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주홍 통일부 장관 후보자가 자진 사퇴했다.
남 후보자는 27일 오후 ‘사퇴의 변’을 통해 “사유야 어떻든 모든 것이 저의 부덕이고 불찰”이라며 “더이상 저의 문제로 인해 새 정부의 출범에 방해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통일부장관 내정자직을 사퇴한다”고 말했다. 이로써 통일부 장관 후보자를 새로 물색해야 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번 남주홍 후보자 사퇴파동과 관련하여 우리가 반드시 되새겨 보아야 할 아주 중요한 문제가 있다.
민주당은 남 후보자에 대해 부동산 문제, 자녀 교육비 공제문제 등으로 사퇴를 압박했지만 이에 앞서 그보다 본질적인(?) 문제를 제기했다. 한마디로 남 후보자가 “대북 강경파이며, 또 反통일세력이기 때문에 안된다”는 것이다. 이같은 민주당의 인식이 사실상 이번 사퇴파동의 단초를 제공했다. 여기에 부동산 문제의 등의 의혹이 잇따랐기 때문에 결국 남장관이 낙마한 것이다.
하지만 민주당이 주장한 이른바 ‘대북 강경파’ 내지 ‘반통일 세력’이라는 주장이 근본적으로 허구라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문제를 제대로 규명해놓지 않으면 앞으로 민주당은 북한에 대해 원칙적이며 올바른 자세를 갖고 있는 다른 통일장관 후보자에게도 이른바 ‘강경파’이니, ‘반통일 세력’이라는 딱지를 붙여 또 어깃장을 놓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은 일단 도덕성 문제를 떠나서 ‘원칙적으로 통일부 장관은 어떤 인물이 되어야 하는가’를 제시하기 위한 것이다.
통일정책의 과거와 현재
그동안 우리 정부의 통일부는 대체로 남북대화와 교류협력 등의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세계적 탈냉전과 북핵문제의 대두, 국내 정치의 민주화로 통일정책과 안보정책이 얽히고, 대북정책과 외교정책이 혼선된 것을 물론, 남북관계가 국내정치화 되는 양상이 일상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통일부의 역할과 기능은 변하지 않았다. 이 점은 대북 및 통일정책을 새롭게 정립 중인 이명박 정부에서도 제기되는 핵심과제 중의 하나가 아닌가 싶다.
이런 이유로, 필자는 통일정책의 결정과 추진과정을 연구한 연구자로서 더 이상 통일정책이 통일정책만으로 존재하기 어렵다고 본다. 한국의 통일정책은 군사안보 및 외교정책과 밀접히 결합되어야 하고, 국내정치하고는 철저히 분리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더구나 북핵문제가 남북관계 및 통일정책의 핵심현안으로 전면화 된 상황에서 통일정책은 필연적으로 군사안보 및 외교정책과 같이 가야할 필요가 있다.
노태우 정부 시기 대북정책을 추진했던 집권세력 내 강온파간 갈등이나, 취임식에서 민족우선주의 노선을 천명했던 김영삼 정부가 온탕 냉탕을 오가며 대북정책상 혼선을 거듭한 것도 그 본질은 북핵 의혹이 터진 이후 통일정책이 제자리를 잡지 못한 데 있었다. 뿐만 아니라 1차 핵위기가 북-미제네바합의로 일단락 된 이후 가시화되었던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이 1990년대 후반 제기된 파키스탄-북한간 농축우라늄 기술 거래 의혹, 2002년 2차 북핵 위기로 인해 논란과 좌절을 경험했던 것도 동일한 이유라고 할 수 있겠다.
2006년 북한의 핵실험을 전후해 노무현 정부의 평화번영정책이 존폐의 기로에 처하고, 양보할 수 없는 좌우간 논란의 뜨거운 쟁점으로 떠오른 것도 결국 통일정책과 군사안보 및 외교정책의 혼선에서 비롯되었다. 특히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는 NSC(국가안전보장회의) 운영으로 통일과 군사안보 및 외교정책의 종합적인 검토 및 추진 시스템을 안착한 듯 했지만, 정책 결정자들이 민족중심의 통일정책을 지나치게 독자화하면서 사실상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했다.
또 다른 측면에서 중요한 문제는 남북관계를 정략적 목적으로 국내정치에 활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냉전시기 권위주의 정권에서나 탈냉전시기 민주화 정권에서 동일하게 나타난 현상이다. 특히 탈냉전시기에는 민주화라는 국내정치 환경의 변화와 인적 물적 격변을 수반한 수평적 정권 교체로 집권세력은 물론 반대세력들까지 공공연하게 남북관계를 국내정치에 활용했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실제로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이 국가의 통일정책으로 결정될 수 있었던 본질적인 이유 중의 하나는 건국 이래 최초로 이루어진 여야간 수평적 정권교체에 따른 국내정치의 구조적 변동, 즉 소위 민주화세력의 집권이었다. 권력을 장악한 민주화세력은 과거 권위주의 정권에 대항했던 역사적 경험을 자신들의 정체성으로 공유했고 역사인식, 대북관과 통일관, 인적구성, 지지세력 등에 이르기까지 기존의 지배세력과 달랐다.
