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버지는 南최초 첩보부대(HID) ‘물쥐’였다

“밤, 낮 가릴 것 없이 포탄이 날아들었다. 하루에 300여 발이 날아다니는 포화 속에서 나의 아버지는 첩보임무를 수행했다. 북한 인민군은 그런 아버지와 동료들을 ‘물쥐’라고 불렀다.”


지난 3월 미국에서 출판된 ‘My Father’s War’의 저자 황성 씨는 한국전쟁 당시 HID(Headquarters Intelligence Detachment) 첩보부대원이었던 황하용 씨의 아들이다.


아버지 황하용 씨는 한국전쟁 당시 첩보부대원들의 활동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책을 집필 중이었으나 지난 2001년 2차 원고를 탈고한 후 출판을 앞두고 세상을 떠났다. 황성 씨는 한국전쟁 당시 첩보부대원으로 활약했던 노병 30~40여 명 과의 인터뷰를 통해 이 책을 출간했다.


그는 아버지의 유고집이 된 책을 출간하기 위해 미국과 한국을 오가면서 자료 수집에 전력했고, 아버지의 원고를 합쳐 미국에서 먼저 책을 출간했다. 








My Father’s War에 수록돼 있는 영흥만지도.
웅도를 중심으로 침투경로가 표시돼 있다.

-‘My Father’s War’의 저자 황성씨 제공-


황성 씨는 이달 12일 데일리NK와 갖은 인터뷰에서 “한국전쟁 당시 나의 아버지가 활동했던 동해 영흥만은 남북 첩보전의 최격전 지역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북한 인민군은 영흥만 도서에 있는 첩보부대를 타격하기 위해 밤 낮 없이 포격을 가했고, 그 중에서도 특히 주요 부대들의 지휘소가 있는 여도에 포격이 집중됐었다”고 말했다. 


영흥만은 강원도와 함경남도가 접하는 지점에 있는 곳으로 휴전선에서 북쪽으로 상당히 떨어져 있는 곳에 위치해 있다.


북한은 영흥만 도서 곳곳에 상주하고 있는 첩보부대를 제거하려고 했지만, 부대원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정탐활동을 지속했다. 이들은 북한 점령지역에 피난민으로 위장 침투했고, 때론 전투까지 벌였다. 남북 양측의 첩보전이 치열했던 당시 영흥만은 아비규환이었다고 생존자들은 말하고 있다. 


황성 씨는 “당시 육군 HID는 아니지만 첩보부대에 활동했던 사람들 중 자신의 소속을 정확히 모르는 경우도 있었다”며 “이들은 전쟁 후에야 자신이 어떤 부대에 속했는지 알게 됐다”고 전했다.


그는 “당시에는 ‘전쟁이 끝나면 영웅이 된다’ ‘부대에 들어가면 입을 것, 먹을 것, 잘 곳을 제공해준다’ ‘고향에 돌려보내 준다’ ‘가족을 찾아주겠다’는 말에 HID의 부대원이 된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북한지역 첩보활동’이라는 임무의 특성상 인민군 경력이 있는 자, 혹은 영흥만을 거쳐 내려오는 피난민 중 판단이 빠른 자 등 ‘똑똑해 보이는’ 북한 출신만이 HID로 차출됐다”면서 “한국전쟁 당시 남한과 미국의 첩보부대는 북한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라고 강조했다.


황 씨의 경우 조국(북한)을 다시 자유로운 민주주의 체제로 바꾸는 애국적인 일에 동참해야 겠다는 마음으로 KLO(Korea Liasion Office) 부대를 거쳐 HID 첩보부대원이 됐다고 한다. 


그를 비롯한 HID 첩보부대원들은 야간에 은밀히 북한군 후방으로 침투하여 게릴라, 기습, 암살, 첩보, 납치, 주요시설 폭파 등 각종 임무를 수행했다. 밤이면 물에서 올라와 첩보활동을 펼치고 해가 뜨면 사라지는 HID 첩보원들의 활동방식 때문에 북한군은 이들을 ‘물쥐’라고 불렀다.








빨간점上 – 故 김동석 당시 소령 HID 36 지구대장, 한국전쟁 4대 영웅 중 한명 
下 – 故 황하용씨, 인민군으로 위장 후 침투직전의 사진

-‘My Father’s War’의 저자 황성씨 제공-


특히 아버지 황하용 씨가 소속돼있던 ‘HID 36지구대 제2지대’의 첩보부대원들은 해상침투조로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HID의 ‘주력’이었다.  HID 36지구대 제2지대는 두 팀으로 나뉘어 교대로 침투작전을 수행했는데, 한 달에 3~4회 정도의 침투활동을 벌였다. 보통 공작기간은 2~3일 정도가 소요됐다.


이들 첩보부대는 당시 영흥만 인민군 고사포 독립 대대장을 적진 내에서 생포해 해안포 관련 군사기밀을 입수하기도 했다. 또한 지속적인 보급로 차단과 주요시설 폭발 공작으로 8만의 인민군을 영흥만 인근지역에 묶어놔 남하를 저지했다.


HID 첩보부대는 특별한 교육 절차가 없었다. 공식적인 교육은 일주일 간의 정신교육 뿐이었고 나머지 교육은 ‘생존해있는’ 첩보원들이 신입 첩보원들에게 가르치는 생존법과 인민군 노래, 인민군 제식훈련, 인민군 규칙 등이 전부였다. 


황성 씨는 인터뷰 말미에 “당시 첩보부대원으로 싸웠던 분들은 명예나 보상 따위를 바라지 않았다”며 “그들은 단지 고향에 돌아가고 싶다는 일념과 가족을 되찾고 싶은 마음에 목숨 걸고 싸운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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