면 전에 생활하던 작업반에는 들어갈 수 없었다. 그런데 목공 담당 보안원이 곽만호에게 돈을 받아먹었는지 이번에는 6개월 만에 또 병보석으로 석방됐다.

6개월 후, 곽만호는 또 전거리 교화소에 들어왔다. 그의 죄는 역시 또 ‘사기협잡’이었다. 처음에 교화소에 들어왔을 때 사기죄로 교화 6년이었던 그의 형량은 세 번째에 가서는 교화 10년으로 늘었다.

세 번째는 새로 생긴 농장 3반에 배치됐다. 내가 석방될 때 보니 곽만호는 허약 3도로 거의 죽기 일보직전이었다. 이제 생각하니 그도 참 불쌍한 인간이다.

만약 그가 아직도 살아있다면 어머니와 가족을 귀중히 여길 줄 알며, 더 이상 남의 손가락질을 받지 않는 평범한 사람으로 변모했기를 기원한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