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회담 대표단 ‘격’이나 좀 맞춰라

▲ 이봉조 통일부 차관, 김만길 조평통 부국장

지금 진행 중인 남북 정부 간 실무급 회담의 ‘격(格)’에 대해 설왕설래되고 있다. 남측에서는 통일부 차관이 나갔는데 북측에서는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서기국 부국장이 나왔다.

조평통은 북한 통일전선부(통전부) 산하 기구다. 우리로 치면 통일부 산하 남북회담 사무국의 국장도 아닌 회담운영부장 정도가 나온 격이다. 이에 대해 10개월 만에 재개된 남북회담의 의미를 애써 높이려다 남한 정부 스스로 자초한 결과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정부 간 협상에 있어 공식적인 직책이 낮은 사람을 보낸 경우, 이는 상대에 대한 결례다. 의도적으로 격이 낮은 사람을 보냈다면 상대를 무시하는 의도를 깔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예컨대 A국에서는 장관을 보냈는데 B국에서는 차관을 보냈다면 ‘당신네 나라 장관은 우리나라 차관과 말상대가 된다’는 격하의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유령 직위 ‘내각참사’

북한은 지금껏 장관급 회담의 대표로 ‘내각책임참사’라는 직위의 인물을 내세웠다. 1998년 4월 남북당국대표 회담 때 정세현 당시 통일부 차관의 파트너로 전금철을 보내면서 최초로 ‘내각책임참사’라는 직함이 등장했다. 전금철의 뒤를 이어 2001년에 김령성이 바통을 이어받았는데, 남측에 소개된 그의 직함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참사’였다.

그러나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에는 위원장, 부위원장, 서기, 위원 등이 있지만 ‘참사’라는 자리는 없다. 북한의 어떤 조직에도 ‘참사’라는 직책이 없는데 북한은 종종 ‘조평통 참사’, ‘아태평화위 참사’라는 식으로 참사 직함을 남발하고 있다.

김령성의 실제 직책은 김정일을 보좌하는 주석궁의 서기처(남한으로 치면 청와대 비서실) 산하에 있는 통일안보조좌실이라는 기구의 부실장으로 알려져 있다. 이 직위를 굳이 남한식으로 따져보면 3급 공무원쯤 된다. 2004년부터는 권호웅이 내각책임참사라는 직함으로 장관급 회담 북측단장을 맡고 있다. 참사라는 직함 앞에 ‘책임’이라는 수식어를 달아 장관급이라는 생색을 내고 있는 것이다.

김령성의 또다른 공식적 직함을 찾자면 <민족화해협의회> 전 부회장인데, 알다시피 민화협은 정식적인 정부조직이 아니다. 북한에 정부조직과 민간단체의 구분이 없긴 하지만, 그동안 남한 정부는 정부조직이 아닌 민간단체, 그것도 부회장을 상대로 ‘장관급’ 회담을 해왔던 것이다. 북한이 남북대화에 줄곧 ‘조평통’ 간부들을 내보내는 것도 따지고 보면 남한을 무시하는 태도를 담고 있다. 조평통 역시 엄밀히 따지자면 북한의 사회단체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만드는 조’와 ‘깨는 조’ 존재

▲ 깨는 조 조장 박영수

1999년 6~7월 중국 베이징에서 남북차관급 회담이 열렸는데, 이때 양영식 통일부 차관의 파트너로 나온 북측 상대는 박영수 내각책임참사였다. 그때까지 알려진 박영수의 공식 직함은 조평통 서기국 부국장. 그런데 하루 아침에 내각책임참사의 명함을 달고 차관급 회담에 나섰다.

이런 식으로 북한은 아무 때, 아무에게나 필요하면 ‘내각책임참사’라는 이름을 얹어줘 협상테이블에 나서게 한다. 박영수는 1994년 남북회담 때 ‘서울불바다’ 발언으로 회담을 뒤집어놓은 적이 있고, 1999년 베이징에서도 ‘서해교전에 대해 남측이 책임지고 사죄하라’고 버텨 결국 합의점을 찾지 못한 채 끝나게 만들었다.

남측 회담관계자들은 “박영수가 단장으로 나서는 회담은 애초에 북측에서 결렬을 염두에 둔 회담이라 생각한다”고 말한다. 남북회담의 북측 대표단에는 이른바 ‘만드는 조’와 ‘깨는 조’가 있는데 박영수는 ‘깨는 조’ 조장으로 악역을 도맡아 한다는 것이다.

현재 남북장관급 회담 북측 수석대표로 있는 권호웅이 지난해 5월 열린 제14차 장관급 회담 때 탈북자들이 자발적으로 운영하는 인터넷 방송인 <자유북한방송>의 중단 등 무리한 요구를 한 적이 있었는데, 혹시 권호웅도 ‘깨는 조’의 조장으로 낙점된 것 아니냐는 우려(?)도 있었다.

북한이 사회단체 간부들을 장차관급 회담의 대표로 내세우는 것은 ‘남한을 정부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지적하는 전문가도 있다.

가명 쓰면서 혼란에 빠뜨려

▲ 권민이라는 가명을 사용해온 권호웅

또 북한의 남북회담 관련 간부들이나 대남통일전선사업을 담당하는 있는 간부 가운데 상당수는 가명을 사용하기도 한다.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과 <민족화해협의회> 회장을 겸임하면서 2002년 8.15민족공동행사 북측단장으로 서울을 방문한 김영대의 경우 김영호라는 가명을 사용하기도 한다.

오랫동안 대남통로의 역할을 해오던 전금철은 전금진이라는 가명을, 남북적십자 회담 수행원과 대표로 수차례 남한을 방문한 바 있는 당중앙위 통일전선부 제1부부장 임동옥은 임춘길이라는 가명을 사용해왔으며, 지금 남북장관급 회담 북측 수석대표로 있는 권호웅도 줄곧 ‘아태평화위원회 참사’라는 직함과 권민이라는 가명을 써왔다. 지난 수석대표였던 김령성의 본명도 김성수라는 설이 있다. 이외에도 가명을 사용하는 북측 인사는 많다.

국제축구경기에 참가하는 선수들은 상대팀 선수들의 얼굴을 일일이 기억할 수 없기 때문에 운동복에 적힌 넘버로 포지션이나 특징을 외우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상대팀을 헷갈리게 하기 위해 선수 서로 간에 넘버를 종종 교체한다. 마찬가지로 가명을 사용하거나 직함을 수시로 바꿔 상대를 혼란스럽게 만듦으로써 협상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미쳐보려는 의도라고 볼 수 있다.

곽대중 기자 big@dailyn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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