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북 동진27호 선원 절반 남측 가족 상봉

1987년 납북된 ‘동진 27호’ 선원 노성호, 진영호 씨가 26일 남북 이산가족 추석상봉 행사에서 남측의 누나 순호씨와 곡순씨를 각각 만남으로써 동진호 선원 12명가운데 지금까지 모두 5차례 6명이 남한 가족들과 재회했다.

갑판장 강희근씨가 2000년 11월 제2차 상봉 때 남쪽의 어머니 김삼례 씨를 만난 것을 시작으로 8차(2003.9) 때 선원 김상섭씨가 어머니 오말신씨를, 9차(2004.3) 때 선원 양용식씨가 아버지 양태형씨를, 12차(2005.11) 때 선원 정일남씨가 어머니 김종심씨를 각각 상봉, 생존을 알렸다.

그러나 선장 김순근씨를 비롯해 나머지 6명은 생사가 명확히 확인되지 않았으며 특히 일부는 사망했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최연소 선원이었던 임국재(1954년생)씨가 2003-2005년 모두 세 차례 탈북을 시도했다가 보위부에 발각돼 ‘1급 정치범 수용소’로 분류되는 함경북도 청진의 수성교화소에 수감된 후 사망했다고 ‘납북자가족모임’의 최성용 대표가 지난해 10월 주장한 게 그것.

선장 김순근씨와 어로장 최종석씨, 선원 김영현, 추영수, 박광현씨의 생존 여부와 거주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특히 지난 2001년 1월 북한의 평양방송은 ‘동진호 문제란 없다’는 제목의 보도에서 “선장 최종석과 어로장 김순근(선장과 어로장을 뒤바꾼 듯)을 제외한” 다른 선원들은 “가정을 꾸리고 보람찬 새 삶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고 밝힌 바 있어 특히 김순근, 최종석씨의 신변이 불확실하다.

이에 앞서 평양방송은 선장과 어로장이 정탐행위를 자백했다고 주장했고, 이후 1999년 1월 국가정보원이 밝힌 자료에 따르면 최씨는 북한 정치범수용소에 수감된 것으로 전해졌었다.

‘동진 27호’는 1987년 1월15일 서해 백령도 근해에서 조업 중 북한 경비정에 납북됐다.

북한은 납북 6일만에 조선적집자회를 통해 “조사 후 돌려보내겠다”며 송환 의사를 밝혔으나 선원들로선 뜻하지 않게 김만철씨 일가족이 남한에 귀순하는 사건이 발생함으로써 송환이 무산됐고 북한은 그해 4월 “선원중 2명이 정탐 행위를 했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북한이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남한 정부와 협상을 통해 이산가족 상봉 때 납북자와 국군포로를 극소수 포함시키면서 특히 납북자가운데 주로 동진 27호 선원들을 한두명씩 등장시키는 것은 이런 사연을 감안한 동시에 동진 27호 선원들이 가장 최근의 미귀환자들인 점도 고려한 것으로 분석된다.

북한의 남한 선원 납북.억류는 1960-70년대에 주로 발생했으며 87년 동진호 선원 사건 이후에는 납북.억류됐다가도 모두 송환됐다.

‘2009 통일백서’에 따르면 정부는 지난해 12월 현재 미귀환 납북자와 생존 국군포로가 각각 494명(어부는 440명)과 560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어부의 경우 1955년 대성호가 납북된 이래 총 3천710명이 납북됐다가 3천270명은 송환됐으며 미귀환 440명은 1987년 동진호 사건과 그 이전 사건 선원들이다.

이때문에 동진 27호 선원 송환 문제는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남북 협상 테이블에서 늘 주요 의제로 논의됐으나 남측의 송환 요구에 북측이 “의거 입북자”라고 맞서면서 진전하지 못했다.

2000년 6월 남북 정상회담 이후에도 남한 정부가 국군포로와 납북자 문제의 해결을 위해 북한과 협의를 시도할 때마다 북한은 국군포로의 경우 이미 정전협정에 따른 포로교환으로 종료된 문제이고, 납북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협의 자체를 거부했다.

이에 따라 남한 정부는 국군포로와 납북자들을 ‘특수 이산가족’이라는 표현으로 이산가족의 범주에 포함시키는 우회 방식으로나마 생사를 확인하고 상봉하도록 북한을 유도했다.

대한적십자사는 그동안 남북 이산가족 상봉에 앞서 북측에 납북자와 국군포로 등의 생사확인을 요청했으나 북측은 대부분 ‘확인불가’라고 회신했다.

이번 추석 상봉을 포함해 2000년 이후 17차례의 이산가족 상봉을 통해 가족과 만난 국군포로는 12명, 납북자는 16명 등 모두 28명에 불과하다./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