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북미관계 ‘선순환 구조’ 정착하나

제2차 남북정상회담이 한달 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북한과 미국이 6자회담의 양자관계정상화 실무그룹회의를 통해 핵시설 연내 불능화와 양국간 관계정상화 조치에 의견을 모음에 따라 남북관계와 북미관계가 선순환하는 구조가 만들어질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됐다.

남북-북미 관계의 선순환 구조는 서로 다른 프레임이지만 화해와 협력이라는 기본틀 속에서 서로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관계를 의미한다.

특히 이번에는 이라크 전쟁으로 정치적 궁지에 몰린 부시 대통령이 대북 관계 개선을 통한 북핵문제 해결에 적극적인 의지를 보이고 있고, 북한도 핵실험이라는 궁극의 카드를 쓴 데 따른 성과를 거둬야 하는 상황에서 내달초 제2차 남북정상회담이 예정돼 있음에 따라 남북관계 개선과 북미관계 개선이 상승작용을 일으킬 여건이 구비된 셈이다.

◇선순환 구조의 선례 = 이 구조가 처음 등장한 것은 1차 북핵 위기가 찾아왔던 1994년.

당시 미국이 북한의 영변 핵시설에 대한 ‘외과수술적’ 공습을 검토할 정도로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이 조성됐지만, 그해 6월 지미 카터 전 미 대통령이 방북해 김일성 주석과 면담을 통해 대화를 통한 평화적 해결 방안에 합의했다.

이어 북한과 미국은 1994년 10월 영변 핵시설 동결과 대북 경수로 제공을 골자로 하는 제네바 합의를 도출했고, 이같이 북미관계가 풀려가면서 김일성 주석은 당시 남측의 김영삼 대통령과 정상회담에 합의함으로써 한반도에 평화 분위기가 고양됐다.

선순환 구조의 두 번째 등장은 김대중 정부 시절인 1999-2000년.

북한이 ‘고난의 행군’이라는 최악의 경제난에 시달리는 가운데 남쪽에 남북간 화해협력을 지향하는 대북 햇볕정책을 내세운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북한은 남쪽과 협력에 나서기 시작했다.

당시 김 대통령은 미국의 빌 클린턴 대통령을 설득해 북한 문제의 포괄적 해결을 골자로 하는 한.미.일 3국의 조율된 대북 화해정책을 추진토록 했고 클린턴 대통령은 윌리엄 페리 전 국방장관을 대북정책조정관으로 임명해 ‘페리 보고서’가 나오게 됐다.

이에는 물론 1차 북핵 핵위기나 지난해 10월의 핵실험에 버금가는 1998년 북한의 대포동 1호 미사일 발사 위기가 배경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클린턴 행정부가 제네바 합의 후 관심이 멀어졌던 북한 문제의 심각성을 다시 깨닫고 포괄적 해결에 나서게 된 것이다.

페리 보고서에 따른 북미간 미사일 협상이 이어지는 가운데 남북간에는 2000년 6월 정상회담이 이뤄졌고, 이어 북미간에 조명록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과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각각 워싱턴과 평양을 교차 방문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 및 북미정상회담이 성사 직전까지 도달하기도 했다.

하지만 미국에 부시 행정부가 들어서고 고농축우라늄(HEU) 프로그램 의혹에 근거한 제2차 북핵위기가 불거지면서 북미관계가 어긋나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남북관계도 속도조절을 강요받는 악순환 구조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러나 작년 북한의 핵실험 이후 북한의 김계관 외무성 부상과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가 올해 1월 베를린에서 회동하고, 이어 6자회담에서 ‘2.13합의’를 만들어내면서 세번째 선순환 구조가 생겨나는 양상이다.

미국의 방코 델타 아시아(BDA) 문제 해결→북한의 영변 핵시설 가동중단 및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단 수용이 이어진 끝에 힐 차관보의 방북이 이뤄지는 등 북미관계가 개선되는 가운데 우리 정부는 북한에 식량을 지원했고 8월에는 제2차 남북정상회담의 개최 합의를 북한과 동시 발표하게 됐다.

내달 10월 정상회담을 앞둔 가운데 북한과 미국이 제네바에서 열린 관계정상화 실무그룹 회의를 통해 핵시설 불능화와 모든 핵프로그램 목록의 신고에 합의한 것은 남북정상회담에 긍정적인 요소로 작용할 것으로 보여, 남북정상회담에서 이뤄지는 논의와 합의가 다시 북미관계를 더욱 진전시키는 선순환을 가속화할지 주목된다.

