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관계 새 지평 열리나

8.15 민족대축전을 계기로 남북이 나흘간 일궈낸 성과는 비록 합의문은 없지만 남북관계에 새 지평을 열고 오랜 대립.반목에서 벗어나 화해.협력 그리고 평화로 향하는 동력을 확보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회담 없이 이벤트 중심이었지만 북측 당국 대표단의 행선지는 국립현충원이나 국회, 경주와 같이 이념적.정치적.민족적 상징과 관련돼 있을 뿐아니라, 그 것도 대부분이 초행길이었고 보폭 또한 전례없이 넓어지면서 낙관적 전망을 가능케 한다.

물론 파격 행보에 대한 의도를 놓고 해석이 분분한 만큼 예단은 금물이다.

하지만 현충원 참배 등이 쉽지 않은 자발적 결정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설사 그 속내에 부정적 측면이 있다고 하더라도, 분열과 대립으로 점철된 남과 북 사이의 화해와 협력이라는 큰 물줄기를 되돌릴 수는 없을 것이라는 분석이 우세하다.

이런 관측은 이번 축전의 성과를 현충원 참배와 국회 방문, 대통령 예방, 화상상봉 등 행사일정 중심으로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8.15를 전후해 한반도에서 일어난 변화를 동시에 올려놓고 봐야 한다는 논리를 기저에 깔고 있다.

예를 들면 서해상 평화 정착의 단초가 될 남북 해군사령부간 통신개통, 군사분계선 선전수단 제거, 북한 상선의 제주해협 통과 등과 같은 것들이다. 과거 상상할 수 없던 일이 어느 새 현실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국립현충원에서 분향과 헌화가 생략된 채 묵념을 통해 이뤄진 참배는 ‘찰나’에 가깝기는 했지만 한반도 분단역사에 한 획을 긋는 사건으로 평가된다.

독립유공자에 대한 참배로 국한하려는 북측의 일부 해석에도 불구, 6.25 전사자 위패와 무명용사 유골이 봉안된 현충탑 앞에서의 묵념은 그동안 남북관계 개선의 벽이었던 동족상잔의 과거사를 극복하려는 의지의 표현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이는 남북이 13일 군사분계선 155마일에서 선전물 및 선전수단을 완전히 들어낸 것이나 해군사령부 간을 24시간 연결하는 ‘군사 핫라인’이 가동된 것과 긴장완화와 평화지향이라는 측면에서 맥을 같이 한다.

더욱이 헌정사상 첫 국회방문에서 김원기(金元基) 국회의장이 남북 국회회담을 제의하고 김기남(金基南) 북측 단장이 “북남 화합과 단합에 국회의 역할이 중요하다 ”고 답한 것은 남북간 의회의 벽까지 허물 수 있는 단초가 될 전망이다.

아울러 6.15에 이어 8.15행사에 당국 대표단이 참여하면서 남북회담의 중심체인 장관급회담보다 격이 높은 고위급간 인적 교류를 통해 직접 이견을 확인하고 공감대를 형성해 나가는 튼튼한 통로를 확보한 점도 무시할 수 없는 성과이다.

특히 6.15 때 정동영(鄭東泳) 통일부 장관이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을 만나고 이번에 김기남 단장이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을 면담한 것은 대표단을 메신저 삼아 남북 정상 사이에 간접대화를 하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노 대통령이 17일 김 비서를 통해 김 위원장과 안부를 주고 받은 뒤 “새로운 역사가 만들어진다는 느낌을 받았고, (북측 대표단이) 이번에 현충원을 방문해준 것은 아주 참으로 좋은 일”이라고 밝힌 것은 분명히 새로운 흐름인 것이다.

북측 대표단의 움직임과 휴전선 아래위에서 일어난 변화가 맞물리면서 2000년 6.15 공동선언 직후 한반도에 불었던 훈풍이 더욱 힘을 받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심지어 2000년 당시 데탕트 흐름이 도중에 멈칫거렸고 지난 해 7월부터는 10개월간 멈춰서기도 했지만 이번이야말로 평화체제를 향한 남북간 신(新)데탕트 분위기가 본격화되고 있는 게 아니냐는 관측까지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다.

이런 전망은 우리 대표단이 이번 행사 연설에서 냉전해체와 평화체제 구축에 초점을 맞췄던 움직임과 직결돼 있다.

정동영 장관은 14일 “이제부터 우리는 본격적으로 분단과 정전상태를 청산하고 평화체제를 만들려는 노력을 시작해야 한다”고, 15일에는 “평화를 통해 번영을 누리고 번영을 통해 평화를 공고히 해 한반도의 대결과 정전상태를 종식하고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구축해 가자”고 강조하며 ‘역사적 결단’을 촉구한 것이다.

이는 6.15선언 이후 5년간 우여곡절을 겪기는 했지만 남과 북이 서로 적대하거나 공격할 의사가 없음을 함께 확인했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그 바탕 위에 종전 남북관계의 주류였던 경협을 확대해 나가는 동시에 여기에 군사적 긴장완화 협의를 본격적으로 시작, 마지막 냉전의 섬인 한반도를 영구평화지대로 만들고 분단 60년의 한을 풀겠다는 비전을 보여준 것이다.

공동번영과 냉전종식은 두 갈래가 아니라 결국 한 길이 된다는 논리이다.

이에 대해 절차를 포함한 방법론에서는 이견이 있어 보이지만 북측도 그동안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해야 한다며 줄곧 주장해 온 만큼 그 목표에는 이견이 없는 상황이어서 향후 어떤 식으로 평화체제 논의가 가시화될지 주목된다.

이런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넘어야 할 산도 적지 않다.

평화체제 논의를 위해서는 핵심 현안인 북핵 문제 해결이 선행돼야 한다는 점에서 이달 말 속개될 예정인 제4차 6자회담의 진전 여부가 관건이다.

이 달 초 4차회담에서 중국이 내놓은 제4차 초안이 비핵화와 북미 관계정상화 등 한반도의 미래를 결정지을 원칙들이 담긴 만큼 6자회담의 성과 없이는 평화체제 논의도 요원할 일이 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6자회담이 진전 없이 막을 내릴 경우 남북관계의 미래도 장밋빛에서 잿빛으로 바뀔 것이라는 우려도 적지 않은 상황이다.

이와 관련, 정 장관은 이번 축전기간에 북한의 김기남 단장과 승용차에 동승해 행사장 사이를 오가면서 핵문제와 관련한 북측의 결단을 계속해서 설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어 그에 대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결단 여부가 주목된다.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은 17일 정례브리핑에서 “8.15 축전에 참가한 북한 대표단의 서울 방문 계기를 통해 남북관계 발전을 위해 핵문제가 조속한 시일내에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뜻을 전했다”며 “4차 6자회담 속개시 성과있게 마무리하는 게 중요하다는 점을 여러가지 계기로 전달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남북관계에서는 6월 장관급회담에서 개최하기로 합의한 이후 열리지 못하고 있는 장성급 군사회담의 조기 개최 여부와, 열릴 경우 어떤 성과를 만들어 낼 지가 향후 분위기를 예측할 수 있는 척도가 될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북측이 그 간 난색을 표해 온 국군포로 및 납북자 송환 문제를 협의하는 23∼25일 제6차 적십자회담의 성패도 현충원 참배를 비롯한 일련의 긍정적인 움직임이 새 역사 만들기로 이어질 수 있을지를 가늠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전망이다./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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