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관계 ‘버전’이 바뀌고 있다

최근 남북 접촉의 내용과 행태에서 주목할 만한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지난 8월 김정일 위원장의 최측근인 김기남과 김양건 등이 조문사절로 방한하였을 때, 과거와 같은 ‘특별 대우’는 없었다. 이명박 대통령과의 면담 요청은 통상적인 의전절차에 따랐으며 이 과정에서 북한 조문사절단은 일정을 하루 연기하는 것을 기꺼이 감수하였다. 일부 남한 인사들이 이들에 대한 대접을 놓고 불만을 표시하기도 하였으나 정작 북한 조문단은 방문일정을 마치면서 만족감을 표시하였다.


보도에 의하면 이들은 이명박 대통령과의 면담에서 김정일 위원장의 정상회담 의지를 전달하였고 실제로 이를 위한 실무접촉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정상회담은 핵문제의 의제 포함여부에 대한 이견으로 성사되지 못하였지만, 북한은 핵문제만을 제외하고는 상당히 적극적으로 임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지난 일년반 동안 비핵·개방·3000은 “같은 민족을 모독하는 것”이며 6.15 선언과 10.4 선언의 이행 없이는 남북관계 진전은 꿈도 꾸지 말라던 북한의 주장이 간데 없이 사라진 것이다. 북한의 이런 태도 변화는 6.15 선언과 10.4 선언의 이행 촉구에 공감을 표시하며 이명박 정부를 압박했던 남한내 일부 인사들 마저 당혹스럽게 하는 것이었다.


북한의 유화적 태도는 대북제재를 위한 국제공조를 벗어나고 미·북대화의 장애물을 제거하며, 남한으로부터 시급한 식량지원을 얻기 위한 것 등 다양한 목적이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실제로 이후 북한은 미·북대화 재개 노력에 나섰으며 남한에 이산가족 상봉의 대가를 요구하기도 하였다. 요컨대, 북한은 유화적 태도를 통해 핵보유를 기정사실화하고 실리를 얻으려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다른 한편 북한의 태도 변화는 햇볕정책에 입각한 남북관계의 구 버전에 매달리는 것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남북관계의 새로운 버전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북한의 태도변화는 이명박 정부가 북한의 협박과 대내적 압박에도 불구하고 원칙을 지켜온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역대 한국정부는 남북관계의 성과에 집착하였고 북한은 이를 이용하여 왔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북한과의 전략적 대화와 ‘대화를 위한 대화’를 거부함으로써 북한의 의도에 말려들지 않을 수 있었다.


북한의 태도변화는 북한이 경제난에도 불구하고 장거리 로켓과 간부용 선물비용으로 수억 달러를 사용하면서 허세를 부릴때부터 예견된 것이었다. 남북교역 흑자는 급감하는 데 반해서 북·중교역 적자는 급증함에 따라 북한의 외화부족이 더욱 심각해지고 있으며 김정일의 건강악화와 엘리트들간의 갈등 조짐 등으로 북한은 한계상황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향후, 우리의 대북 정책의 원칙과 목표를 더욱 확실히 하여 남북관계의 새로운 버전을 가다듬어야 할 것이다. 남북관계의 구버전은 북한의 특수성과 예외성을 바탕으로 한 남북관계를 의미한다. 북한이 원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미리 파악하고 이를 맞춰주는 것이 언필칭 북한 전문가들의 ‘전문성’으로 간주되기도 하였다. 자연히 ‘끌려가기’와 ‘눈치보기’가 불가피하였다. 구 버전 하에서 남북관계가 외형적으로 팽창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북한이 ‘특별 대우’에 안주하는 한 남북관계는 이념, 민족, 정치의 이름으로만 추진되어야 하기 때문에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반면, 남북관계의 새로운 버전은 북한의 특수성과 예외성이 아닌 남북관계의 보편성에 기초하는 것이며, 이는 남북관계를 업그레이드하기 위해 불가피한 것이다.


예컨대, 북한 대표단을 ‘특별 대우’하면 남북관계가 진전되고 ‘정상 대우’ 하면 남북관계가 파탄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이번 경험 뿐만 아니라 지나간 오랜 경험들이 말해 주고 있다. 본격적인 남북 경협은 민간기업의 참여와 국제협력 하에서 비로소 가능한데, 이것이 되기 위해서는 북한의 비핵화와 개방이 선행되어야 한다.


과거와 같이 북한에게 적당히 지원하고 교류하면 남북관계는 바로 회복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이런 식으로는 결코 북한이 원하는 경제회생도 우리가 원하는 남북경제공동체도 요원할 것이다. 이러한 정책은 상대방을 속이고 나 자신도 속이는 것이다.


최근 북한은 핵개발에서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으나 체제문제에서는 고립이 심화되는 대가를 치름으로써 체제의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다. 북한은 여전히 핵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것으로 보이나, 우리의 확고한 원칙이 변치 않을 것임을 깨닫기 시작하면서 이에 적응하려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명박 정부는 출범 이후 최우선 과제로 경제문제에 집중하면서 남북문제에 대해서는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때가 이제 오고 있는 것 같다. “몸에 좋은 약은 입에 쓰다”는 속담처럼 북한이 남북관계의 새로운 버전을 당장 받아들이기는 고통스러울지 모르나 결국 자신들에게 이득이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길 바란다.


※외부 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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