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북 풍복호 선주 아들의 사모곡

“어머니, 아버지 돌아가신 날짜라도 알 수 있을지 모르니까 적십자회담이나 보고 몇 일만 더 있다 가시지 그랬어요” 1967년 서해 연평도 인근에서 조업 중 피랍된 풍복호 선주 최원모(당시 57세)씨의 장남 성구(65)씨는 남북적십자회담을 불과 나흘 앞두고 지난 19일 안타깝게 숨을 거둔 어머니 김애란씨의 영정을 어루만지면서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어머니는 2002년 4월 금강산에서 진행된 이산가족상봉에 참가했지만 남편의 생사는 끝내 확인하지 못했다. 결국 북쪽에 살고 있는 두 여동생만 보고 발길을 되돌려야 했던 아픔을 간직한 채 83세에 한 많은 인생의 마침표를 찍었다.

성구씨는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금강산에 다녀온 것을 후회하시기도 했습니다. 아버지의 생사를 확인하지 못한 후유증이 너무 컸던 셈이죠”라고 말했다.

그의 가족사에는 분단 및 6.25전쟁으로 인한 민족상잔의 비극과 납북자 가족으로 겪어야 했던 아픔이 모두 배어있다.

평안북도 정주가 고향인 아버지는 6.25 당시 일명 ‘동키부대’로 불렸던 미군 켈로(KLO) 부대의 일원으로 북쪽에서 치안대장으로 활동했다. 하지만 중공군이 밀고 내려오자 가족들은 1.4 후퇴 당시 유엔군을 따라 월남해 충남 서천에 터를 잡았다.

남쪽에서 어선을 세 척이나 보유한 선주 가족으로 유복한 생활을 했던 성구씨 가족은 가장이 납북되고 나서 가정이 거의 풍비박산나다시피 했다.

어머니는 가족의 생계를 맡아 생선장수로 나섰고 지방의 명문고를 나온 성구씨 역시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대학 진학을 포기했다. 동시에 납북자 가족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평생 번듯한 직업 한번 가질 수 없었던 연좌제의 피해자이기도 했다.

지금은 납북자가족모임 회장으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동생 성용(54)씨도 아버지의 납북에 따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어린시절 꽤 오랜 기간 방황을 했다고 성구씨는 귀띔했다.

그는 “다른 납북자 가족들 중에는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문도 당하고 불구가 된 사람도 있었다. 또 중앙정보부나 경찰로부터 동향을 감시받으면서 죄인처럼 살기도 했다”고 말했다.

성구씨는 이런 가족들의 아픔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오는 23∼25일 금강산에서 개최되는 제6차 남북적십자회담에서 납북자 생사확인 문제를 우선 타결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특히 그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결단으로 북측 대표단의 현충원 참배가 이뤄진 것을 거론, “우리(납북자) 문제가 해결되기 위해서는 김 위원장이 답방을 해야 한다”며 또다른 결단을 촉구했다.

성구씨는 북쪽의 가족을 두고 30년만에 귀향한 납북어부 고명섭(65)씨를 꼽으면서 “또다른 이산가족을 낳을 수 있는 만큼 송환만이 능사는 아닐 수도 있지만 우선 생사확인과 상봉이 이뤄져 가족들의 마음 속에 있는 응어리라도 하루빨리 풀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연합

소셜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