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북에서 탈출까지’ 故신상옥 감독 영화같은 삶

▲ 서울대학교 병원에 신상옥 감독 빈소가 차려졌다. ⓒ연합

▲ 서울대학교 병원에 신상옥 감독 빈소가 차려졌다. ⓒ연합

남한의 대표적 영화감독 → 납북 → 탈출시도 → 북한 보위부 감옥 수감→ 북한의 영화감독 → 탈출 → 미국 → 한국

‘영화 같은 삶’을 살았던 영화감독 신상옥씨가 11일 밤 11시 40분 향년 80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2004년 C형 간염으로 간이식 수술을 성공적으로 받았으나 보름전부터 건강이 악화돼 서울대병원에 입원해 있던 중이었다.

신 감독은 1950년대부터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성춘향’, ‘상록수’, ‘연산군’, ‘빨간 마후라’ 등의 흥행 작품 등을 제작해 온 한국 영화계의 산증인이다.

신 감독은 1978년 부인인 영화배우 최은희씨와 함께 북한에 납치됐다 8년만에 극적으로 탈출하기도 했다.

두 사람의 납북은 북한의 영화산업을 육성시키기 위해 남한의 대표적 영화감독과 배우인 두 사람을 납치하라는 김정일의 지령으로 이뤄졌다. 평양에 개인 필름 라이브러리(영화문헌고)를 둘 정도로 광적인 영화 마니아인 김정일은 1970년대 후반 이미 북한 정권의 실권을 장악한 상태였다.

신상옥, 최은희 부부는 탈출 후 북한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우리의 탈출은 끝나지 않았다」는 수기집을 펴냈다. 김정일을 가까이에서 지켜 본 두 사람의 증언을 통해 그동안 베일에 싸여있던 김정일 개인에 관한 정보가 외부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수기집에는 남한의 노래와 여배우들을 좋아하는 김정일의 취향, 도박판이 벌어지는 김정일과 측근들의 비밀파티, 우상화 작업을 직접 지시하면서도 그들의 찬양을 가짜라고 생각하는 독재자의 면모 까지 김정일의 사생활과 관련한 에피소드들이 자세하게 묘사돼 있다.

이들은 수기에서 “북한은 사회주의 사회라고도 말할 수 없는, 인류사상 유례없는 개인 숭배로 치닫고 있다”며 “우리가 북한 정권에 조금이나마 가능성과 희망을 걸 수 있었다면, 일생을 희생하는 한이 있더라도 남북 대화의 교량역할을 하기 위해서라는 생각으로 그곳을 탈출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8년간 북한에서 만나고 도움을 받았던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하며, 이렇게 선량한 2천만의 일반 주민들이 있기에 북한에도 희망을 가질 수 있다고 덧붙였다.

▲ 연회장에서 김정일(가운데)과 함께 찍은 사진 <사진출처 : 수기 '우리의 탈출은 끝나지 않았다' 中)

◆ 김정일 사생활 세계에 알리기도

북한에 먼저 납치 된 것은 최 씨였다. 1978년 1월 홍콩 영화관계자로 위장한 북한 공작원의 초청으로 혼자 홍콩을 찾은 최 씨는 그 길로 보트에 태워져 북한으로 납치된다.

신 씨도 그 해 7월 영화관련 업무상 홍콩에 머물다가 최 씨와 같은 경로로 북한 공작원에 의해 납치된다. 그러나 부부의 재회는 그로부터 5년이 지난 1983년에서야 이루어진다.

부인인 최 씨는 납북 직후부터 김정일과 수 차례 만나며 연회에 초청받는등 ‘지도자 동지’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지만, 북한에서의 생활을 견디지 못한 신 감독은 1979년 탈출을 시도하다 3년 반 동안 정치보위부 특수감방에 수감된다.

그는 이 기간동안 채 2평이 못되는 어두침침한 공간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부동자세로 지내는 고문을 당하며 고통스런 나날을 보낸다. 감옥에서의 가혹 행위를 견디다 못한 그는 마지막 수단으로 단식투쟁까지 벌이게 된다.

