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 45년만에 최초 남북 고위급회담을 이끈 강영훈 전 총리(87세)의 회고록이 출간됐다.
회고록 『나라를 사랑한 벽창우』(동아일보사)는 1921년 평안북도의 작은 마을 창성에서 태어나, 일국의 총리가 되기까지의 성장과정과, 자신의 삶에 그대로 녹아 있는 한국 근현대사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특히 1988년부터 1990년까지 국무총리로 지내면서, 세 차례 남북 고위급회담을 이끌었던 과정과 김일성 주석과의 대화를 회고록은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1988년 11월 북측은 부총리급 남북고위급정치군사회담을 제의했다.
한달 뒤 총리직에 오른 강 전 총리는 급변하는 국제정치 정세하에서 북측의 대남전략의 변화를 기대하며, 총리급으로 회담을 격상해 북측에 제의했다.
이 제의에 대해 북한 연형묵 총리는, ‘귀측에 회신에 불만스런 점들이 있지만 북남고위급정치군사회담 제의에 원칙적으로 동의한다’는 답장을 보냈다.
그러나 회담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예비회담에서부터 회담 명칭을 두고 남측은 ‘남북고위당국자회담’, 북측은 ‘북남고위급정치군사회담’으로 하자는 등 주장이 엇갈렸기 때문이다. ‘남북고위급회담’이라는 명칭에 합의하는 데만 1년이 걸렸다. 주요 의제 역시 내용이 일견 동일하면서도 표현에서의 차이를 두고 7개월의 시간을 보냈다.
강 전 총리는 회담 명칭과 회담 의제 합의만 1년 반 이상의 세월이 걸리는 것을 보면서 결코 남북고위급회담의 전도를 낙관할 수만은 없었다며, 북한은 회담 명칭 하나하나에도 대남 혁명전략을 반영하려 했다고 회상한다.
“북측은 남북통일을 계급투쟁에 의한 적색혁명을 통해 성취할 수 있다는 가정 하에 헌법 상위의 권한을 가진 노동당 규약 전문에 구체적인 기본 전략을 명시하고 있었다. 즉 남한에서 소위 ‘미 제국주의 점령군을 몰아내고 남한에서의 식민지 통치를 청산하며 일본 군국주의의 재침 기도를 좌절시키고, 남한 인민의 사회민주화와 생존권 투쟁을 적극 지원한다’는 내용이었다. 그 같은 민족통일을 위한 기본 전략에 어떤 수정이나 변경이 없는 한, 총리회담도 북측의 대남 전략의 일부에 불과할 수밖에 없었다. …(중략)… 이같이 회담 명칭과 회담의제 합의에만 1년 반 이상의 세월이 걸리는 것을 보면서 나는 결코 남북고위급회담의 전도를 낙관할 수만은 없었다. 회담 명칭, 회담 의제의 표기 순서 하나하나가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공산주의 사상과 북측의 대남 혁명전략을 반영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남북은 1990년 9월 서울에서 제1차 남북고위급회담을 열게 됐다.
하지만 회담 과정 역시 만만치 않았다. 강 전 총리는 북한의 연형묵 총리가 소위 3개 원칙, 3개 현안이라고 들고 나온, 남북 유엔동시 가입반대, 한미합동 군사훈련 중단, 방북인사 석방 등을 듣고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그는 북한의 이 같은 주장은 한마디로, “대한민국 정부는 자주성이 없을 뿐 아니라 평화를 운운하지만 말뿐이고, 통일을 말하지만 민족 분열을 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고 지적한다.
강 전 총리는 이러한 북측의 주장에 하나씩 근거를 들어 반박했다.
특히, 연 총리가 한미합동군사훈련 기간에 자신이 불안해서 밤잠을 못 잔다고 한 것에 대해, “당신들이 팀스피리트 기간에 잠을 못 잔다면 우리는 1년 열두 달 내내 잠을 편히 못 자고 있소. 북측에서는 우리 측보다 2배 이상 군사력을 증강해놓고 그것도 장거리포 사정거리 안에 있는 수도 서울을 향해 휴전선에 바싹 근접시켜서 일선 배치해 놓고 있으니 언제 다시 남침을 해올지 모른다는 우리 국민들의 걱정이 태산 같소. 그렇기에 우리로서는 방어적 견지에서 훈련을 하지 않을 수 없고 또 그 방어 성격을 똑바로 인식시키기 위해 북측 군사전문가를 초청하고 있지 않소. 뿐만 아니라 미군을 한반도에 끌어들인 것은 6.25 남침 때 당신들이 초래한 결과가 아니오.”라고 말했다. 이에 연형묵 총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고 강 전 총리는 기록하고 있다.
남북고위급회담은 차수를 이어 1990년 10월, 평양에서 제2차 회담을 가졌다.
평양에서 김일성 주석과 만난, 강영훈 총리는 “국민감정을 고려해 김 주석에 대해 ‘각하’라는 호칭을 안 쓰기로 결심했지만, 김 주석이 내게 ‘강영훈 총리 각하’라고 하는 바람에 나도 ‘주석 각하’라는 호칭을 썼다. 상대가 그렇게 호탕하게 나오는데 나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옹졸한 처사라고 생각했다”며, 김 주석과의 만남을 소개했다.
