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고위급 접촉 결과 어떻게 볼 것인가

최후통첩(Ultimatum)이란 행동을 담보로 해야만 그 중차대함을 인정받는다. 북한이 확성기 타격시점을 공개하고 나선 것은 일종의 복선이다. 공격 선언을 지켜도 문제, 지키지 않아도 문제인 딜레마의 상황을 자초한 것은 중의적인 의미가 함축됐다. 그만큼 조급하거나 의도적이거나. 정서적 조급함과 이성적 신중함은 실은 상호 배타적이지 않다. 이 둘이 결합되면 그 속내를 알기란 더욱 어려워진다. 딱 지금의 북한 모습이다. 협상이 어려울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불과 2년 전이던 2013년 봄, 북한이 3차 핵실험이 끝난 후에도 전쟁의 위협은 지금보다 결코 덜하지 않았다. 대북확성기 방송이 북한에게는 이다지도 치명적인가? 그렇다면 한국은 당시 왜 확성기를 틀지 않았나? 갑작스런 남북 최고위급 회담의 직접적 발단 원인은 간단했다. 북측이 타이머를 걸었기 때문이다.

정상회담을 제외하면 최고위급 회담인 이번 황병서-김관진 라인의 마라톤 협상 결과는 현실적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한반도 평화를 담지 할 파격적인 합의나 속 시원한 조치는 역시 환상이었다. 이번 협상의 구체적 ‘동인(動因)’은 무엇이었을까? 세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첫째, 북한의 전략적 실수다. 시계열적으로 원인을 추적하는 자기회귀적 분석이다. 목함지뢰 같은 저질 게릴라 짓을 하지 않았더라면… 대북확성기 타격을 언제 하겠다는 시간선언만 하지 않았더라면…. 현장 실무급의 즉흥적인 상황대응으로 인해 평양에서 급수습에 나섰다는 것은 현실성이 떨어지는 분석이다.

둘째, 의도된 북한의 전략적 계산. 현재까지의 상황전개가 실은 북한이 고도로 기획한 시나리오라는 것이다. 목함지뢰라는 작은 트리거(trigger: 상황을 촉발시키는 결정적 요인)로 최고위급이 만나는 큰 그림을 갖고 있었다는 추론이다.

셋째, 임기응변적 우연한 전개의 연속. 목함지뢰도, 대북확성기 조준타격 시점발표도, 김양건-황병서가 협상장에 나오게 된 것도 어찌 하다보니 그만 이렇게 판이 커지고 말았다는 우연설이다. 전략적 오판설과 다른 점이 있다면 행위자의 의도성이 줄고 상황발생의 환경적 즉흥성이 보다 강조됐다는 점이다.

진실은 어쩌면 이 셋이 뒤엉켜 있는 모습인지도 모른다. 협상결과는 북한이 대북확성기 중단을 받아내기 위해 다급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합의도출은 약속된 ‘힘(power)’의 균형점이라는 함의가 있다. ‘현실세계는 현실주의적일 수밖에 없다’(A real world remains the realist world)는 제3세대 현실주의(공격적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자 존 미어셰이머의 경고는 멀리 있지 않다.

한마디로 힘에 내재된 공통의 대표적 특징을 꼽자면 ‘상대가 평소에는 하지 않았을 일을 하도록 만드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이 힘의 흐름은 협상과정과 결과에 배어있게 마련이다. 

따라서 협상결과를 읽어내는 타당한 독법(讀法)은 무엇일까? 우리가 기대하는 최상의 협상결과라면 북한의 사과와 재발방지 다짐은 받고 대북 확성기 방송은 계속하는 거였다. 그러나 거래 불가다.

어느 지점에서 타협의 여지가 발생할까? 확성기에 관한 한 온(지속)-오프(중단) 두 가지 옵션 밖에 없다. ‘딜’이 성사되기 위해서는 내줄 수밖에 없는 상수와도 같은 거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그 ‘값’의 문제다. 값은 힘의 상대적 가격이며 거래가격이란 흥정 가능한 요소이다. 우리가 포기할 수 없던 마지노선은 북한의 사과를 어떻게든 담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과’의 문제는 소위 ‘수위조절’이 가능한 영역이다. 온-오프 2진법의 이슈가 아니다.

모름지기 정상적인 사과라면 잘못을 정중히 시인하고 그것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다짐이 이어져야 진정성을 인정받는다. 그러나 1인 지배 체제에서의 사과란 ‘최고존엄’의 전능함을 해치는 중대한 도전이자 불가침 영역에 대한 훼손이라는 것이 그들의 인식이다. 북한에게 협상은 분쟁의 평화적 해결수단이 아니라 ‘혁명의 강력한 도구’인 것이다.

자기들로선 2인자가 협상을 위해 휴전선까지 내려온 것이 통 큰 양보라는 자세이었을 게다. 남한으로부터 뭔가를 받아낼 기세로 온 사람들이다. 한국은 이제껏 최대한 북한의 형편과 입장을 헤아려주기 위해 애써왔다. 정서적으로 형성된 이런 기조와 분위기를 회담 한번으로 깨기란 애당초 무리였을 거다.