이들의 등장은 과거 권위주의 정권으로부터 탈냉전 이후 김영삼 정권에 이르기까지 지배집단의 이데올로기로 남아있던 반공주의의 폐기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기존 지배세력과 다른 통일관에 기초한 새로운 통일정책의 태동을 가져오는 것이기도 했다. 이 점에서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은 대북한 화해협력 노선을 표방한 노태우-김영삼 정부의 대북정책과 그 본질에서 차이를 두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 햇볕론자들은 대북포용정책을 자신들의 정체성으로 규정한 듯 했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 핵실험, NLL 등 안보문제가 전면화 된 상황에서도 정책의 일관성을 이유로 햇볕정책에 대한 정당한 비판을 수용하지 않았고, 오히려 햇볕정책 비판자들을 반통일 또는 전쟁세력으로 몰아붙이는 경우가 허다했다. 뿐만 아니라 불법 대북송금 사실이 드러나 여론의 지탄을 받으면서도 남북관계의 특수성을 근거로 이를 정당화하려는 움직임도 감지되었다.
이러한 원인은 자신들만이 선이라는 독선의식과 ‘민주 對 독재’ 전선이 사라진 이후 ‘통일 對 반통일’ 전선으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보하고자 한 정치전략에서 기인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여기에는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라는 구호로 대표되는 감상적 통일지상주의가 자리했을 것이다. 이렇듯 김대중 정부 이후 집권세력이 자신들의 정치적 생존과 햇볕정책의 성패를 동일시하는 상황이다 보니, 모든 남북관계 현안이 국내정치에 활용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통일장관 인사는 ‘정치공세’ 경계해야
반면 김대중-노무현 정권시기 야당 및 반대세력 또한 남북관계를 국내정치화 하는데 일조했다. 이들은 햇볕정책을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친북세력의 음모로 치부했고, 실제로 이를 대국민 정치선동으로 활용해 왔다. 특히 이들은 1997년 소위 민주화세력에게 정권을 내 준 이후 이를 되찾기 위한 절치부심의 과정에서 햇볕정책을 주요 타깃으로 공격하면서 북한 핵개발의 책임을 몽땅 햇볕정책에 떠넘기는 주장도 서슴지 않았다. 합리적 대북정책을 위한 대안의 모색보다 햇볕정책을 둘러싼 이념논쟁이 과도하게 촉발된 배경에는 정권쟁취를 의도한 이들의 정략적 움직임도 배제할 수 없다는 얘기다. 이 점은 이명박 정부 대북정책 결정자들이 냉정하게 돌아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필자가 남주홍 교수가 이명박 정부의 통일부 장관으로 적합하다고 본 이유는 탈냉전 이후 한국의 통일정책에 대한 위와 같은 인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남 교수는 대북한 통일정책과 안보정책, 외교전략 분야를 오랜 기간 연구한 학자이자 북한의 대남전략을 잘 알고 현장에서 상대하고 지휘할 수 있는 정통한 대북전략가 중 한 사람이다. 이 점에서 남 교수는 이전의 일면적 통일정책이 아닌 대북한 군사안보정책 및 외교정책을 종합적으로 인식하고 이명박 정부 통일부의 통일정책을 진두지휘할 수 있는 적합한 인사였다.
또한 남북관계를 정략적으로 국내정치에 활용하는 고질화된 병폐를 단절하는 데도 남 교수가 적격이었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첫 번째 이유는 그가 현실 정치인이 아니며, 미래의 정치적 성공을 꿈꾸고 있는 정치 지망생도 아니라는 점 때문이었다. 이것은 오랜 기간 남주홍 교수를 보고 느껴왔던 필자의 판단이다. 두 번째 이유는 남 교수가 한나라당 등 현실정치의 어떤 계파와도 연계되어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런 정황들은 남 내정자가 장관으로써 자신의 전문가적 식견과 소신을 펴고, 냉정한 평가와 그 결과에 대한 책임까지 온전하게 질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고 있다고 보았다. 남북관계의 국내정치적 이용을 구조적으로 제약할 수 있는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남 교수에 대한 국회청문회가 꼭 이루어지길 희망했었다. 그리고 청문회에서 그간 예리하게 각을 세웠던 지난 10년의 대북포용정책에 대한 평가가 보다 근거 있게 진행될 수 있기를 기대했다. 또한 남 교수가 가지고 있는 통일, 군사안보 및 외교 정책의 원칙과 내용들이 소개되고 새로운 통일정책의 수립과정이 공론화될 수 있기를 바라마지 않았다. 이제 그 역할은 새롭게 임명될 장관 후보자의 몫이 되었다.
이명박 후보시절부터 지난 2년 여간 밤낮으로 함께 하며 통일정책과 안보정책, 외교정책이 혼재된 오늘날 남북관계의 실타래를 풀기 위해 애써온 남교수에게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