◇공통점과 차이점 = 그동안 남북-북미관계 선순환 구조의 공통점은 미국으로부터 선순환의 매듭이 풀려나갔다는 점이다.

1994년에는 카터 전 미 대통령의 방북, 1999년엔 페리 보고서, 올해는 베를린 회동이라는 북미간 직접협상이 선순환 구조의 출발점이 됐다.

이는 미국과 관계가 풀리면 남한, 일본과 관계도 자연스럽게 풀려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북한의 국제정세 인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레온 시갈 미 사회과학연구소 동북아협력안보프로젝트 국장은 “미국이 북한과 관계기선을 해나갈 때만 북한이 한국과 정상회담에 합의하고, 미국이 대북관계에서 뒷걸음칠 때는 북한이 한국과 정상회담을 거부하는 패턴을 보여왔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같이 기본적인 구조는 유사하지만, 1,2차 선순환 구조는 북.미 양자틀로 이뤄진 데 비해 이번엔 6자회담이라는 다자틀 속에서 진행되는 차이점이 있다.

백학순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6자회담이라는 다자틀 때문에 일본이 들어와 미국에 (납치문제 등으로) 계속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구조가 과거에 비해 불리한 여건의 하나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백 연구위원도 6자회담 틀이 북.미 양자 논의 중심으로 변하고 6자회담은 그 결과를 추인하는 방향으로 변하고 있는 사실에 주목했다.

미 의회가 클린턴 행정부 2기 때는 공화당이 다수당으로 의회를 지배하면서 대북 중유제공 등 클린턴 행정부의 대북정책에 제동을 걸었으나, 현재는 북한과 협상을 통한 일괄타결을 시도해봐야 한다는 민주당이 다수당인 점도 다르며, 이는 북미간 합의 이행을 위해 과거에 비해 유리한 여건이라고 할 수 있다.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이 열렸을 때는 김대중 당시 대통령의 임기는 이상 남았으나 클린턴 대통령 임기는 1년도 채 남지 않았던 데 반해, 이번에는 노무현 대통령의 임기는 1년도 채 남지 않았으나 부시 대통령 임기는 1년 이상 남은 점 역시 선순환 구조의 정착에 어떤 유.불리 영향을 미칠지 관심사다.

부시 대통령은 지난달 30일 아.태지역 언론과 인터뷰에서 임기내 북핵 문제 해결을 자신하면서 “나는 선택했다. 이제는 북한 지도자가 선택해야 한다”고 북한과 관계개선 의지를 명확히 했다.

6자회담이라는 다자틀은 북한과 이해관계를 가진 국가들의 대북정책을 조율하는 포괄적 접근방식이 적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더디긴 하지만 북한의 입장에서 이번에 일거에 근본적인 문제 해결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전망 = 북미관계 정상화 실무그룹회의가 비핵화와 관계정상화라는 핵심적인 이슈에 가닥을 잡음에 따라 아시아태평양경제공동체(APEC) 정상회의 이후 열리는 6자회담 본회담은 ‘2.13합의’ 이후 새로운 실천합의를 만들어낼 가능성이 커졌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이 회담에서 불능화의 시한과 방식, 핵프로그램 목록 신고, 북한의 테러지원국 및 대적성국교역금지 대상 배제 등의 시간표를 마련하게 된다면 내달 2일 열리는 남북정상회담은 한결 가벼운 발걸음을 내딛게 될 전망이다.

핵문제가 6자회담에서 가닥을 잡으면 남북정상회담에서는 남북간 평화와 협력 문제에 논의를 집중할 수 있을 것이라는 관측이다.

또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노 대통령과 회담 과정에서 비핵화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재차 피력한다면 10월 중순께로 예상되는 6자 외무장관 회담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APEC에서 부시 대통령과 만날 노 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에서 김정일 위원장에게 부시 대통령의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김 위원장은 노 대통령을 통해 부시 미 대통령에게 어떤 답신을 보낼지도 주목된다.

김연철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교수는 “미국이 대북 정책전환의 의지가 강해보이는 만큼 핵문제는 북미관계 정상화 과정과 맞물려 6자회담에서 풀려나갈 것”이라며 “이러한 상황에서 남북관계도 진전해야만 정세에 뒤쳐지지 않고 핵문제 해결에도 윤활유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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