제1차 때와 달리, 북한은 제2,3차 회담에서 불가침 조약을 기본합의서에 포함시켜야 된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강 전 총리는 이 같은 주장에 대해 “그들의 의도는 주한미군 철수를 위한 한미 양국 내 여론을 조성하고 압력을 가하려는 것이었다”며 “그같은 북한의 대남 혁명전략에 속아 넘어갈 수는 없었다.”고 말한다.
불가침조약에 합의하지 않는 것을 납득하기 어려워하는 남한 국민들을 이해시키고, 북한의 불가침조약 주장을 단호히 거부하고 남북기본합의서를 이끌어낸 고위급회담에 대해, 강 전 총리는 실로 자신의 일생이 남북고위급회담을 사회(司會)하기 위한 준비과정이었는지 모른다고 회고한다.
“나는 내가 남북고위급회담에 대한민국의 총리로서 참여하게 된 것은 하느님의 뜻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군인으로서 의지를 단련했고, 만학이었지만 정치발전 이론을 공부하여 민주화 과정의 제반 문제를 고민했으며, 한국문제연구소에서 북한의 대남 전략을 연구할 기회가 있었다. 또 주영 대사직을 수행하면서 국제회의 진행 분위기도 이해하고 있었다. 그런 나의 인생행로를 돌이켜 볼 때, 이는 남북고위급회담을 주도케 하기 위한 하느님의 뜻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공산주의를 이기는 길은 진정한 민주국가를 건설하는 데 있으며, 평화통일을 위해서는 평화공존 단계를 거쳐야 된다는 나의 신념은 일평생 변함이 없었다. …(중략)… 북측을 일부러 헐뜯고 자극하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한번은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국민의 생각을 외면할 수도 없었다. 모든 것을 털어놓고 양측이 성실하게 타협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는 나의 소신에 대해 비판도 많았다. 그러나 나는 민족의 통일 문제에서 나에게 주어진 임무를 이행하기 위해 양심껏 최선을 다했다.”
국가 지도자로서, 자신의 소신을 보여준 강 전 총리의 모습은 그의 다양한 이력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5.16 당시 강 전 총리는 육군사관학교 교장을 맡고 있었다. 그는 당시 육사생도들이 정치도구로 쓰이는 것을 반대하며, ‘육사 생도 혁명 지지 시가행진’을 거부해 구속됐다.
그는 당시 자신을 회유하는 조사관에게, “공산당과 싸우는 대한민국의 대의명분이 민주정치를 하자는 것인데, 그 민주 헌정 체제가 무너진 데 대해 유감이다”며 자신의 소신을 밝혔다. 결국 3개월간 혁명검찰소 지하실 영창에 구금된 뒤, 강 전 총리는 중장으로 예편하게 된다.
그 후 유학길에 오른 강 전 총리는, 미국에서 공산주의에 대해 공부하며, 한편 한국문제연구소를 설립 한국사회에 민주주의 정착을 위한 방안을 연구했다.
1977년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한국외국어대학원장, 외무부 외교안보연구원장 등을 지낸 후 전두환 정부 시절 영국과 로마교황청 대사를 지냈다. 노태우 정부 시절 2년간의 총리직 지낸 후에는, 대한적십자사 총재직을 맡아 6년간 대북 지원 사업을 주도하기도 했다.
그는 한평생 자신의 사고를 지배하고 행동을 결정한 준칙은 ‘민본, 민족 그리고 자유민주주의 이념’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일제 시절, 차별받는 조선인의 처지를 보며 민족에 대해 각성하게 됐고, 육당 최남선 선생을 통해, 민족의 독립을 위해서는 힘을 길러야 함을 배웠다. 그는 이를 몸소 실천하기 위해 학병에 지원하게 됐다. 광복 후에는 북한 공산주의 체제를 경험하고 6.25전쟁을 치르면서,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쌓았다. 그는 이 신념을 지키기 위해, 5.16군사정권과 맞섰으며, 대남혁명 전략으로 무장한 북한을 상대로 당당한 회담을 이끌어냈다.
강 전 총리의 삶의 기록은,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기록이며, 격동기 대한민국을 일군 부모님 세대에 대한 기록이다.
강 전 총리는 손자들에게 우리 민족이 일본 식민지에서 벗어나 어떤 상황 속에서 독립국가를 이루어 나갔는지 알려주고 싶어 회고록을 집필하게 됐다고 밝힌다. 더불어 젊은 세대들이 세계화 시대를 맞이하여 국민으로서 본분을 다하면서, 개인 인생을 성취를 이루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고 전한다.
오늘의 대한민국을 사는 젊은이들은 민족을 넘어 세계 시민으로서의 정체성 확립과 북한 민주화라는 시대적 과제를 안고 있다. 세계화 물결 속에 또 다른 격동기를 맞이할 젊은이들에게 우리시대의 가치는 무엇이며, 그것을 지키기 위해 어떠한 노력이 필요한지 고민하게 하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