그러니 확성기 중단에 상응한 가격을 수용할 입장은 남한이 된 셈이다. 북한이 원하는 것은 줄 수밖에 없고 그 가격을 최대한 높여 줘야 하는 부담스런 거래였다.

결국 애매모호한 유감표명이라는 낮은 가격을 조금이라도 벌충하기 위해 이산가족상봉 추진이라는 실현가능성이 불투명한 서비스(?)를 얹어 거래가 성사된 것이다. 이나마 우리 측이 사과요구 마저 끝까지 고수하지 않았다면 어려웠겠지만 말이다.

내부에서 치열한 노선투쟁을 거치며 살아온 사람들을 말로 이기기란 어렵다. 주체와 선군, ‘유일사상체계확립의 10대 원칙’이 개인의 삶과 사회정치적 존재의 준거인 지상유일의 체제 속에서는 날마다 사상투쟁이 벌어진다. 다양성이 존중되지 않는 사회에서 ‘다름’을 인정하는 것은 곧 사회와 국가의 안녕을 위협하는 위험한 생각이 그 곳을 지배하고 있다.

그 속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은 합리적인 말과 논리로 설득 당하지 않는다. 공산주의체제는 협상을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승리를 목적으로 하는 정치적 전술적 도구로 취급한다. 북한은 ‘마르크스-레닌주의’가 ‘김일성-김정일주의’로 바뀔 뿐이다. 공산주의자들에게 협상은 전쟁과도 같다.

이 점에 대해 러시아 태생의 정치사회학자로 소련 공산주의 연구의 미국 내 최고권위자였던 네이튼(Nathan Leites)박사의 다음과 같은 지적은 경청해야 마땅하다. “우리(공산주의자)가 허용한, 우리에게 강요된 양보는 다른 수단에 의한 다른 형태의 전쟁의 지속일 뿐이다. 양보로 인한 평화적 합의를 자본주의자들과의 평화적 합의라고 믿는 것은 큰 잘못이다. 이 합의는 전쟁과 같다.”(The Operational Code of the Poliburo, 1951)

60년도 더 된 통찰은 협상에 임하는 북측의 태도를 가늠할 단서가 된다. 이번 협상결과는 결코 최선이 아니며, 한국의 중요 이익을 다루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최악으로 치부하지 못하는 것은 현재 한국의 어정쩡한 대북관으로는 더 이상 어쩌지 못하는 수준이란 체념 어린 현실감 때문이다.
천안함과 연평도를 묶어 북한을 압박, 대타협의 물꼬를 틀 수도 있는 절호의 기회였지만 황병서도, 김양건도 자기들이 평양에서 수명(受命)한 사안 외에는 더 진전시킬 역량도 의지도 없는 임기응변 협상일 뿐이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도출할 역량을 갖지 못했기에 수용할 수밖에 없었던 결과라는 점을 담담하게 인정해야 한다.

그렇기에 아쉬움이 크지만 말이다. 좀 더 치열하게 협상의 ‘갑’으로 현장을 주도했더라면, 휴전선 11곳에 펼쳐 있는 확성기 수를 30% 줄이는 양적 감소를 협상의 지렛대로 사용했더라면 결과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미련이 남는다.

6.25동란 당시 정전회담에 UN군 수석대표로 참석하여 10개월 간 협상을 이끌었던 조이(C. Turner Joy)는 당시의 경험을 다음과 같이 압축하여 설명했다. “쟁취할 수 없는 것을 협상을 통해 얻으려 하고, 전쟁의 패배를 협상을 통해 얻으려 한다.”(How Communists Negotiate, 1955)북한 군 서열 2위 황병서, 대남선동을 총지휘하는 김양건 조화되기 어려운 이 둘이 한자리에 내려왔다는 것만으로도 북한의 절박함은 노출됐던 거다. 결과적으로 기존 남북 협상의 틀과 방식을 깬 전무후무한 협상임엔 틀림없다.

과거 남북협상의 연장이었다면 전형적인 공산주의 협상전술로 이렇다 할 성과 없이 지지부진 끝나기 십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엔 북으로선 당장에 절대적으로 얻어내야 할 것이 다급했기에 비록 가장 낮은 수위이긴 했으나 ‘유감’을 표명하고 기약할 수 없는 새로운 의제, 곧 이산가족상봉에 관한 새로운 협상을 흥정으로 내놓았던 거다.

남은 것은 실행의 문제인데 정작 중요한 것은 북한의 약속이행보다도 위반시 한국이 지켜야 할 보복에 대한 상대방의 신뢰를 구축하는 일이다. 발표된 공동보도문만으로는 북한의 승리로 비춰진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이고 현상적인 승리일 뿐이다.

그러니 승리니 어쩌니 하는 낯 뜨거운 표현은 남한이라도 좀 삼가자. 그냥 이럴 수밖에 없었던 자조적인 현실을 담담히 수용하자. 그리고 명문화되진 않았지만 보편 상식적인 재발방지라는 무언의 약속, 그것이 지켜지지 않으면 종이 위의 승리는 승리가 아니었음을 현실로 보여줄 거라는 남한사회에 대한 신뢰를 그들이 가질 때 진짜 평화는 싹을 틔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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