신 감독의 석방 이후 재회한 부부는 김정일의 직접 지시로 북한 영화 제작에 뛰어들게 된다. 신 씨는 김정일의 전폭적 지지와 후원을 받으며 신필름영화촬영소를 세웠고 ‘돌아오지 않는 밀사’, ‘탈출기’ ‘심청전’, ‘소금’ 등을 제작했다.

이 중 신 감독은 ‘돌아오지 못한 밀사’라는 작품으로 1984년 체코 카르로비바리 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았고, 부인 최은희 씨는 영화 ‘소금’으로 모스크바 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한편, 납치 이후부터 자진 월북 논란에 휩싸였던 두 사람에 대해 84년 4월 국가안전기획부는 ‘북한에 의한 강제납북’ 라는 입장을 공식 발표한다.

영화 활동을 통해 김정일의 총애를 받으며 물질적 풍요를 누리던 부부였지만, 독재체제 하에서 어렵게 살아가고 있는 주민들의 생활 모습을 보며 괴로운 마음도 느끼게 된다. 특히 자유를 철저히 억압받는 상황에서 북한에서의 하루하루는 그들에게 고통의 연속일 뿐이었다.

결국 부부는 1986년 영화제 참석차 동구권 국가들을 방문하던 중 오스트리아 빈 주재 미국 대사관을 통해 탈출에 성공하게 된다. 부부는 2001년 초까지 미국의 머물다가 이후 한국에 정착,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었다.

양정아 기자 junga@dailynk.com

▲ 연회장에서 김정일(가운데)과 함께 찍은 사진 <사진출처 : 수기 '우리의 탈출은 끝나지 않았다' 中)

◆ 김정일 사생활 세계에 알리기도

북한에 먼저 납치 된 것은 최 씨였다. 1978년 1월 홍콩 영화관계자로 위장한 북한 공작원의 초청으로 혼자 홍콩을 찾은 최 씨는 그 길로 보트에 태워져 북한으로 납치된다.

신 씨도 그 해 7월 영화관련 업무상 홍콩에 머물다가 최 씨와 같은 경로로 북한 공작원에 의해 납치된다. 그러나 부부의 재회는 그로부터 5년이 지난 1983년에서야 이루어진다.

부인인 최 씨는 납북 직후부터 김정일과 수 차례 만나며 연회에 초청받는등 ‘지도자 동지’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지만, 북한에서의 생활을 견디지 못한 신 감독은 1979년 탈출을 시도하다 3년 반 동안 정치보위부 특수감방에 수감된다.

그는 이 기간동안 채 2평이 못되는 어두침침한 공간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부동자세로 지내는 고문을 당하며 고통스런 나날을 보낸다. 감옥에서의 가혹 행위를 견디다 못한 그는 마지막 수단으로 단식투쟁까지 벌이게 된다.

신 감독의 석방 이후 재회한 부부는 김정일의 직접 지시로 북한 영화 제작에 뛰어들게 된다. 신 씨는 김정일의 전폭적 지지와 후원을 받으며 신필름영화촬영소를 세웠고 ‘돌아오지 않는 밀사’, ‘탈출기’ ‘심청전’, ‘소금’ 등을 제작했다.

이 중 신 감독은 ‘돌아오지 못한 밀사’라는 작품으로 1984년 체코 카르로비바리 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았고, 부인 최은희 씨는 영화 ‘소금’으로 모스크바 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한편, 납치 이후부터 자진 월북 논란에 휩싸였던 두 사람에 대해 84년 4월 국가안전기획부는 ‘북한에 의한 강제납북’ 라는 입장을 공식 발표한다.

영화 활동을 통해 김정일의 총애를 받으며 물질적 풍요를 누리던 부부였지만, 독재체제 하에서 어렵게 살아가고 있는 주민들의 생활 모습을 보며 괴로운 마음도 느끼게 된다. 특히 자유를 철저히 억압받는 상황에서 북한에서의 하루하루는 그들에게 고통의 연속일 뿐이었다.

결국 부부는 1986년 영화제 참석차 동구권 국가들을 방문하던 중 오스트리아 빈 주재 미국 대사관을 통해 탈출에 성공하게 된다. 부부는 2001년 초까지 미국의 머물다가 이후 한국에 정착,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었다.

양정아 기자 junga@dailyn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