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북어부, 또다른 離散안고 30년만에 귀향

1975년 8월 동해상에서 납북된 천왕호 선원 고명섭(62)씨가 12일 30년 만에 강원도 주문진 고향집으로 돌아와 꿈에 그리던 팔순 노모 김영기(84)씨의 품에 안긴다.

이날 고향 마을에서는 고씨를 반기는 환영행사가 열릴 예정이다. 북한에 있을 때 평양에서 종종 얼굴을 봤던 귀환 납북어부 이재근, 진정팔, 김병도씨도 행사에 참석, 남쪽 땅에서 감격적인 해후가 이뤄질 전망이다.

1971∼1973년 월남전에 참전했던 고씨는 제대 후 서울에서 건설업을 하는 친척을 돕다 1975년 5월 고향으로 돌아와 오징어 배를 타기 시작했다. 그가 납북된 것은 동해상 대화퇴 부근 어장으로 두 번째 출어를 나갔을 때였다.

당시 미혼이었던 고씨는 납북후 북한에서 결혼을 하고 평안북도 성천에서 양계장 노동자로 생활했다. 남쪽 가족들은 고씨가 납북된 것이 확실하다는 심증을 갖고 있었지만 법적으로 그는 실종자로 처리됐고 호적에도 그렇게 올랐다.

생사조차 모르고 애를 태웠던 노모 김씨는 1997년 고씨가 북에서 보낸 편지를 받고 아들이 살아있다는 소식에 안도하기도 했지만 날이 갈수록 깊어지는 그리움만은 어쩌지 못했다.

아들의 생존을 확인하고 남쪽 가족들은 2001년과 2003년에 이산가족상봉 신청을 내기도 했다. 하지만 어처구니없게도 북쪽으로부터 `확인 불가’라는 통보를 받고 아연할 수밖에 없었다.

무작정 정부에만 기댈 수 없다고 생각한 남쪽 가족들은 자체적으로 고씨를 남쪽으로 데려오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납북자가족모임의 최성용 회장에게 도움을 청했다.

올해 3월말 고씨는 최 회장의 협조자로부터 “노모를 만나게 해주겠다”는 말을 듣고 그를 따라 신의주에서 배를 타고 중국 단둥(丹東)으로 국경을 넘는 모험을 감행했다. 그 때만 해도 고씨는 굳이 한국으로 가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비록 원치않은 선택이었을지언정 북쪽에 아내와 피붙이 두 남매가 살아 있어 자신이 남쪽행을 선택할 경우 북쪽 가족이 겪을 수도 있는 고초가 눈에 선했기 때문에 차마 결심하지 못했던 것.

고씨는 한국 공관으로 신병이 넘겨진 뒤에도 북쪽으로 돌아가겠다는 고집을 꺾지 않아 고씨의 처리를 놓고 정부에서도 무척 당황했다는 후문이다. 그 어느 쪽을 선택하더라도 결국 이산가족이 될 수밖에 없었던 고씨의 처지는 분단 체제가 빚어낸 또 하나의 비극이었던 셈이다.

그렇지만 아들과 재회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던 노모와 동생 만식(47)씨가 남쪽에서 여러 차례 전화를 걸어 간곡하게 설득하자 고씨의 마음은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북쪽 가족까지 남쪽으로 데려오겠다고 최 회장이 약속을 하고서야 어렵사리 결심을 굳혔다.

지난달 20일 서울의 탈북자 조사기관에서 고씨와 처음 재회했던 만식씨는 “형님이 이전보다는 많이 마음이 안정돼있는 것 같았다”고 전했다.

하지만 고씨의 귀향이 성사되기까지 남쪽 가족들의 마음속에 쌓인 응어리도 만만치 않았다.

만식씨는 단적인 사례로 “정부에서 언제 형님이 한국에 들어왔는지, 또 언제 집으로 돌아오는지도 얘기해주지 않아 가족의 입장에서 너무 야속하고 속상했다”며 분통을 터뜨리기도 했다.

특히 납북자들이 돌아오더라도 일반 탈북자와 똑같이 처우를 받고 있는 것도 그는 문제점으로 지적했다. 만식씨는 “위험한 지역에서 조업 중인 어선의 납북을 방치함으로써 자국민 보호에 소홀했던 국가에도 분명히 책임이 있는 데도 일반 탈북자처럼 대하는 것은 부당하다”며 정부에서 입법을 추진 중인 납북자 특별법의 조속한 제정을 촉구했다.

만식씨는 “정부가 천왕호 납북 이후 북한에 나포됐다 풀려난 다른 선원들의 증언을 통해 납북 사실을 이미 파악해놓고도 이를 숨겨오다 2000년 귀환한 납북어부 이재근씨의 증언이 나올 때까지 실종으로 처리했던 정부를 상대로 법적 대응도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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