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앞치마’가 그리웠다

▲ 수해복구 노동현장의 여성들 <사진:연합>

북한에 있을 때, 가까운 지인들 앞에 예쁜 앞치마 차림으로 한번 나서보는 것이 여자로서 나의 소원이었다고 한다면 사람들이 웃을까?

당장 끼니 마련에 급급해 다른 욕망은 일체 엄두를 낼 수가 없던 북한에서 가끔씩 그려보곤 했던 단아한 앞치마 차림의 내 모습은 여자로서 나를 느끼게 하는 마음속의 작은 희망이었다.

하지만 여성으로 마흔에 이르기까지 북한에서 살면서 나는 나의 몸에 앞치마를 둘러본 행복한 경험이 없다. 즉 북에서 나의 개인적 삶은 ‘앞치마를 알지 못한 여인’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 것이다.

내 어머니의 하얀 앞치마

나의 눈에 최초로 다가왔던 앞치마는 내 어머니의 것이었다. 집안에 그나마 안정이 흐르고 당신의 건강도 허락하던 찰나의 나날이었다.

부엌에서 동자질(잡다한 가사일) 하는 내 어머니의 치마 앞에 휘장처럼 늘여져 있던 앞치마는 지금처럼 양팔을 껴서 어깨에 거는 것이 아니었다. 그냥 끈으로 허리에 묶게 되어 있어서 ‘패션’과는 거리가 멀었다.

현대 앞치마의 정갈함보다는 푸근하고 후덕한 느낌을 안겨주던 것이었는데, 집안 살림이 어려워지고 어머니께서 병석에 눕게 되자 곧 사라지고 말았다.

어머니의 앞치마는 희망 없는 병마와 촉박해지는 집 살림으로 스스로 자기존재를 부인해버린 어머니의 마지막 선택처럼 짙은 어둠의 빛깔 속에 절어 사라지고 말았다. 앞치마는 그 후 나와 인연을 끊은 듯 했다.

앞치마를 ‘천민 여성’의 상징으로 본 여연구

십여 년도 퍽 지나 다시 내 의식 속에 앞치마의 모습이 비교적 선명하니 스며들었다. 여운형의 딸 여연구 여사의 이야기를 통해서였다.

북한은 여운형을 형상한 예술영화 “민족의 길” 상, 하편을 만들어 내놓았는데 정작 그 영화를 보고 난 여운형의 맏딸 여연구의 입에서 쏟아져 나온 말은 ‘면전에서 모욕을 당한 듯한 사람의 분노’였다.

사연인즉, 이 영화가 전 공화국 관객 앞에서 아버지와 자기 일가족을 비하시켰다는 것이었다.

당시 나는 여연구가 어떤 장면들에서 억울해 하였는가에 대해 들은 말은 많았는데, 이상하게도 내 기억 속에 남은 것은 여연구가 모친의 앞치마에 대해서 말한 것뿐이다.

“우리 어머님은 부엌에서 동자질하던 앞치마 차림으로 대문에 나가 손님을 맞아들인 적이 절대로 없으셨어요!”

나는 순간 ‘앞치마를 입는 것도 예의범절이 있는가?’라는 생각이 들어, 여연구의 생각이 무척 궁금해졌다. 앞치마 입고 손님을 맞으면 무엇이 실례가 되는가? 앞치마 차림으로 손님을 맞이하는 것이 ‘양반과 상놈’을 가르는 기준이 될 정도로 앞치마가 ‘천민 여성’을 상징하는 것인가?

조총련 여성들의 세련된 모습에 놀라

1989년 평양에서 열렸던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 당시, 나는 앞치마에 대해 보다 감각적인 접근을 할 수 있었다.

당시 외국인 숙식장소인 광복거리에서는 재일조선인 총련계 여맹원들이 현대적 매점을 길 양쪽에 쭉 늘이고 앞치마 차림으로 스낵식품을 판매하였다.

여성성의 가치에 대해 어떤 교육도 받지 못한 북조선 촌뜨기인 나는 같은 여성으로서 노상 기가 죽게 만드는 그녀들의 기품 있으면서도 고객의 간을 녹이는 매너와 옷차림에 어안이 다 벙벙해질 지경이었다.

그쪽에 비하면 나무등결 같은 나는 섹시미를 무기처럼 휘두르는 ‘처녀티’는 고사하고 인간의 냄새조차 풍겨지지 않는 반동물처럼 느껴졌다.

게다가 그녀들이 유니폼처럼 입고 있던 빨간색과 검정 계통 곤색이 잘 조화된 산뜻한 앞치마는 우유빛 흰 살결을 한껏 돋보이게 해주어 나는 눈을 뗄래야 뗄 수가 없었다.

정말이지 그들의 앞치마는 그냥 앞치마가 아니었다. 여자를 여성으로 새롭게 태어나게 해주는 그 무엇이었다.

그런 차림을 하고 나선 여인은 누구나 따뜻해 질 수밖에 없고 그 앞에 선 사람은 누구라도 인간적으로 변화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어느 번역작가의 화사했던 모습

몇 년 후에 그런 앞치마 차림으로 손님을 맞고 배웅하는 북한 여성을 드디어 목격하였는데 그 광경이 그렇게 황홀할 수가 없었다.

나는 김일성의 러시아어 통역관으로 키우다 실패한 어떤 여성의 집에 저녁식사 초대를 받았다.

舊소련 시절 노모노쏘브 대학에서 수재로 명성을 떨쳤던 그녀는 러시아 현대소설의 3인방 중 한 명인 아이뜨만또브의 “단두대”를 비롯, 많은 러시아 소설들을 탁월하게 번역해 북한 작가들 속에 일약 스타로 떠올랐다.

그런 그녀가 아릿따운 앞치마 차림으로 집에 온 손님들을 맞이하고 배웅하는 것이었다.

시내의 모 대학 교수인 한 남성분이 그런 그녀에게 작별인사를 하면서 이런 뜻있는 말을 건냈다.

“늘 교단에 서던 모습만 보아왔는데 그렇게 앞치마를 아련하게 입으시니 여성적이고 섬세해 보이시고 느낌이 새롭습니다.”

그랬다. 그녀의 번역작품을 읽지 못해(입소문으로만 떠돌던 그녀의 번역본은 4.15문학 창작단 작가들만 볼 수 있었다) 그녀의 번역능력이 얼마나 뛰어난지는 몰랐지만, 화사한 앞치마 차림의 그녀는 한 편의 시라고 명명하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한국 와서 처음 앞치마 고르던 기억

북한을 탈축해 한국에 들어온 나는 가구와 살림살이를 갖추고 나자, 앞치마에 대한 고민에 빠졌다. 담당형사는 나의 고민을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는 동네 슈퍼마켓에 가면 언제라도 싼 값으로 앞치마를 살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여기저기 돌아다녀 봐도 내가 원하는 색상과 디자인의 앞치마는 없었다. 마침내 내가 다니던 교회 옆 현대백화점에서 내 마음을 끄는 디자인과 색상의 앞치마를 발견했다. 눈도장을 찍어놓고 세일 날짜까지 기다렸다.

내가 그것을 손에 넣었을 때 나는 이미 북한이 방치시켜버린 덕에 나무등걸 같아졌던 그런 여자가 더는 아니었다.

최진이 前조선작가동맹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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