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 4·19혁명에 북한 김일성 반응은 어땠을까?

1960년 4월 이승만 정권은 물러났고, 바로 제2공화국이 탄생했다. 일반적으로 혁명 전후 나라는 아주 약해진다. 새로운 정권은 합법성을 얻기 전에 또 다시 뒤집히는 위험에 직면한다. 특히 한국은 분단 국가이고, 김일성은 아직 무력 통일에 대해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했다. 그렇다면 1960년 당시에 4·19 혁명에 대한 김일성의 반응은 무엇이었나?

소련 기밀 자료 통해 그 답을 찾아볼 수 있다. 4·19혁명 그날에 소련 참사관 토르벤코프 씨는 북한 과학원 당 위원회 위원장인 강해구와 만나 “남조선(한국) 상황”에 대해 이야기를 하였다 :

토르벤코프 (소련 대사관 참사관)의 일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 과학원 당 위원회 위원장인 강해구와 한 토론(극비)
1960년4월1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과학원 과학자와 직원에 회의에 과학원 당 위원회 위원장인 강해구와 만났고 간단하게 최근 남조선 사건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

나의 질문에 강해구는 말하였다: 조선노동당 지하 집단들이 남조선 주민들을 투쟁으로 불러일으킨다. 시위자의 주요 세력은 대학생 또한 공부하는 남조선 청년들이다. 다음에 강해구는 김일성동지가 최근에 남조선 상황을 아주 주의 깊게 관찰하고 있다고 하였다. 하루 종일 이 문제에 대해 필요한 지적을 내린다고 한다.

다음 날은, 펠리센코 참사관은 방학세 내무상과 4.19에 대한 내무성의 반응에 대해 토론하였다.

펠리센코 (소련 대사관 참사관)의 일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무상 방학세 동지와 한 토론(극비)
1960년4월20일

방학세는 최근 남조선 상황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였다. 그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무성의 지하 일꾼 노선으로 이 사건에 참가하라는 아무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고 말하였다. 하지만, 최근 1개월 정도 강원도에 출장이 있었기 때문에,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노선으로 진행하는 활동에 대해 잘 모른다고 하였다. 방학세는 남조선 인민들 속에 이승만 정권에 대한 불만 그리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한 호감이 강화돼 남조선 주민 속에 사업 기회가 많아졌다고 하였다. 하지만, 반대로 경찰적 정권의 강화 탓에 남쪽에 어려움이 생겼단다. 최근 유능한 일꾼 2명이 남조선 경찰로부터 체포되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소중한 자료는 소련 대사의 김일성과 만남에 관한 문서다.

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 대사 알레크산드르 마히일로비치 푸자노프의 일기 (1960년 6월 13일부터 6월 28일까지-극비)
1960년 6월 13일

<…>김일성은 조선의 남반부 상황, 또한 최근의 이승만 독재정권 반대하는 남조선주민들의 봉기에 관련한 당과 정부의 정책에 대하여 아주 자세하게 이야기를 하였다. 김일성은 이들의 노선이 자기 세력의 보존이라고 이야기하였다. 이 때문에 남쪽에 있는 당 세력은 (1000-1200명 정도) 일부 경우를 제외하고 시위 등에 주도권을 쥐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은 이승만의 독재 정권을 타도하자고 하는 근로자의 요구를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다. 김일성은 이런 전술 덕분에 남쪽에 있는 당의 세력을 보존할 수 있었다고 하였다. 단, 한 도시에서만 9명정도 사망했다고 하였다.

김일성은 현재 남조선에 대한 노선이 새로운 진보적인 정당 및 조직을 설립하는 것을 격려한다고 하였다. «우리는 대중 정당이 하나가 아니라 몇 개 있으면 좋겠다고 본다. 현재에 이런 정당은 [한국]사회당, 사회대중당 등이다. 이 정당의 지도부들과 우리들은 좋은 관계를 갖고 있고 이 정당들이 우리 영향 하에 있다». 김일성은 [남조선] 국가 지도자들 중에 자기 사람이 있다고 하면서 이름도 불렀다. 우리 이야기는 친선적인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문서를 통해 본다면 북한 정권이 남한에 설립한 정당 2개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바로 한국사회당 그리고 사회대중당이다. 이들은 제2공화국 시기에 존재한 소당(小黨)이다. 1960년 7월 29일에 진행되었던 제5대 총선 당시에 사회대중당의 지지율은 6%, 한국사회당은 0.6%에 불과하였다. 사회대중당의 지도자는 서상일, 한국사회당의 지도자가 전진한이었다. 둘 다 북한의 간첩이라고 확증할 순 없지만, 위 사료에 따르면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다. 결국으로 한국사회당도 사회대중당도 5·16 군사 정변 이후 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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