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반환노력 동의한 북관대첩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 열리고 있는 ’아시아-아프리카 정상회의’에 참석 중인 이해찬(李海瓚) 국무총리와 김영남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일본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에 있는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 반환을 위한 남북 당국자 회담을 적극 추진하자는 데 23일 동의하면서 이 비에 대한 관심이 다시 쏠리고 있다.

북관대첩비란 북관(北關)에서 이뤄진 전쟁에서 대첩(大捷), 다시 말해 큰 승리를 거둔 일을 기념한 비석이라는 의미다. 여기서 북관은 함경도를 말한다. 관(關)이란 관문(關門)이란 말이 있듯이 경계를 이루는 지역이다. 따라서 북관이란 조선의 시각에서 북쪽 국경을 말한다.

이 비는 임진왜란 발발 첫 해인 1592년, 함경도 의병장 정문부(鄭文孚)가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이끄는 왜군을 무찌른 일을 기념해 숙종 33년(1707년) 함경도 길주에 건립한 것이다.

선조 25년(1592) 7월 15일에 가토가 이끄는 왜군 2만2천여 명은 파죽지세로 함흥으로 진격해 함관령 이북 땅 1천리를 점령했다.

관군(官軍)은 도망가거나 궤멸한 가운데 정문부는 의병을 모아 조선의 왕자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 등을 왜군에게 넘겨준 역도 국세필과 정말수, 국경인 등을 포박해 참수하고 명천 일대를 수복했으며 총 8차례에 걸친 전투에서 왜군을 격퇴했다.

그러나 정문부는 이후 생애가 대단히 불행했다. 인조 반정 직후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와병 중이었던 까닭에 왕명을 수행하지 못했는데 이것이 빌미가 돼 거듭된 탄핵을 받고는 인조 2년(1624) 11월 9일 향년 60세로 옥중에서 장사(杖死)했다.

그러다가 41년 만인 현종 6년(1665), 당시 영의정 정태화(鄭太和)의 상소에 힘입어 신원이 회복되었고 이를 발판으로 숙종 40년(1713)에는 충의공(忠毅公)이라는 시호까지 받았다.

임진왜란 당시 그의 전승 기념비인 북관대첩비가 건립될 수 있었던 시대적 배경이 여기에 있다. 이 비는 높이 187cm, 너비 66cm에 약 1천500자를 새겨 정문부가 주도한 의병들의 활약상을 상세하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북관대첩비는 이후 어느 시점에 폐기돼 망각되다시피했다가 1905년 러·일 전쟁 당시 이 지역에 주둔했던 일본군 제2사단 17여단장 이케다 마시스케(池田正介) 소장이 일본으로 옮겨 현재는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 기념물로 꼽히는 야스쿠니신사 숲 속에 방치돼 있었다.

이 비는 이렇게 다시 몰각되었다가 1969년 최서면 당시 국제한국연구원 원장에 의해 발견됨으로써 다시 존재를 드러냈다. 이후 북관대첩비는 한국은 물론 일본 내 일부 종교 단체를 중심으로 반환운동이 줄곧 펼쳐졌다.

최근에만 해도 이 비가 국내에 조만간 반환되기로 결정됐다는 도쿄발 보도가 대대적으로 국내에 전해진 적이 있다. 그러나 그동안 이런 식의 보도는 너무 자주 있었고, 그 때마다 번번이 무산되었기 때문에 이 북관대첩비는 정말로 한국으로 반환되어야 봐야 반환되었음을 우리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반환 문제에 북한이 개입돼야 하는 이유는 바로 애초에 있었던 장소는 물론이요 궁극적으로 돌아가야 할 장소 또한 북한, 특히 함흥이기 때문이다. 국내에서 그 반환운동을 전개하는 단체들도 일단 남한으로 반환한 다음 북한에 돌려주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비운의 북관대첩비. 남북한 고위당국자가 그 반환 필요성에 공감한 상황에서 이번에는 꼭 고향을 돌아갈 수 있길 빈다./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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